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방헌가요(敎坊獻歌謠)
임금이 궁궐 밖에 행차했다가 돌아올 때, 임금을 칭송하는 한문 가요와 여러 정재(呈才)를 연행하며 맞이하는 의식
환궁하는 임금을 영접할 때, 임금을 칭송하는 한문으로 쓰인 가요의 축(軸; 두루마리)을 올리는 절차로, 학무와 연화대 등의 춤들이 연행되기도 하고 춤 없이 진행하기도 하였다. 침향산(沈香山)ㆍ지당(池塘)ㆍ화전벽(花甎碧)ㆍ탁자(卓子)를 설치해 놓고 백 명이 넘는 여기(女技)와 쉰 명이 넘는 악공들이 연출하는 대규모의 연향으로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
교방가요는 대가((大駕; 임금이 타는 수레)의 환궁 영접행사의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나타난다. 결채(結綵; 문이나 다리, 지붕위 등에 색실, 색종이, 헝겊 등을 걸어 장식하는 것) 백희(百戱) 등 대규모의 공연이 행해졌으나 고려후기에 이르면 교방의 가요로 축소되기도 하였다. 조선에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졌다. 『태종실록』권24에 의하면 태종이 종묘에서 부묘(祔廟; 왕 또는 그 가족의 신주를 종묘에 안치하는 것)하고 경복궁으로 환궁할 때 교방 여기가 혜정교(惠政橋) 주변에서 가요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424년(세종 6) 6월 14일 예조에서 태종의 부묘의주를 올렸는데, 임금이 태종의 신주를 종묘에 부묘하고 환궁하는 길목에 나례(儺禮)와 잡희(雜戱)를 벌이고 성균관과 교방에서 가요를 올리도록 하였다. 이후 1465년(단종 2)에 세종을 부묘하는 의식에서부터 ‘교방가요’라는 용어가 고유 명사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교방가요는 침향산ㆍ지당ㆍ화전벽 등 큰 구조물이 수반되고 많은 수의 여기와 악공들이 참여하였으며, 춤 공연이 없이 가요축만 바치기도 하였다. 이렇게 부묘의와 교방가요는 국가전례 중 흉례 의식으로 자리 잡았으나, 인조(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대 왕명을 내려 부묘 후 환궁할 때 가요를 올리는 행사를 중단시키면서 차츰 교방가요를 올리지 않게 되었고, 1744년(영조 20) 영구 혁파되었다.
부묘의는 『국조오례의』와 『국조오례의서례』에, 부묘의에 부속된 교방가요는 『악학궤범(樂學軌範)』(1493) 「시용향악정재도설」에 기록되어 있다.
교방가요는 하나의 독립된 정재가 아니고 임금이 출궁(出宮)하였다가 환궁할 때 대가의 연도(輦道; 왕이 행차하는 길)에 침향산(沈香山)ㆍ지당(池塘)ㆍ화전벽(花甎碧)ㆍ탁자(卓子)를 설치해 놓고 대가가 이르면 전부고취(前部鼓吹) 악공 쉰 명이 백 명의 기녀들 뒤에 나누어 선다. 〈여민락령(與民樂令)〉을 연주하면 기녀가 노래를 하고 가요축을 임금께 올리는 의식이 행해졌으며, 각종 정재도 선보였다.
○구성
『악학궤범』에 소개된 초입 배열도를 통해 조선시대에 행해진 교방가요의 절차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참여하는 여기의 수는 가요함을 받드는 연소기(年少技) 두 명, 도기(都妓; 여기 중의 우두머리), 박, 백학, 청학을 제외한 백 명의 인원으로 구성된다. 침향산을 중심으로 동과 서로 각 쉰 명씩 나눠 서는데, 전부고취의 악공 쉰 명도 스물다섯 명씩 나누어 선다. 가요축을 올리는 절차는 ① 우두머리 기생인 도기(都技) 한 명이 여기 두 명이 받든 함에서 가요축을 받들고 나아가 앉으면 기녀 전체가 앉는다. ② 승지(承旨)가 전해 받아 내시(內侍)에게 전하면 내시는 함에 담아 임금에게 바친다. ③ 도기가 엎드렸다 일어나 춤추고 사수무(四手舞)로 물러나 제자리에 돌아가면 ④ 제기 전체가 엎드렸다 일어나 족도하면 음악이 그치며 마친다. 이후 〈학무〉와 〈연화대〉의 정재를 연행한다. 침향산 열 걸음 뒤에 화전벽 한 건을 깔고, 〈연화대〉 정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전부고취악대와 후부고취악대가 환궁악을 연주하고 침향산을 화전벽 뒤로 끌어간다. 여러 기녀들은 뒷걸음질 하면서 〈금척무〉를 추고 앞에서와 같이 갈라선다. 대가가 전진하다가 머무르면 또 정재를 한다. 여러 정재를 출 때마다 앞의 의례를 반복하고 제자리로 물러가는 절차도 위와 같이 하며 행진악대는 〈별곡〉을 번갈아 연주한다. 대가가 궁 안으로 들어서면 모든 연향의 절차를 마친다.
○구조
교방가요는 ① 침향산․ 지당을 중심으로 기녀들과 악공들이 좌우로 나누어 임금을 맞이하는 준비단계 ② 대가가 탁자에 이르면 가요축을 올리는 의식을 행하는 본단계 ③ 〈학무〉ㆍ〈연화대〉ㆍ〈금척무〉 등의 환영하는 춤을 추는 연행단계의 구조를 갖추고 있다. 환영하는 춤 중 특히 학무는 ‘정화의 의미를 지닌 상징적인 춤으로, 환궁하는 길에 세속의 잡된 기운을 정화시킬 수 있는 〈학무〉만은 연행해야 한다는 내용이 『성종실록』 16년, 4월25일에 기록되어 있다.
『악학궤범』에 따르면, 악공이 〈여민락령〉을 연주하고 제기는 노래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의 노래는 「용비어천가」 1 ~ 4장ㆍ125장에 해당되는 〈여민락〉으로 가사의 내용 일부는 다음과 같다.
원문 | 해설 |
해동육룡비 막비천소부 고성동부(海東六龍飛 莫非天所扶 古聖同符) | 해동에 여섯 용이 나시고 하늘이 돕지 않음이 없으니, 옛 성인이 똑같으시도다. |
근심지목 풍역불올 유작기화 유분기실(根深之木 風亦不扤 有灼其華 有蕡其實) |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기에, 그 꽃이 아름답고 그 열매 성하도다. |
박창희 역주, 『용비어천가(한글 번역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대가가 행진하면 행악을 연주하고, 대가가 정지하면 별곡을 연주하여 행악과 별곡을 번갈아 반복한다. 이때 행악은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의 〈생가요량(笙歌寥亮)〉으로 『고려사』환궁악의 미후사(尾後詞)에 해당하고, 장단의 형태가 고취악에 가깝다는 기존 연구가 있다. 별곡은 〈여민락〉등의 행악을 말한다.
또한 『악학궤범』에 따르면, 〈학무〉의 반주음악은 〈보허자령〉, 〈연화대무〉의 반주음악은〈중선회 인자〉와 〈헌천수만〉, 〈금척무〉 반주음악은 〈오운개서조〉 등이 쓰였다.
교방가요는 가요축 외에 가요함 탁자의 무구와 침향산․ 지당․ 화전벽을 설치하고 연행하였다. 침향산은 산 모양을 만들어 사탑․ 승불․ 고라니와 사슴을 골짜기에 깃들이고, 앞부분에는 지당에 난간을 두른 후 그 안에 연화통을 설치하고 좌우 양쪽에 비단으로 만든 모란을 꽂은 꽃병을 설치한 구조물이다. 상당한 물력이 소비되는 침향산은 사치와 향락의 대명사로 인식되어 인조는 즉위년에 태워 없애는 상징적인 조치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교방가요는 길 위에서 연출되는 공연예술로서 침향산이라는 화려한 구조물과 함께 백 명이 넘는 무용수, 쉰 명이 넘는 악공들이 참여하는 대규모 행사였다. 임금의 무사 귀환을 영접하는 절차를 통해 임금의 권위와 왕조의 존속을 의미하는 상징성을 보여준다.
김은영, 「고려․ 조선전기 거가환궁 영접행사 연구」, 『공연문화연구』21, 2010.8. 이혜주 역주, 『신역 악학궤범』, 2000. 박창희 역주, 『용비어천가(한글 번역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 송지원, 「조선시대 궁중학무의 연행 양상 연구」, 『공연문화연구』 제15집, 2007.
김경숙(金敬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