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춤, 금무, 도무(釖舞)
조선시대부터 현재까지 기녀들이 양 손에 칼을 들고 추는 춤
조선시대부터 전국의 감영 소속 교방의 기녀들이 추었다. 2인이나 4인, 8인 구성의 대무(對舞)로 추는데, 여성 무용수들이 치마저고리에 전복(戰服)을 입고 전립(戰笠)을 쓰고 춘다. 칼을 들지 않고 등장하여 손춤을 추다가 칼을 잡은 후에는 검술과 함께 활발하게 추는 춤이다. 호국(護國)정신과 상무(尙武)정신을 배경으로 예술성을 갖춘 춤이며, 현재 지역마다 상이한 특징의 〈검무〉들이 전승되고 있다.
교방에서 기녀들이 추었던 〈검무〉는 경주지역에서 조선초까지 가면을 쓰고 추었던 황창랑무에서 유래한다. 조선후기부터 기녀들이 탈을 쓰지 않고도 추면서 황창랑의 인물 성격이 사라지게 되었고, 교방에서 〈검무〉가 추어졌던 것이다. 1603년 평안도 성천의 교방 항목에 이미 검무가 포함되기 시작했다. 또 김창업(金昌業, 1658~1721)이 1712년 중국 사신으로서 여정을 기록한 『노가재연행일기(老稼齋燕行日記)』에 어릴 적에는 검무를 보지 못했지만 근래 팔도에 대유행을 하고 있다고 했다. 교방의 〈검무〉는 18세기 초부터 지방 감영의 잔치에서 빠지지 않는 종목이었고 조선말까지 추어졌다. 민간에서 계속 추어졌으며, 당시 주요관객인 양반 사대부들이 검무 시문을 다수 남겼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무검편증미인(舞劍篇贈美人)〉이나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검무기(劍舞記)〉가 대표적인 예이다. 당시 풍류객들에게 회자되었던 밀양 기생 운심(雲心)의 검무가 여러 시문에 묘사되었다. 검무의 그림도 민간에서 여러 편 그려졌다.
한편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해 1795년에 수원 화성에서 행한 봉수당 진찬에서 〈검무〉는 궁중잔치의 종목으로 처음 포함된 후, 대한제국까지 검기무(劍器舞)로 추어졌다.
일제강점기에도 검무는 전국의 기생조합과 권번의 기생들이 반드시 추어야 할 종목이었다. 『매일신보』 「예단일백인」(1914) 연재 기사와 『조선미인보감』(1918)에서도 기생의 대표 종목이었음을 알수 있고, 〈검무〉 사진도 다량 촬영되었다.
한국전쟁 후 산업화 과정에서 전통공연예술 전반이 침체되면서 검무가 별로 추어지지 않았으나, 진주검무가 1967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일찍이 지정되었다. 현재 통영검무, 해주검무, 한진옥류 호남검무, 이매방류 호남검무(초기 명칭은 광주검무였다.), 경기검무, 평양검무, 달구벌검무, 밀양검무, 구음검무 등이 추어지고 있다.
〈검무〉는 신라 화랑 황창랑이 나라를 지키고자 했던 호국(護國)의 의미와 무예를 숭상하는 상무(尙武) 정신을 배경으로 추어진 춤이다. 한국춤의 기법이 중심이면서 검술 동작이 결합되었으며, 정의감에서 우러나오는 기개(氣槪)를 뜻하는 ‘협(俠)’이라는 미의식을 성취한 춤이다. 유득공의 〈검무부(劒舞賦)〉에 검무의 유래와 전개, 정서 등이 잘 담겨있다.
구성은 도입과정에서 전복과 전립을 갖춘 무용수가 등장하여 좌중에 절을 하고 손춤을 춘다. 전개과정에서 무용수는 바닥에 놓여진 검을 마주하게 되는데, 검 앞에 앉아서 검을 잡을 것인지 갈등하다가 쌍검을 잡게 된다. 검을 잡은 후 숙련된 검무를 보여주는데, 교전(交戰)의 과정도 있고 연풍대 동작으로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 절정과정에 이른다. 결말과정은 칼을 던지면서 춤을 마무리한다. 춤이 끝나면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한 좌중에 검기(劍氣)가 가득 찼다고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부터 검무의 긴장감이 축소되었다. 칼을 던지는 과정도 생략되었고, 춤 동작들이 순화되었다.
춤사위 구성에서 특징은 대무(對舞)이다. 좌우 대열이 마주보거나, 등을 맞대고 춤추기도 한다. 또 좌열의 무용수가 앞으로 나아가면 우열의 무용수는 뒷걸음을 한다거나, 자리를 서로 교차하면서 춤추기도 한다. 좌우 대열로 나누어 대결하는 춤이기 때문이다.
〈검무〉의 동작으로 ① 농검(弄劍)은 앉아서 검을 잡기 전에 검을 잡을 듯 말 듯 하는 동작이다.
② 왁대는 두 손목을 마주 붙이고 손바닥을 빳빳이 펴서 벌리는 동작이다. 손바닥을 붙이지 않기도 하며, 앉거나 선 자세에서 왁대 동작을 하기도 한다. 검무에만 있는 동작이다. ③ 연풍대(筵風擡)는 스스로 돌며 무대를 크게 한바퀴 도는 동작이다. 이때 오른손으로 칼을 뿌리거나 왼손으로 칼을 돌리는 등의 동작을 한다.
④ 칼돌리기는 칼의 몸이 빙글빙글 돌아가도록 만든 검무 무구로 하는 동작이다. 칼이 돌아가면서 번쩍거리며, 칼의 손잡이와 몸 사이에 끼워진 쇠조각이 부딪히면서 찰랑찰랑 소리가 난다. 이 소리와 빠르게 돌아가는 칼의 움직임은 춤의 긴장감을 높힌다.
복식은 치마저고리에 전복(戰服)과 전립을 갖추면서 무인(武人)의 특성을 드러낸다. 쾌자를 입고 전대(戰帶, 가슴띠)를 매며, 병사들이 쓰는 벙거지인 전립(戰笠)을 쓴다. 조선후기에 검무 무용수 2인의 치마저고리 색깔이 각각 다른데, 신윤복이 그린 〈쌍검대무〉 의 왼쪽 기녀는 녹두색 저고리에 붉은 치마를 입었고, 오른쪽 기녀는 청녹색 저고리에 푸른 치마를 입었다. 〈평양감사환영도〉 중 연광정이나 선화당의 검무 모습에서도 두 무용수 복식의 색이 다르다.
이는 검무에서 대결을 하는 2인의 특성을 보여주기 위해 색깔을 대비시킨 것이다. 그러나 현행 검무의 복식은 지역별로 색깔에 차이가 있지만, 각 검무에서 모두 같은 색 치마저고리를 입는다. 전립은 지역마다 다르게 깃털이나 술을 달아 화려하게 장식한다.
〈검무〉의 무구를 검기(劍器) 또는 무검(舞劍)이라 한다.
검기는 검 손잡이와 칼 몸으로 구성되며, 한 손에 한 개씩 들고 춘다. 조선후기에 검기의 길이는 팔 길이였으나, 조선 말에 팔꿈치 길이로 짧아졌다. 검 손잡이 끝과 칼등에 나비 모양의 장식인 유소가 달리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에 칼의 몸이 돌아가도록 손잡이와 칼 몸 사이가 개조되고 구름 모양의 쇠조각이 끼워졌으며, 칼은 더욱 작고 짧아졌다.
〈검무〉는 조선후기에 부국강병을 추구하고 상무정신이 고조되며, 풍류가 넉넉해지면서 널리 추어졌다. 검무는 역동적이고 갈등이 분명하면서 아름다운 춤이었다. 노랫말 없이 춤으로만 구성되었고, 지방 감영의 행사나 사신을 위로하는 자리에서 추어졌다. 이때 기녀의 검무에서 ‘별을 바다에 침몰시키는 검의 기운(劍氣星沉海)’(『이계집』 권4)을 느꼈다고 했다. 협(俠)의 미감을 보여준 기녀들의 검무가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의 검무는 이러한 기운이 삭감되었다. 칼을 빠르게 돌리며 기교를 보여주지만, 검(劍)의 위용을 찾기 어려웠다. 지역에서 금무(劍舞)라 칭하기도 했다. 20세기 후반에 권번 예인의 후예들이 지역에서 검무를 전승했으며, 기본 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검무는 오랜 역사성과 함께 다른 전통춤에서 볼 수 없는 미감과 예술성을 보유한 춤이다.
진주검무: 국가무형문화재(1967), 통영검무: 국가무형문화재 승전무에 추가지정(1987), 경기검무: 경기무형문화재(2011), 평양검무: 이북오도무형문화재 평안남도(2001)
김영희, 「검무 구조분석 시론」,『검무 연구』, 보고사, 2020. 김영희 외, 『한국춤통사』, 보고사, 2014. 임수정, 『한국의 교방검무』, 민속원, 2011. 조혁상, 조선후기 도검문학 연구, 학자원, 2021.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