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종 때 지방 교방에서 궁중으로 유입된 향악정재로, 정철의 관동곡(關東曲)을 노래하며 추는 춤
19세기 초 원주감영에서 정철의 「관동별곡(關東別曲)」을 노래한 관동무가 추어졌고, 1848년 순헌왕후 환갑을 축하하는 진찬에서 관동무라는 명칭 그대로 궁중연회에서 연행되었다. 8인의 무용수가 좌대와 우대로 나뉘어 관동지방의 절경과 감흥을 주제로 한「관동곡」을 노래하며 춤을 추는 향악정재이다.
관동무는 지방 교방에서 추어지다가 궁중으로 유입된 향악정재이다. 1820년대 강원의 원주감영과 26개 군현을 기록한 『관동지(關東誌)』에 원주교방의 가무 종목 중 관동무가 있었다. 또 박사호(朴思浩, 1784-1854)가 1829년의 중국 사행길에서 황해도 황주에 머물렀을 때 베풀어진 연회에서도 관동무가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민간에서 관동별곡이 유명했고 관동무가 널리 추어지다가, 궁중에 유입되어 헌종 무신년(1848)에 헌종(憲宗, 1827~1849, 재위 1834~1849)의 할머니인 순헌왕후(純元王后, 1789~1857)의 환갑을 축하하는 진찬에서 처음 추어졌다. 이에 대한 설명이 헌종 (무신) 진찬의궤「악장」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관동무.
옛 상신(相臣) 정철은 호가 송강인데, 관동 지방을 다스릴 때 관동별곡을 지었다. 무기(舞妓)로 하여금 노래하고 춤추게 했는데, 구부렸다 폈다하고 돌면서 구절에 맞춰 형상을 표현하였고 관동무라 이름 하였다. 향악에 사용한다.
○ 여기 8인이 2대로 나누어 관동곡을 같이 부르고 진퇴하고 돌며 춤춘다.
○ 가사는 한문과 한글이 서로 섞여 있기 때문에 싣지 않는다.
(關東舞. 古相臣鄭澈號松江, 按關東節, 作關東別曲, 令舞妓歌而舞之, 俯仰旋轉, 隨句象形, 名曰關東舞. 鄕樂用之.
○ 女妓八人分二隊, 竝唱關東曲, 進退旋轉而舞.
○ 歌曲眞諺相雜, 故不載.)
이 설명에서 관동무의 유래가 정철(鄭澈, 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이었으며, 구절에 맞춰 노래하고 춤도 추었음을 알 수 있다. 관동무는 궁중에서 추어지면서 8인 구성으로 격식을 갖추었으며, 71구 145행(성주본)의 「관동별곡」을 그대로 부르기에는 노래가 길기 때문에 이를 축약한 「관동곡」을 불렀을 것으로 추측된다. 무신년(1848)에 통명전 진찬과 통명전 익일 야연에서 2회 추어졌다. (무신)진찬의궤「공령(功伶)」에 좌무(左舞)에 학선(鶴仙)), 학희(鶴喜), 채란(彩鸞), 영옥(映玉)이, 우무(右舞)에 월향(月香), 초옥(楚玉), 윤희(尹姬), 금선(錦仙)이 춤추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궁중 연향에서는 추어지지 않았고, 1915년 가을에 열린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의 연예관 공연에서 다동기생조합 기생들에 의해 관동무가 추어졌다. 하지만 무보와 창사가 전해지지 않아 현재까지 재현되지 못하고 있다.
관동무의 가사는 의궤에 실리지 않았기 때문에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 없다. 「관동곡」을 부르며 춤추었으니 내용은 금강산과 관동팔경의 뛰어난 경치와 감흥을 표현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구성이나 춤사위 역시 홀기에 기록되지 않았기에 실상을 알기 어렵다. 다만 여덟 명의 무용수가 좌대와 우대로 나뉘어 노래 가사에 따라 형상을 표현하고 무릎을 구부렸다 폈다하고, 진퇴하고 돌며 춤춘다는 점은 알 수 있다.
1848년 진찬을 기록한 의궤에 1848년 진찬을 기록한 의궤에 관동무의 가사가 한문과 한글이 섞여있으므로 싣지 않는다고 했다. 「관동곡」을 부른다 했으며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관동별곡’의 가사를 참고할 수 있다.
1848년 3월 17일 통명전 진찬에서 추었을 때 관동무의 반주는 소규모 악대인 세취(細吹)로 〈원무곡(圓舞曲)〉을 연주했고, 이 곡의 아명은 〈전전환지곡(殿前歡之曲)〉이었다. 3월 19일 통명전 익일 야연에서 이 춤을 추었을 때도 세취로 〈원무곡〉을 연주했고, 이때 반주곡의 아명은 〈가연지곡(嘉讌之曲)〉이었다.
화관(花冠)을 쓰고, 남색속치마(裹藍色裳), 홍초겉치마(表紅綃裳)에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鏤繡帶)를 맸다. 손에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었다.
관동무는 노래중심으로 구성된 춤이며, 지방에서 연행하던 종목이 궁중으로 유입된 정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관동무의 가사가 한문과 한글이 섞여 있어서 의궤에 기록할 수 없다고 했으니, 민간에서 부르던 노랫말이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헌종 시기 진찬에서 공연된 후 궁중 연향에서 더 이상 추어지지 않았으니, 검무나 선유락처럼 궁중무 종목으로 정착하지 못했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조경아, 「조선후기 의궤를 통해 본 정재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9. 한국예술학과 음악사료강독회, 국역 헌종무신진찬의궤 권1,2,3. 민속원, 2004.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