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악정재의 하나로, 창사 없이 두 명이 일렬대형으로 추는 춤
초무는 숙종(肅宗, 1661~1720, 재위 1674~1720)과 영조(英祖, 1694~1776, 재위 1724~1776) 대의 궁중 연향에서 행례(行禮)의 첫 번째 정재로 설행(設行)된 춤이다. 두 명의 무동(舞童)이 창사(唱詞) 없이 연향의 주빈이 있는 북쪽을 향해 일렬대형(一列隊形)을 유지하며 간결한 무절을 대칭적으로 춤춘다.
초무는 『숙종실록』 44권에 처음 기록에 나타난다. 숙종의 재위 30년을 축하하는 진연은 기상 이변으로 인해 두 차례나 무산되고 3년 만인 1707년(숙종 32) 8월 27일에 비로소 연행되었는데, 인정전(仁政殿)의 외진연(外進宴)에서 초무가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연향에서 아홉 번 술을 올리는 구작행례(九爵行禮) 중 숙종의 아들인 연양군(延陽君, 1581~1660)이 숙종에게 세 번째 잔을 바칠 때 당악곡(唐樂曲)인 〈오운개서조곡(五雲開瑞朝曲)〉이 연주되고 무동이 첫 번째 정재로 초무를 연행하였다.
초무는 숙종의 재위 40년을 경축하는 1714년(숙종 40) 9월 19일 숭정전(崇政殿)의 갑오(甲午) 외진연에서 다시 연행되었는데, 역시 제3작을 올릴 때 무동의 첫 정재로 추어졌다. 이후 1719년(숙종 45) 4월 18일에는 여러 기로신(耆老臣; 나이 70세 이상의 퇴직한 문신)들을 위해 베푼 외진연에서 5작 행례의 제1작에 제조(提調)가 잔(醆)을 올리고 〈천년만세(千年萬歲)〉에 무동이 춤을 추었는데, 춤의 명칭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1707년(숙종 32) 및 1714년(숙종 40) 진연에서 무동이 처음 춘 정재가 초무라는 점에서, 제1작에서 무동이 춘 춤을 초무로 짐작해 볼 수 있다. 같은 해 9월 28일 숙종이 60세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가는 것을 축하하는 진연이 설행되었는데, 『(기해)진연의궤(進宴儀軌)』(1719)의 내전 진연의 기록에도 칠작행례(七爵行禮)의 제3작에서 〈보허자령(步虛子令)〉이 연주될 때 초무가 정재로서는 첫 번째의 종목으로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초무가 첫 번째 정재 종목으로 연행된 기록은 영조 대에서도 발견된다. 1744년(영조 24) 내연과 외진연을 기록한 『(갑자)진연의궤(進宴儀軌)』에서도 구작행례의 제3작에서 정재의 첫 번째 종목으로 연행되었다.
초무는 의궤의 정재도나 홀기(笏記)의 무도 및 술어에서 큰 변화를 보이지 않고 전승되었다. 다만 반주음악의 경우 아명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어, 음악의 변화 여부는 알기 어렵다.
숙종 대에 창제된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연행되었으나 20세기 초반에는 연행이 단절되었다. 이후 『정재무도홀기』를 토대로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의 재현 안무로 1982년 10월 13일 국립극장 대극장 무대에서 복원되었으나, 무동정재가 아닌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여령정재(女伶呈才)로 공연되었다.
○내용 초무는 창사가 없어 춤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실록 및 의궤의 기록으로 볼 때, 초무는 연향에서 무동이 추는 첫 번째 정재로 일관되게 연행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초(初[시작ㆍ첫ㆍ처음])’ㆍ‘무(舞[춤])’로 서무(序舞)로서의 개념에서 연행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개념의 도출은 영조 때까지 이어지고 있다. 춤이 짧고 간결한 점, 창사가 없는 점도 서무로서의 특징을 보여준다.
○구조
초무는 창사가 없고, 춤의 진행은 향악정재의 보편적인 형식을 따르고 있다. 집박악사의 박(拍)에 따라 춤이 변화된다. 장절(章節)의 구분 없는 짧은 구성에도 불구하고 도입부-전개부-종결부가 명확하다. 초무는 간결하지만 순환하여 회귀하는 정재의 보편적 형식을 잘 유지하고 있다.
○진행절차
초무의 무원 구성은 의궤에 수록된 정재도(呈才圖)를 통해 알 수 있다. 정재도는 두 종류로 무원 구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1828년(순조 28) 『(무자)진작의궤(進爵儀軌)』ㆍ1829년(순조 29) 『(기축)진찬의궤(進饌儀軌)』ㆍ1892년(고종 29) 『(임인)진찬의궤(進饌儀軌)』ㆍ1901년(고종 39) 『(신축)진연의궤』ㆍ1902년(고종 40) 『(임인)진연의궤』 4월과 11월 진연에 춤추는 무동 두 명이 그려져 있다. 순조 대의 정재도 두 점에는 원무 두 명과 협무열여덟 명 등 스무 명이 표현되어 있고, 고종 대의 정재도에는 무동 두 명만 그려져 있다.
초무의 진행 절차는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네 편에 전해진다. 1893년 계사『여령각정재무도홀기(女伶各呈才舞圖忽記)』ㆍ1907년 신축『외진연시무동각정재무도홀기(外進宴時舞童各呈才舞圖笏記)』ㆍ연대 미상의 『무도홀기(舞圖笏記)』에서는 초입 대형을 문자형(文字形) 무도(舞圖)로 표현하고, 술어(述語)로 춤의 진행 절차를 기술하고 있다.
초무는 초입 대형인 두 명이 일렬대형(一列隊形)을 구성하고 시작된다. 도입부는 대오(隊伍; 편성된 대열의 줄)에 늘어선 협무들이 함께 연향의 주빈을 향하여 무진(舞進)하고, 전개부에서는 춤의 주요 동작을 대칭적으로 반복한다. 북소리에 따라 왼손은 소매를 들고 오른손은 소매를 내리며 춤을 춘다[무작수고성 좌수거수 우수낙수이무(舞作隨鼓聲 左手擧袖 右手落袖而舞)]. 그리고 오른손은 소매를 들고 왼손은 소매를 내리고 춤춘다.[[우수거수 좌수낙수이무(右手擧袖 左手落袖而舞)]. 종결부에서는 대오가 모두 무퇴(舞退)하고 춤을 마친다. 두 무용수는 일렬대형을 그대로 유지한다.
○춤사위
기록에 전하는 초무의 춤사위는 많지 않다. 춤의 이동을 의미하는 춤사위로 무진(舞進)ㆍ무퇴(舞退)가 있고, 발의 춤사위로는 족도(足蹈), 손의 춤사위에는 염수(斂手)ㆍ거수(擧袖)ㆍ낙수(落袖)가 있다. 거수와 낙수는 서로 대조를 이루는 동작으로 팔을 들고, 내리는 담백한 춤사위이다. 의궤의 초무 정재도에는 두 무원의 팔 춤사위가 대칭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정재무도홀기』에는 서쪽의 무원이 오른팔을 들고 왼팔을 내리면, 동쪽의 무원은 왼팔을 들고 오른팔을 내리는 춤사위를 보여 무원들의 춤이 대칭적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궁중 연향에서 창사는 연향의 의미와 관계없거나 연향의 규모나 시간에 따라 생략되기도한다. 그러나 초무의 경우는 창사의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본래 창사가 없는 것으로 짐작된다.
초무의 반주 음악은 1707년 처음 기록될 당시에는 〈오운개서조곡〉으로 되어 있고, 계사년 『정재무도홀기』ㆍ신축년 외진연 『무동각정재무도홀기』에는 〈풍운경회지악(風雲慶會之樂)〉으로, 『무동각정재무도홀기』는 〈천하태평지곡(天下泰平之曲)〉으로 전한다. 이 곡들은 모두 〈보허자령〉의 아명(雅名)으로 보인다.
순조 『(기축)진찬의궤』에는 초무의 무동 복식도(服飾圖)가 전해진다. 무동은 머리에 부용관(芙蓉冠)을 쓰고, 백질흑선중단의(白質黑縇中單衣)ㆍ남선상(藍縇裳)ㆍ녹색단령(綠色團領)ㆍ화화방보(畫花方補)의 두석록정대(豆錫綠鞓帶)를 띠고 화화흑화(黑靴)를 신는다.
초무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궁중 연향이 재정비되는 숙종 대의 연향 기록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숙종 대에 초무의 연향은 주로 행례에서 정재를 시작할 때 늘 처음에 위치하였다. 이로 미루어 초무는 정재의 시작을 알리는 서무(序舞)로 보인다. 춤의 동작과 진행 절차가 간단하고 춤의 의미를 전달하는 창사가 없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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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화(金起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