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선취무(四仙醉舞)
조선시대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로, 신라 화랑 사선(四仙)을 소재로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추는 춤
사선무는 1829년 순조 보령 40세 축하 연향에서 효명세자가 직접 창사를 지어 처음 추어진 향악정재이다. 신라 때 화랑 영랑(永郎)·술랑(述郎)·안상(安祥)·남석행(南石行)을 사선(四仙)이라 칭했는데, 이들이 조선 왕실에 다시 와서 놀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을 노래와 춤으로 표현하였다. 연꽃을 든 2인을 1열에 두고, 좌무와 우무의 4인이 가무한다.
사선무는 순조(純祖, 1790~1834, 재위 1800~1834) 보령 40세와 즉위 30년이 되던 1829년 순조의 생일에 경복궁 자경전에서 추어졌다. 사선(四仙)은 신라 때 화랑 영랑·술랑·안상· 남석행(또는 남랑(南郎))을 가리킨다. 수려한 산수를 찾아다니며 심신을 수련하고, 금강산 무선대(舞仙臺)에서 네 사람이 풍류를 즐기는 중 술에 취해서 취무(醉舞)하였다는 고사에 기원을 둔 춤이다. 고려시대에 신라의 유풍으로서 사선악부(四仙樂府)가 있어 팔관회에서 사선악부의 가무를 연희했다고 한다. 유교국가인 조선시대에 들어서 이러한 가무가 추어지지 않다가, 1829년 기축 진찬에서 사선(四仙)의 고사를 소재로 한 사선무가 만들어져 연행되었다. 옛 사선이 와서 놀 만큼 태평성대라는 내용의 노래를 창사로 부른다.
1829년 기축 진찬 이후 1892년 임진 진찬, 1901년 신축 5월 진찬, 신축 7월 진연, 1902년 임인 4월 진연, 임인 11월 진연에서도 추었다. 사선무는 여성무용수인 기녀도 추었고, 무동(舞童)도 추었다. 일제강점기에 이왕직아악부에서는 연행하지 않았으나, 민간에서 활동한 기녀들이 사선무를 추었다. 1975년 이청자무용발표회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사선무를 안무해서 공연했고, 1981년 김천흥이 주도한 국립국악원의 전통무용발표회에서 재현되었다. 현재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전승하고 있다.
사선무는 신라시대의 사선(四仙)이 태평성대에 신선들의 봉궐(鳳闕; 한나라의 궁궐 이름으로, 일반적으로 궁궐 또는 조정을 의미)에서 노닐듯이, 삼각산(三角山) 아래 한양성의 금궐옥전(金闕玉殿)에 사선이 와서 놀 만큼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원(舞員)은 6인으로, 연꽃을 잡은 무용수 2인은 각기 연꽃 한 가지를 들고 앞에서 일대(一隊)를 짓고, 그 뒤의 이대(二隊)에는 좌무 2인과 우무 2인이 꽃을 들지 않고 짝을 지어 북쪽을 향하여 춤을 춘다.
사선무의 전개는 국립국악원 소장『(계사)정재무도홀기』에서 볼 수 있다.
우선 ① 꽃을 든 2인이 등장하여 춤춘 후, 4인이 등장하여 좌대와 우대로 나누어 선다. ② 좌무 우무 4인이 창사하고, 병창도 한다. ③ 좌대와 우대의 무용수가 대무(對舞)와 배무(背舞)를 하거나, 좌대와 우대가 각각 대무와 배무도 한다. ④ 회선하여 무원들이 제행일렬을 만들며 춤춘다. ⑤ 좌대와 우대가 동서로 서로 대를 바꾸고, 다시 원 위치로 바꾸기도 한다. ⑥ 팔수무를 추고 처음 대열로 만든다. ⑦ 대수(擡袖)하며 춤추고 물러나면 악이 그친다.
창사로는 1829년 효명세자의 예제(睿製; 왕세자가 직접 지은 시)한 악장을 부른다. 그런데 창사가 한문과 국문이 섞여 있으므로 의궤에 기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하지만 국립국악원 소장『(계사)정재무도홀기』에 사선무의 창사와 병창의 가사가 남아있다.
창사는 다음과 같다.
[원무 창사 편]
어와 성대(盛代)로다 해동금일성대(海東今日盛代)로다
나대(羅代)에 노든 사선(四仙)이 이졔 와 다시 노니
봉래(蓬萊)로 오시는가 영주(瀛洲)로 오시는가?
옥제(玉帝)게 명(命)을 바다
성주(聖主) 수(壽)를 빌냐
오대(鰲臺)로 좃차와셔 봉궐(鳳闕)에 조하니
북극(北極) 빗난 별을 옥작(玉爵)에 더으고져
태평(太平)으로 민 기상(氣象) 오날와 보단말가?
남산고한수장(南山高漢水長)이 황도(皇都)에 근본이니
천추만세(千秋萬歲) 이졔곰 무강(無疆)다.
경풍도국상서(慶豊圖國上瑞)를 다시곰 비옵노니
춘대옥촉(春臺玉燭)에 만물(萬物)이 소휘(蘇彙)로다.
동악(東岳)을 향(向)올가?
서악(西岳)을 향(向)올가?
남악(南岳)을 향(向)올가?
북악(北岳)을 향(向)올가?
중악(中岳) 놉흔 뫼이 삼각(三角)이 아니가?
만년진국(萬年鎭國)야
제업(帝業)을이 되시거다.
어와 우리들은 중악(中岳)에 노라옵자
삼각산(三角山) 상상봉(上上峯)에 서운(瑞雲)이 총울(葱鬱)니
금궐옥전(金闕玉殿)에 보좌(黼座)가 빛나셰라.
왕모부인(王母夫人) 청조(靑鳥)ㅣ 먼져 와 뎐 말이
천세반도(千歲蟠桃)을 마여 드리리라.
생소선악(笙簫仙樂)으로 헌천수(獻天壽) 노니
요지(瑤池)에 츄든 츔을 예와 다시 츄엇거다.
비노니 해옥주(海屋籌)에 만세(萬歲)를 더으고져
만세(萬歲)를 더은 후에
억만세(億萬歲) 더으고져
억만년(億萬年) 장춘(長春)으로 태평(太平)을 즐기놋다.
[원무 창사 편]
어와, 성대(盛代)로다. 해동(海東)의 오늘이 성대로다.
신라 때 놀던 사선(四仙)*이 이제와 다시 노니
*[신라의 화랑 영랑(永郞)․술랑(述郞)․남랑(南郞)․안상(安詳)]
봉래(蓬萊)로 오시는가, 영주(瀛洲)로 오시는가.
옥황상제로부터 명(命)을 받아
성주(聖主)께 장수를 빌려고
오대(鰲臺)[신선이 사는 곳]로부터 찾아와 대궐에 문안을 여쭈니,
북극(北極)의 빛난 별을 옥(玉)술잔에 더하고저!
태평(太平)으로 꾸민 기상(氣象) 오늘 와서 본단 말인가?
남산 높고 한강물 긴 것이 황도(皇都, 서울)의 근본이니
천추만세(千秋萬歲) 이제 더욱 끝이 없다.
경풍도(慶豊圖)와 같은 나라의 상서로움 다시금 비옵나니
사람마다 장수하는 태평성대에 만물이 소생하네.
동악(東岳)을 향하올까?
서악(西岳)을 향하올까?
남악(南岳)을 향하올까?
북악(北岳)을 향하올까?
중악(中岳) 높은 산이 삼각산이 아니던가?
만년토록 나라를 안정시켜
제왕의 사업을 이루셨다.
어와 우리들은 중악(中岳)에서 놀아보자
삼각산 상상봉(上上峯)에 상서로운 구름이 빽빽하니
금 같고 옥 같은 대궐에 어좌가 빛나는구나.
왕모부인(王母夫人)[선녀인 서왕모]에게 청조(靑鳥)가 먼저 와 전하는 말이
천세반도(千歲蟠桃)를 장차 드리리라
-> 천세를 누릴 반도(蟠桃;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복숭아)를
생황과 단소[簫], 선악(仙樂)으로 헌천수(獻天壽) 노래하니
요지(瑤池)에서 추던 춤을 여기 와서 다시 추는도다.
비노니 해옥(海屋)*의 산가지에 만세(萬歲)를 더하고져!
만세(萬歲)를 더한 후에
억만세(億萬歲) 더하고져
억만년(億萬年) 한결같이 태평성세를 즐기노라.
해옥(海屋)은 바다의 신선이 사는 곳
[원무 병창] 편
산하일월(山河日月)에 옥력장(玉曆長)시니
보록영창(寶籙永昌)이소셔
극채휘영요준중(極彩耀暎堯樽中)
성수만년(聖壽萬年)이쇼셔
[원무 병창] 편
산처럼 강처럼 해처럼 달처럼 옥력(玉曆, 나라의 운수)이 길고 기니,
왕실의 미래 영원히 번창하시기를!
지극히 찬란한 빛이 요준(堯樽)*에 빛나니
성수(聖壽)는 만년을 누리소서.
* 요임금이 아무나 먹으라고 내놓은 술동이. 어진 정치를 상징한다
- 원문 출처: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번역: 강명관
1829년 진찬에서 무동은 복두(幞頭)를 쓰고, 남포(藍袍)·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에 홍야대(紅也帶)를 띠고 흑화(黑靴)를 신었다. 1901년 7월 진연에서 여성무용수는 화관을 쓰고, 녹초단삼(綠綃單衫)을 입고, 안에는 남색상(藍色裳), 겉에는 홍초상(紅綃裳)에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를 매고, 오채한삼(五彩汗衫)을 손에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무구로는 연화(連花)를 든다.
사선무는 도교적 색채를 강하게 보여주는 춤이다. 조선의 정치이념이 유교임에도 불구하고 옛 왕조인 신라시대의 고사를 취해서 창작된 정재를 연행한 것은 조선 후기 궁중무의 다양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 춤은 향악정재로 분류되지만, 연꽃을 든 두 명의 무원이 당악정재에서 춤을 인도하는 죽간자와 유사한 역할을 한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이흥구 손경순 역, 『국역정재무도홀기 조선궁중무용』, 열화당, 2000. 『(임진)진찬의궤』, 1892. 『(임인 4월)진연의궤』, 1902. 『(임인 11월)진연의궤』, 1902.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