황창랑무(黃昌郞舞)
신라부터 조선후기까지 황창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추는 검무
황창무는 통일신라 이전에 백제왕을 죽이고자 검무를 추었던 신라의 황창랑(黃昌郞)의 고사에서 유래된 춤이다. 황창의 얼굴을 본뜬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면서 황창의 충성심과 기개, 용맹함을 표현하였다. 주로 경주 지역에서 어린 동자들이 춤추었으나 조선후기에는 교방에서 기녀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황창무는 삼국통일 이전 신라시대부터 비롯되었다.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 옛 지명은 동경 또는 계림)의 풍속을 기록한 『동경잡기』권1「풍속」편 ‘무검지희(舞劍之戱)’ 조에서 황창무의 유래를 볼 수 있다.
‘무검지희(舞劍之戱)’
황창랑(黃倡郞)은 신라 사람이다. 전설에 의하면 나이 칠세에 백제의 저잣거리에 들어가 칼춤을 추니 구경꾼이 담처럼 모였다. 백제왕이 이를 듣고 불러 보고는 당으로 올라와 칼춤을 추라고 명했다. 황창랑은 그리하여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찌르려 하자, 백제 사람들이 그를 죽였다. 신라 사람들이 그를 가엾게 여겨 그의 형상을 본따서 가면을 만들고 칼춤을 추는 형상을 만들었는데 지금까지 그 칼춤이 전해온다.
(黃昌郞新羅人也 諺傳 年七歲入百濟 市中舞劍 觀者如堵 濟王聞之 召觀 命升堂舞劍 倡郞因刺王 國人殺之 羅人哀之 像其容 爲假面 作舞劍之狀 至今傳之.)
황창이 백제왕 앞에서 칼춤을 추다가 백제왕을 죽이려 했지만, 백제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고, 신라 사람들이 이를 안타까이 여겨 황창과 황창의 충의(忠義)를 기리기 위해 황창을 본따서 가면을 쓰고 칼춤을 추면서 황창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동경잡기』권2「인물」편 ‘이첨변왈(李詹辯曰)’ 조에 고려 말 문장가였던 이첨(李詹, 1345-1405)은 자신이 경험한 황창무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을축년 겨울에 계림(鷄林)에 객(客)으로 갔을 때 부윤(府尹) 배공(裵公)이 향악(鄕樂)을 베풀어 위로하였는데, 가면을 쓴 동자가 뜰에서 검을 들고 춤을 추기에 물었더니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신라에 황창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15, 6세 정도이나 춤을 잘 추었다. 그는 왕을 뵙고 말하기를 원컨대 임금님을 위하여 백제왕을 쳐서 임금님의 원수를 갚겠습니다. 임금이 허락하자 곧 백제로 가서 시가에서 춤을 추니 백제 사람들이 담처럼 빙 둘러서서 구경하였다. 백제 임금이 듣고 궁중에 불러들여 춤추게 하고 구경하였다. 황창이 임금을 그 자리에서 찔러 죽이고 드디어 좌우 신하들에게 살해되었다. 그의 어머니가 듣고 목 놓아 슬피 울다가 눈이 멀었다.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 눈이 도로 밝아지게 하려고 사람을 시켜 뜰에서 칼춤을 추게 하고 ‘황창이 와서 춤을 춘다. 황창이 죽었다는 말은 거짓이다.’라니 그의 어머니가 기뻐서 울다가 즉시 눈이 도로 밝아졌다고 한다. 황창은 어렸지만 능히 나라 일을 위해 죽었으므로 향악에 실려 전해진다.
그런데 “검푸른 눈썹의 여아가 황창무를 추네[翠眉女兒黃昌舞]”라 했다. 이전까지 남아의 역할로 추었으나, 17세기부터 동기(童妓)가 무인 복장으로 추었다. 박종(朴琮, 1735-1793)도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던 중 1767년 경주관아에서 교방 관기가 가면을 쓰고 검기로 대무하는 황창무를 관람했다. 그 감상에서 “대개 이 악은 본래 신라에서 나와 전래된지 천여 년이다. 사람들이 우리 동방의 제일이라고 한다.”고 했다. 그리고 이영익(李令翊, 1738-1780)은 「동국악부(東國樂府)」에서 황창무를 설명하며 영남 교방에 지금도 이 춤이 연희되고 있다고 했다.
또 강위(姜瑋, 1820-1884)는 경주로 가는 중에 이 춤을 보고 “연희장에서 쾌활하게 황창무를 공연하네[戲塲快活演黃倡]” 라 했다. 정현석(鄭顯奭, 1817-1899)은 진주의 가무를 정리한 교방가요(敎坊歌謠)(1872)에 황창무를 간략하게 소개하기를, “8세 소년이 신라왕을 위한 꾀로 백제의 시정에 나가 칼춤을 추었다. 백제왕이 불러들여 춤을 추게 하자 황창이 왕을 찔러 죽였다. 혹은 관창이라고 한다.(八歲兒 爲新羅王 謀往百濟市劍舞 百濟王召人令舞 黃昌揕王 或云官昌) ”고 했다. 그렇지만 춤에 대한 구체적 설명은 없다.
조선 후기까지 황창무는 경주를 중심으로 영남을 대표하는 향악으로 연행되었으며, 황창랑의 서사가 담겨 있는 검무라고 하겠다. 하지만 조선 중기 이후에 교방의 어린 기생들이 전복(戰服)을 입고 쌍검을 들고 추었고, 조선 말에는 가면을 쓰지 않은채 추었다. 다만 교방에서 2인이 추는 <검무>가 전국적으로 유행하면서 황창무는 점차 추어지지 않다가, 20세기에 들어서 전승이 끊어졌다.
황창무의 내용은 황창의 충성심과 기개(氣槪)와 용맹을 보여주는 것이다. 가면을 쓴 이유도 황창의 역할을 하기 위함이며, 검무를 추었던 황창의 모습을 상기하기 위해서였다. 황창무의 무보가 없으므로 구성을 명확히 알수 없지만, 박종이 남긴 『동경유록』「신라십무(新羅十舞)」에서 황창무의 전개를 짐작할 수 있다.
열 번째는 황창무이다. 한 명의 기녀가 황창 탈을 쓰고, 전립과 군복을 입는다. 처음에는 단검으로 춤추다가 끝내는 쌍검으로 춤춘다. 한 기녀와 상대로 하여 춤추고 또 마주 싸우는데 빈번히 압박하고, 몸을 굽히고 펴며 떨치고 물리치며, 빙빙 회선하는 검광은 마치 눈[雪]과 같다. 서로 섞여 범하고 어지러우며, 보기에 몹시 늠름하다.
(十曰, 黃昌舞, 一妓着黃昌俑子戰笠軍服. 初以單劒舞, 終以雙劒舞. 一妓又對作頻挫. 屈伸揮斥, 盤旋劒光如雪. 互錯凌亂 看甚凜然. 盖此樂本出新羅而傳來千餘年. 人稱吾東第一.)
황창무는 처음에 기녀 1인이 황창의 가면을 쓰고 단검(單劒) 즉 검 하나를 들고 춤추다가 후반에서 쌍검(雙劍)으로 춤추는데, 다른 기녀와 상대하며 교전(交戰)하듯이 서로 압박하며 섞이기도 한다.조선후기 교방 여기들이 2인이 대무하며 추었던 검무와 유사하다.
황창무에서 특정한 춤사위를 명칭하기는 어렵지만, 여러 동작들을 짐작할 수 있다. ‘크게 돌며 곁눈질로 보고, 변하며 도는 것이 순식간이다.[周旋顧眄, 變轉倏忽] ’, ‘몸을 굽혔다가 피며 떨치고 물리친다[屈伸揮斥]’, ‘빙빙 돌아가는 검광은 마치 눈과 같다[盤旋劒光如雪]’, ‘좌로 돌고 우로 선회하며 형세가 도네[盤右旋勢轉焉]’, ‘검을 던지다[擲劒]’ 등이다. 검술을 보여주는 동작들과 대결의 동작들이 있으며, 동작들은 빠르고 늠름하다.
황창무는 무용수가 남자 아이의 역할로 가면을 쓰고 추는 검무이다. 이 춤의 복식은 두 가지로 추측할 수 있다. 첫째, “단후의를 입고 머리는 범털과 같다[短後之衣頭虎毛]”고 김만중이 표현했는데, 중국 두보의 시〈형남병마사 태상경 조공 대식도가(荊南兵馬使太常卿趙公大食刀歌)〉에서 “장사는 짧은 옷에 두호모 쓰네[壯士短衣頭虎毛]”라는 구절이 있다. 즉 몸을 쓰는 장사나 무사들이 움직임을 가볍게 하기 위한 복장을 설명한 것이다. 둘째, 박종은 “황창무는 한 명의 기녀가 황창 탈을 쓰고, 전립과 군복을 입는다.[黃昌舞, 一妓着黃昌俑子戰笠軍服.]”고 했다. 치마저고리 위에 무인의 복색인 전립을 쓰고 전복을 입은 것이다. 가면의 형상을 구체적으로 알기 어렵다. 다만 황창의 가면은 어린 남자아이이고, 용맹한 인상을 담았을 것이다.
이 춤의 무구는 검이다. 조선후기에 단검을 쓰다가 쌍검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그 이전에는 어떤 형태의 검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황창무는 삼국시대부터 신라에서 추어진 춤으로,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는 춤이다. 황창랑의 설화는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이 겨루던 시기에 벌어졌을 만한 이야기이며, 가면을 쓰고 추는 칼춤으로 작품화되어 조선 후기까지 추어졌다. 각 시대마다 국력이 강하든 약하든, 황창무는 호국의 정신과 용맹함과 기개를 일깨우는 춤으로 회자되었다. 경주를 중심으로 추어졌으며, 조선 중기를 넘기며 기녀들이 추었고, 조선 후기에는 가면을 벗고 추면서 그 정체성이 희박해졌다. 20세기 초에 전승이 끊어졌다.
김영희춤연구소 편, 『검무 연구』, 보고사, 2020. 이종숙, 「경주교방 황창무 복원 재현을 위한 연구 Ⅰ: 악부시(樂府詩)를 기반으로」, 『무용역사기록학』Vol.50, 무용역사기록학회, 2018.09. 이지양, 「한문학에 나타난 우리 음악과 무용」, 인천 : 한국한문학연구 제37집, 한국한문학회, 2006. 정현석 편저(2002). 성무경 역주. 교방가요. 서울: 보고사. 조혁상(2004). 「조선조 검무시의 일연구」. 성균관대학교 석사학위논문.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