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당악정재의 하나로, 선모와 사방과 사우로 팔괘를 구성한 여덟 명의 협무가 대무하며 추는 춤
성택은 조선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 때 창제된 당악정재(唐樂呈才)의 하나로 세종의 외교적 입장이 담겨있는 춤이다. 춤은 선모(仙母)가 사방(四方)ㆍ사우(四隅; 동북․동남․서북․서남)에 위치한 여덟 명의 협무(挾舞)와 대무(對舞)함으로써 팔괘(八卦)에 순행을 통해 천자의 덕이 세상의 중심임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 권40 에는 1428년(세종 10) 5월 26일 예조에서 중국 사신을 위로하기 위해 성택을 창제하였으며 이는 황제의 은덕을 흠모하기 때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세종대에 창제된 성택은 성종 2년(1493) 왕명에 따라 제작된 악전(樂典)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권4에 자세하게 전해진다. 『악학궤범』과 『세종실록』의 진행 절차는 거의 같으나 무용수와 악곡의 명칭에서 차이를 보인다. 당초 왕모(王母)였던 주요 무용수의 명칭이 선모로 바뀌었으나, 두 명칭은 모두 서왕모(西王母)를 의미하므로 의미에는 변화가 없다. 악곡의 경우, 「성택사(聖澤詞)」 뒤의 악곡에서 세종대의 〈황하청만(黃河清慢〉)이 〈헌천수만(獻天壽慢)〉으로 바뀌었다. 이 악곡을 제외한 음악과 춤의 진행 절차는 모두 같다. 성택은 『악학궤범』 이후 1784년(정조 8)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편저한 『국조시악(國朝詩樂)』 「향악(鄕樂)」조에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로 설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성택은 『악학궤범』에 근거하여 국립국악원에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재현 안무로 복원되었다. 재현된 성택은 1981년 10월 27일 국립극장 대극장에서 열린 전통무용발표회에서 처음 공연된 후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ㅇ 내용 성택은 황제의 뜻을 전달하는 사신(使臣)을 예찬함으로써 황제의 은덕을 흠모한다는 악장을 내용으로 한다.
ㅇ 구조
성택의 구조는 당악정재의 형식을 따른다. 당악정재는 춤에서 사용하는 무구(舞具) 이외에도 여러 가지 의물(儀物)을 사용하여 매우 웅장하며 화려하다. 도입부에서는 죽간자(竹竿子)가 무용수를 인도(引導)하여 입장하고 진구호(進口號)를 노래하여 춤의 개장(開場; 엶ㆍ시작)을 알린다. 전개부에서는 무용수들이 춤이나 의례(儀禮)를 행한다. 무용수들은 정재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치어(致語)나 사(詞)로 노래하고, 주제에 맞는 춤을 추거나 의식(儀式)을 행하기도 한다. 종결부에서 다시 죽간자가 등장하여 퇴구호(退口號)와 절을 하고 수장(收場; 끝마침)을 알린다. 정재의 진행은 집박 악사의 박을 신호로 이루어진다.
ㅇ 진행절차
성택의 진행 절차는 『세종실록』과 『악학궤범』을 통해 알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창제목적과 춤의 진행 절차가 기록되어 있고, 『악학궤범』에는 시용당악정재도의(時用唐樂呈才圖儀) 무보에 초입배열도(初入配列圖)와 작대도(作隊圖)에 무용수의 배역명(配役名)이 글자 대형으로 기록되어 있어 악무(樂舞)의 진행을 알 수 있다.
〈도입부〉
의물이 두 대 좌우대형(左右隊形)으로 도열하고, 그 대형 안에 죽간자를 비롯한 족자(簇子)와 선모 및 협무가 초입 대열을 구성한다. 정재가 시작되면 전대(前隊)에 한 줄로 늘어선 족자 한 명과 죽간자 두 명이 앞으로 나아간다. 죽간자가 진구호로 춤의 시작을 알리면, 족자는 그 자리에 남고 죽간자 두 명이 물러나 좌우로 나뉘어 선다.
〈전개부〉
선모를 중심으로 두 줄로 좌우대형을 유지한 여덟 명의 협무가 염수족도(斂手足蹈)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물러선다. 선모가 조금 앞으로 나가 치어를 한다. 치어가 끝나면 선모는 악절에 따라 염수족도하며 「성택사(詞)」를 노래한다.
창사 뒤에 선무와 협무 여덟 명이 북쪽을 향해 춤춘다. 선모는 제자리에서 주선(周旋)으로 맴돌며 춤추고, 양대로 늘어선 협무는 원을 도는 회선(回旋)으로 춤춘다. 협무들이 사방과 사우의 팔괘 대형을 구성할 때까지 동쪽의 좌(左)협무는 서쪽을 향해 바깥쪽으로 원을 돌고, 서쪽의 우(右)협무는 동쪽을 향해 안쪽 원으로 돈다.
협무가 사방과 사우의 팔괘에 위치하면, 선모는 북[감(坎)의 협무부터 왼쪽으로 회무(回舞)를 시작하고 북[감(坎)]ㆍ동[진(震)]ㆍ남[이(离)]ㆍ서[태(兌)]에 위치한 협무는 대무(對舞)한다. 그리고 선모가 동북[간(艮)] 방향의 여기부터 왼쪽으로 회무를 시작하면, 사우의 동북[간(艮)]ㆍ동남[손(巽)]ㆍ서북[건(乾)]ㆍ서남[곤(坤)]에 위치한 협무는 대무한다. 선모가 협무들과 순차적으로 춤을 추고 나면 다시 선모와 협무 여덟 명은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고, 처음의 좌우대형으로 돌아간다.
〈종결부〉
도입부의 음악이 다시 연주되고 죽간자는 처음의 대형으로 돌아가 족자를 가운데 두고 양옆에 서서 퇴구호를 한다. 구호를 마치면 음악에 맞추어 전대(前隊)에 늘어선 족자와 죽간자가 물러난다. 선모와 두 대 좌우대형의 협무는 염수족도로 앞ㆍ뒤로 진퇴(進退)하고 춤을 마친다.
ㅇ 춤사위
성택의 대형은 여덟 명의 협무에 의해 변화된다. 선모를 중심에 두고 협무는 두 대 좌우대형으로 시작한다. 이후 회무로 협무가 팔괘의 위치에 서면, 사방의 방향에 자리 잡은 협무부터 사우 협무의 순으로 선모와 각각 대무하며 조화로운 팔괘의 순행을 보여준다. 다시 원래의 대형으로 돌아오며 춤이 마무리하는 회귀의 순환성을 드러낸다. 『악학궤범』에는 족도ㆍ염수족도ㆍ〈광수무(廣袖舞)〉ㆍ〈사수무(四手舞)〉ㆍ주선(周旋)ㆍ회선(回旋)ㆍ회무ㆍ대무의 춤사위 명칭이 기록되어 전한다.
성택을 연행할 때, 총 네 번의 창사가 불린다. 죽간자가 춤을 추기 전에 진구호를 한다. 그 뒤에 선모가 성택의 주제와 관련된 치어를 한 후, 협무가 악절에 따라 염수족도 하면서 「성택사」를 부른다. 그리고 춤을 모두 마치고 나면 죽간자가 퇴구호를 하고 물러난다.
원문 | 해설 | |
[죽간자 진구호] | 上聖之化, 覃被要荒. 상성지화, 담피요황. 遠人之心, 不勝舞蹈. 원인지심, 불승무도. 冀容入隊, 永觀厥成. 기용입대, 영관궐성. | 성상의 덕화 아득히 먼 곳까지 펼쳐지니 먼 지방 사람들까지 절로 춤을 추게 되나이다. 무희들 들라고 하시어서 음악이 끝날 때까지 보옵소서. |
[치어] | 「선모치」 聖澤慰朝廷使臣也, 慰使臣所以欽上德也, 殿下事大以誠, 帝用嘉之, 特遣使臣, 國人懽忻 作是歌焉. 성택위조정사신야, 위사신소이흠상덕야, 전하사대이성, 제용가지, 특견사신, 국인환흔 작시가언. | 「선모치어」 「성택」은 조정의 사신을 위로하는 것입니다. 사신을 위로하는 것은 황제의 덕을 흠모하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정성을 다해 사대(事大)하셨으므로 황제께서 가상하게 여기시고, 특별히 사신을 보내셨습니다. 백성들이 기쁜 나머지 이 노래를 지은 것입니다. |
[창사] | 「창 성택사(聖澤詞)」 於皇聖澤, 洽于萬方. 오황성택, 흡우만방. 際天所覆, 莫不梯航. 제천소부, 막불제항. 惟我海邦, 曰自先王. 유아해방, 왈자선왕. 式虔候度, 寵章是服. 식건후도, 총장시복. 明昭我王, 允也繼述. 명소아왕, 윤야계술. 克敬克誠, 昵承優渥. 극경극성, 일승우악. 翩翩使車, 載馳原隰. 편편사거, 재치원습. 自天子所, 來莅遐域. 자천자소, 내리하역. 王出郊迎, 如覩穆穆. 왕출교영, 여도목목. 王拜稽首, 聖壽萬億. 왕배계수, 성수만억. 維王之誠, 維帝之德. 유왕지성, 유제지덕. 上下交泰, 慶流罔極. 상하교태, 경류망극. | 「창 성택사(聖澤詞)」 아, 황제의 은택 만방에 젖어 하늘 아래 모든 곳에서 산 넘고 물 건너 찾아오는데, 오직 바닷가 우리나라는 선왕 때부터 제후의 법도를 공경히 지키고 총장(寵章)[고관(高官)이 입는 장복(章服)]을 입었으며[황제가 하사한 의복을 입었다는 뜻)] 밝디 밝은 우리 임금, 선왕의 사업, 진정으로 이어받고 공경하는 마음, 정성스런 태도로 황제의 두터운 은혜 받드셨네. 사신이 수레 타고 언덕 진펄 날 듯이 달려 천자 계신 곳에서 머나먼 우리나라에 이르니 임금께서 교외로 나가 맞으시되, 황제를 직접 뵙 듯하고, 절하고 머리 조아리며, 황제 억만 년 사시기를 빌었더라. 우리 임금 정성과 황제의 은덕으로 위 아래의 마음이 통해 경사스러운 일 끝없이 흘러넘치네. |
[죽간자 퇴구호] | 德洽生成, 克盡懷柔之道. 덕흡생성, 극진회유지도. 情深感激, 式陳頌禱之詞. 정심감격, 식진송도지사. 樂節將終, 拜辭小退. 악절장종, 배사소퇴 | 덕이 만물을 길러주는 데 넉넉하여 어루만지고 달래는 도리를 다하시니 마음으로 깊이 감격하여 송축하는 말씀을 올립니다. 음악이 이제 끝나려 하매 절하며 하직인사 올리고 잠시 물러가렵니다. |
원문: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2』 번역: 강명관
ㅇ 복식
『악학궤범』 권9에는 성택의 무동관복(舞童冠服)과 여기복식(女妓服飾)이 도식(圖式)으로 전해진다.
무동은 회례연에서 머리에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발에는 화(靴)를 신는다. 겉에는 가슴과 등에 흉배를 단 의(衣: [포(袍)])를 입는다. 의[포]는 사(紗)나 라(羅)와 같은 비단을 쓰는데, 겉감은 오방(五方)색인 황(黃)ㆍ녹(綠)ㆍ자(紫)ㆍ남(藍)ㆍ도홍(桃紅)으로 하고, 안감으로는 붉은색 비단을 대었다. 포 안에는 흰색 비단으로 만들고 도련의 가장자리를 검정 비단으로 두른 중단을 받쳐 입었다. 단, 무동은 오방색 비단으로 만든 중단을 입었다. 중단의 허리에는 예복용 치마인 상(常)을 갖추어 입는다. 여기는 머리에 수화(首花)ㆍ잠(簪)ㆍ금채(金釵[금차])를 장식하고 복식은 백말군(白襪裙)을 입고, 남적고리(南赤古里)를 입는다. 그 위에 상(裳)[보로(甫老)])을 입고, 홍대를 매고 겉에는 단의를 입는다. 단의 위에는 흑장삼(黑長衫)을 입고 발에는 단혜아(段鞋兒)를 신는다.
○의물
성택의 의물(儀物)은 족자(簇子) 한 개ㆍ죽간자(竹竿子) 두 개ㆍ인인장(引人仗) 두 개ㆍ정절(旌節) 여덟 개ㆍ용선(龍扇) 두 개ㆍ봉선(鳳扇) 두 개ㆍ작선(雀扇) 두 개ㆍ미선(尾扇)두 개ㆍ개(蓋) 세 개가 사용된다.
성택은 예술사적 측면에서 조선 전기 당악정재의 연행 종목을 확장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명나라 사신을 주인공으로 하는 창사와 정재를 외교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예악사상(禮樂思想)에 기반한 정재의 효용성을 짐작할 수 있다. 성택은 명나라 황제의 덕을 칭송하는 태종대의 악장과 궤를 같이하며 양국을 왕래하는 사신의 역할을 중시했던 세종의 외교적 역량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택은 팔괘(八卦)의 구성을 상징으로 춤추는 특징이 있다. 선모가 팔괘의 자리에 선 협무들과 대무함으로써 팔괘의 순행을 보이는데, 이는 황제의 덕치로 세상[팔방의 신민]이 조화로움을 예찬한 상징으로 이해된다.
손선숙, 『한국궁중무용사』, 보고사, 2017. 손선숙, 「조선초기 궁중정재의 대무, 배무검토」, 『무용역사기록학』34, 2014. 송방송. 「조선왕조 건국초기의 정재사 (呈才史) 연구」, 『음악과 현실』23, 2002. 신태영, 「조선 초기 창작 정재(呈才)의 악무와 예악사상」, 『동방한문학』 55, 2013. 조경아, 「조선시대 중국 사신의 춤 향유」, 『무용역사기록학』35, 2014.
김기화(金起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