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앵무(春鶯舞), 춘앵전무(春鶯囀舞)
조선 순조 때 창작된 향악정재의 하나로, 돗자리 위에서 혼자 추는 춤
춘앵전은 조선 순조 때 창작된 궁중 정재의 하나로, 돗자리 위에서 혼자 추는 독무이다. ‘봄날 꾀꼬리가 지저귄다’는 의미를 가진 춘앵전이라는 곡명은 중국에 연원을 두고 있으며 춤의 형식과 내용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의 대리청정기에 만들어졌으며 효명세자가 직접 지은 창사를 부른다. 1828년 초연 이후 조선 후기 여기(女妓)와 무동(舞童)에 의해 연행되었고,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가 출연한 왕가 관련 행사에서도 추어졌다. 무용수의 높은 기량과 섬세한 표현이 요구되는 독무로서, 오늘날 가장 많이 무대에 오르는 궁중정재의 하나이다.
춘앵전은 1828년(순조 28) 6월 1일, 효명세자가 창덕궁 연경당에서 행한 진작에서 처음 추어진 궁중정재이다. 1828년은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시작한 이듬해이자, 효명세자의 어머니인 순원왕후(純元王后, 1789~1857)가 40세가 되는 해였다. 어머니 순원왕후의 보령 40세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이 연향에서 효명세자가 새롭게 창작한 19종의 정재가 선보였는데, 춘앵전도 그 중 하나이다.
‘봄날 꾀꼬리가 지저귄다’라는 의미를 가진 ‘춘앵전’은 중국에 연원을 둔 명칭이다. 1828년 연경당 진작을 기록한 『순조무자진작의궤』에 따르면, 『연감유함(淵鑑類函)』에 “당(唐) 고종(高宗, 628~693)이 꾀꼬리 소리를 듣고 악공 백명달에게 명하여 음악으로 묘사하게 하였다”고 한다. 효명세자가 창작한 춘앵전은 이름만 빌어오고 형식과 내용은 새롭게 만들어진 춤이다. 춤의 도입부에서 부르는 창사는 효명세자가 직접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춘앵전은 헌종, 고종대까지 궁중 연향에서 꾸준하게 추어졌다. 조선 왕실 연향에서 추어진 춘앵전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1902년의『(임인)진연의궤』에 남아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에 조선 왕실의 악무는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를 통해 명맥을 유지했다. 이왕직아악부가 유지되는 동안 열린 왕가 관련 행사는 1913년 고종 62세 탄신 축하연, 1923년 순종 탄신 오순 축하연, 1930년 영친왕 환국 환영연이 있었다. 이 세 번의 행사에서 모두 춘앵전이 추어졌는데, 춤 동작과 구성에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왕직아악부 외에도 민간의 기생조합, 권번 소속의 기생들도 춘앵전을 공연하였다.
1950년대 이후 춘앵전의 명맥은 이왕직아악부 아악생양성소 출신의 김보남(金寶男, 1912~1964), 김천흥(金千興, 1909~2007)이 각각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1955년 개교, 현 국립국악중학교의 전신)와 KBS국악연구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김보남은 국악사양성소에서 무용을 가르쳤으며, 김천흥은 여자들로 이루어진 KBS국악연구원생들에게 정재를 가르쳤고, 후에 KBS국악연구원생들 대다수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으로 흡수되었다. 당시 김보남, 김천흥으로부터 춤을 배운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흥구(李興九, 1940~ ), 황옥선 등이 있다.
춘앵전은 한 평 남짓한 돗자리 위에서 혼자 추는 춤이다. 춤의 구성은 〈상령산〉으로 느리게 시작하여 천천히 돗자리의 가운데로 진입하여 창사를 노래하고, 좌우로 한삼을 뿌리며 이동하고 제자리에서 돌고 앞뒤로 깊은 굴신을 하는 등 춤사위를 펼친다. 도드리장단으로 넘어가면서 점차 빨라지고, 발을 바꾸는 동작을 반복하며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는 화전태(花前態)에서 최고조에 달했다가 〈타령〉으로 넘어가 풀어지며 뒤로 물러나 마무리한다.
여러 명이 등장하여 대형을 바꾸어 가며 추는 다른 정재와 달리 혼자 추는 춤이기 때문에 보다 우아하고 섬세한 동작이 요구된다. 또한 중용(中庸) 또는 중화(中和)를 중시한 유학의 영향 아래 만들어진 춤이기 때문에 전후좌우로 움직이는 동선과 양팔의 춤사위가 매우 대칭적이며 감정을 절제하고 춤춘다.
주요 춤사위는 양팔을 벌리고 좌우로 한 번씩 도는 회란(廻鸞), 가슴 위에서 한 팔씩 팔을 높였다 낮췄다 하는 저앙수(低昻袖, 또는 이수고저(以袖高低)), 앞으로 세 걸음 걸어 나가며 양 팔을 점차 옆으로 들어 올리는 탑탑고(塔塔高), 오른발을 딛고 왼발을 살짝 들어 올리고 또 발을 바꾸어 반복하며 얼굴에 살짝 미소를 머금는(이를 미롱(娓弄)이라 한다) 화전태(花前態), 좌우로 한 번씩 한삼을 뿌리고 제자리에서 도는 낙화유수(落花流水), 좌우로 크게 도는 과교선(過橋仙) 등의 동작이 있다.
춘앵전의 창사는 효명세자가 지은 오언절구(五言絶句) 한시로 되어 있다. 빙정월하보(娉婷月下步) 고울사! 달빛 아래 걸으니, 나수무풍경(羅袖舞風輕) 비단 옷소매에 바람이 일렁이네 최애화전태(最愛花前態) 꽃 앞의 자태가 참으로 사랑스러우니 청춘자임정(靑春自任情) 청춘에 정을 맡기려네 - 원문: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1』 조선 시대 정재의 창사 대부분이 국왕의 공덕을 칭송하거나 장수를 비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데 비해, 춘앵전의 창사는 아름다운 사람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3행의 ‘화전태’는 춘앵전의 절정 부분에서 추는 춤사위를 말한다.
춘앵전의 여자 복식은 붉은 치마에 초록 저고리를 입고 그 위에 황초단삼(黃綃單衫)을 입고 양쪽 어깨에 초록하피(草綠霞帔)를 세로로 걸고 홍단금루수대(紅緞金縷繡帶, 금색 장식을 한 붉은 비단 띠)를 가슴 위에서 가로로 두른다. 머리에는 화관을 쓰고 양손에 오색 한삼을 낀다. 남자는 바지저고리 위에 백질흑선착수의(白質黑縇窄袖衣, 흰색 바탕에 검은 선을 가장자리에 두른 두루마기)를 입고, 옥색질흑선상(玉色質黑縇裳, 옥색 바탕에 검은 선을 가장자리에 두른 치마)을 두른다. 그 위에 흰 패랭이꽃 문양을 한 녹색 쾌자를 입고 오사대(烏紗帶, 검은 색 각대)를 두른다. 머리에는 아견모(砑絹帽)를 쓰고 양손에 붉은 색 한삼을 낀다. 별도의 무구는 사용하지 않는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정재 종목은 50여 종이다. 대다수의 정재들이 여러 명의 무용수들이 대형을 이루며 춤을 추거나, 놀이 형태를 띠거나 또는 많은 무구를 대동하는데 비해, 춘앵전은 별다른 무구 없이 돗자리 위에서 한 사람이 춤추는 형식을 가지고 있다. 봄 꾀꼬리가 지저귄다는 춤의 제목처럼 화사하고 화려한 복식을 갖춘 무용수의 우아한 움직임은 생동하는 봄 기운을 연상시킨다. 또한, 조선시대 정재의 구성과 춤사위를 기록해 놓은『정재무도홀기』에 수록된 춘앵전에는 물리적인 움직임을 설명하는 동작용어 외에 다른 춤에는 없는 문학적인 표현들이 추가되어 있다.
국립국악원, 『궁중무용무보 제2집』, 국립국악원, 1987. 김천흥, 『정재무도홀기 창사보』, 민속원, 2002. 이의강 책임번역, 『국역 순조무자진작의궤』, 보고사, 2006. 이흥구ㆍ손경순, 『한국궁중무용총서 10』, 보고사, 2010.
권혜경(權惠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