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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외 지역에서 풍류객들이 연주하는 《현악영산회상》
조선 후기에 중인지식층이 새로운 예술 수용층으로 부상하였고, 이들이 즐긴 예술 중 대표적인 기악합주곡이 《현악영산회상》 한바탕이다. 이를 서울에서 전승한 것이 《경제줄풍류》, 그 밖의 지역에서 전승한 것이 향제줄풍류이다.
○ 역사 변천 과정
‘풍류’라는 개념은 조선 후기 풍류방의 활동 중 음악적인 면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다. 조선 후기, 시문(詩文)의 교양을 갖춘 중인지식층이 새로운 예술 수용층으로 부상함에 따라, 그들과 예술적 취향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예술을 즐겼는데, 이들이 즐긴 예술에는 기악ㆍ성악ㆍ시문이 포함되었다. 기악에는 《영산회상》과 가곡 반주뿐 아니라 〈여민락〉과 〈보허자〉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러한 예술 활동에 참여한 사람들은 중인지식층만이 아니라 예술을 애호하는 사대부나 예술적 소양을 지닌 중인부유층들도 있었는데, 이들이 모여 시를 짓고,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며 즐기던 예술 행위가 모두 ‘풍류’였다. 악기 연주는 여러 사람이 합주를 하지만 노래는 혼자서 하기 때문에 악기 연주보다 훨씬 전문성을 갖추어야 하며, 가곡 반주는 이렇게 전문적인 가객이 있어야만 가능했다. 이런 이유로 풍류객들이 쉽게 즐길 수 있는 곡이 기악 합주 《영산회상》으로 한정되면서 ‘풍류’의 의미가 《영산회상》으로 축소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오늘날 ‘풍류’라고 하면 조선 후기에 풍류방에서 이루어진 모든 예술 활동을 포함하는 의미로도 사용된다.
줄풍류는 풍류를 연주할 때 구성되는 악기편성과 관련된 용어이다. 줄로 된 악기, 즉 현악기가 주로 편성된다는 의미인데, 조선 후기 문집 등의 기록에서는 사용된 적이 없는 용어이다. 전통사회에서 관아나 양반들의 잔치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거나 굿판에서 반주를 하던 전문음악인들의 음악을 ‘삼현육각’이라 하였고, 이들이 연주하는 선율악기가 대금ㆍ피리ㆍ해금 즉,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삼현육각 연주자들을 ‘대재비’라 불렀다. 풍류객들이 관악기, 특히 피리와 해금은 연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풍류판이 벌어지면 대재비를 불러 함께 연주하기도 하였다. 대재비들이 풍류방에서 함께 연주하던 《영산회상》 을 풍류방 밖에서 자기네끼리 연주하며 ‘대풍류’라고 불렀다. 대나무로 만든 관악기로 연주하는 풍류라는 뜻이다. ‘줄풍류’라는 말은 거문고ㆍ가야금ㆍ양금 등 현악기가 편성되고 특히 거문고를 중시하여 관악기를 의미하는 ‘대’ 대신 현악기를 의미하는 ‘줄’을 붙여 만들어진 이름이다.
향제줄풍류라는 용어는 1985년 즈음 이보형에 의하여 작성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에서 처음 등장한다. 당시 지방에서 연주되고 있는 풍류는 국립국악원 풍류와 다른데, 전국 각지에서 연주되고 있던 풍류가 다 사라져 이리ㆍ정읍ㆍ구례 등에만 남아 있으므로 문화재로 지정해 보호하지 않으면 이마저 없어질 위기에 처해 있었다. 풍류로 불리는 《영산회상》 한 바탕이 국립국악원에서 연주되고 있던 터에 왜 굳이 《영산회상》을 따로 문화재로 지정해야 하는가 하는 반론이 원로 음악인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이 반론에 대한 답변 차원에서 지방에서 연주되고 있는 풍류의 다른 점을 나타내기 위해 시조에 사용되었던 경제, 향제라는 기존의 용어를 차용하였다. 결국 지방에서 연주되는 줄풍류의 문화재 지정 당위성을 드러내기 위해 향제줄풍류라는 명칭이 탄생한 것이다.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작성을 위해 정읍ㆍ이리ㆍ구례 등 각 지방을 방문 조사하였는데, 그 당시 악기별로 연주자가 갖추어진 풍류조직이 이리(현 익산)에만 있었다. 따라서 이리 풍류가 국가무형문화재 제83호 향제줄풍류로 지정되었고(1985년 9월 1일), 이리의 강낙승(姜洛昇, 1916~2010)과 구례의 김무규(金茂圭, 1908~1994) 두 명이 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그 후 구례에 자주 머물던 전용선(全用先, 1888~1965)을 비롯하여 가끔씩 구례에 모여 연주하던 정읍의 이기열(李基烈, 1919~2000), 진주의 조계순(曺桂順, 1914~1996), 이순조(李順祚, 1933~2001), 김정애(金貞愛, 1938~2008)와 같은 명망 높은 풍류인들이 구례의 김무규, 이철호(李鐵湖, 1938년생)와 더불어 정기적으로 만나 연주하게 되자 1987년에 구례와 이리의 풍류가 각각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3-가호 구례향제줄풍류,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3-나호 이리향제줄풍류로 지정되었다. 2013년에는 외국어 표기에 용이하도록 그 명칭이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83-1호, 제83-2호로 정정되어 현재에 이른다.
○ 연주 공간 풍류 활동에 참여하는 이들을 풍류객이라 하였는데 이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기 위해서는 합당한 공간이 필요했다. 대개 신분상 양반이면서 경제적으로도 부유한 풍류객의 사랑방이나 별채, 또는 정자(亭子) 등이 이러한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이를 ‘풍류방’이라 하였다. 즉 ‘풍류방’은 어느 정도의 지적 교양을 갖추고 풍류를 애호하는 양반과 중인지식층의 사람들이 모여 풍류를 즐기고 교류하는 공간이었다. ○ 악기 편성 향제줄풍류 연주에는 전통적으로 거문고ㆍ가야금ㆍ양금ㆍ해금ㆍ대금ㆍ세피리ㆍ단소ㆍ장구의 여덟 악기가 편성되었다. 이들 악기 중 거문고ㆍ가야금ㆍ양금ㆍ대금은 조선 후기 문집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악기이고, 해금ㆍ피리는 대잽이들이 풍류에 참여하면서 합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여덟 악기 중 풍류방에 가장 늦게 등장한 단소의 경우, 그 나타난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조선 후기 문집에 남아있는 풍류 기록에는 대부분 퉁소가 편성되어 있고 단소는 보이지 않는다. 물론 현재도 퉁소가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풍류에는 편성되지 않는다. 현재 남아 있는 사진자료를 보면 1900년의 풍류연주 사진에 퉁소가 편성되어 있었는데 1920년대 사진에는 퉁소 대신 단소가 편성되었다. (『1900년 파리, 그곳에 국악』 107, 112쪽 참조) 풍류방에서 퉁소가 아주 사라진 것은 그리 오래전 일은 아닌 듯하다.
○ 악곡 구성 및 음악적 특징 구례와 이리의 두 향제줄풍류는 구성이나 연주 방식이 같고 국립국악원 풍류와는 다르다. 국립국악원 풍류가 열두 곡으로 구성된 반면 향제줄풍류는 한바탕이 열다섯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악원 풍류 한바탕에 포함되지 않는 세 곡은, 첫 곡인 〈다스름〉, 〈상현환입〉과 〈하현환입〉 사이의 〈세환입〉, 그리고 마지막 곡 〈풍류굿거리〉이다. 국립국악원 풍류와 공통되는 악곡의 경우 음악적으로 양자 간에 큰 차이는 없으며, 다만 향제줄풍류의 한바탕은 몇 곡을 묶어서 연주한다는 점, 그리고 이름을 붙이는 방식에서 서로 차이가 있다. 향제줄풍류에서는 열다섯 곡을 크게 셋으로 나누어 연주하는데 〈본풍류〉ㆍ〈잔풍류〉ㆍ〈뒷풍류〉라고 한다. 〈본풍류〉는 첫 곡인 〈다스름〉부터 〈본영산〉ㆍ〈중영산〉 세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것이다. 〈본풍류〉를 연주한 후 잠시 쉬고 〈세령산〉부터 〈가락더리〉ㆍ〈상현환입〉ㆍ〈세환입〉ㆍ〈하현환입〉ㆍ〈염불〉ㆍ〈타령〉ㆍ〈군악〉 여덟 곡을 이어서 연주하는 것을 〈잔풍류〉라 한다. 〈잔풍류〉를 연주한 후 또 잠시 쉬고 이어지는 〈뒷풍류〉에서는 〈계면가락환입〉ㆍ〈양청환입〉ㆍ〈우조가락환입〉ㆍ〈풍류굿거리〉 네 곡을 이어서 연주한다. 구례와 이리풍류는 음악적으로 곡의 구성이나 장단 등에서 대동소이하다. 간혹 나타나는 미세한 선율의 차이는 악보 없이 자유롭게 어우러지던 전통적인 풍류의 특성에 의한 것으로, 그다지 언급할 만한 것이 못된다. 또한 장 구분이 조금씩 다른 곳이 있으나 이 또한 이어서 연주하는 음악 속에서 큰 의미 차이를 갖지 않는다. 눈에 띄게 다른점은 여러 악기가 연주를 시작하기 전에 조율을 위해 주어지는 음인 청(淸)의 차이이다. 이리풍류는 대부분의 풍류방 전통대로 임종청을 사용하는 반면, 구례풍류에서는 중려청을 사용한다. 현재 남아있는 모든 향제줄풍류와 국립국악원 풍류의 중요한 차이는 한 장단이 스무 박인 〈상령산〉과 〈중령산〉의 장단을 분할하는 방식이다. 모든 향제줄풍류는 6ㆍ4ㆍ6ㆍ4박으로 나눠지는 구조인데 비해, 국립국악원 풍류에서는 6ㆍ4ㆍ4ㆍ6박으로 분할된다.
풍류가 갖는 중요한 가치는 전통의 고수보다는 다양한 문화의 자유로운 수용 정신이다. 조선 후기 양금은 중국에서 유입된 새로운 악기였다. 생황도 원래 우리 전통악기가 아니지만 풍류방에서 함께 연주되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의하면 양금 연주법도 홍대용이 처음 우리 가락으로 곡을 풀어낸 이후 풍류방에 널리 펴져 9년 후에는 양금을 다루지 못하는 금사(琴師)가 없었다고 할 정도로 새로운 외래 악기의 수용에 전혀 거부감이 없었다. 이와 같이 풍류는 원래 자유롭게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며 즐기던 문화였다. 조선 후기 음악사의 큰 특징의 하나로 꼽는 변주곡의 발달은 바로 이 풍류방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의 악곡으로 시작된 《영산회상》 이 여러 변주곡을 더하여 오늘날과 같은 열다섯 곡의 한바탕 음악으로 완성되고, 하나의 곡에서 시작된 가곡이 스물네 곡의 한바탕으로 완성된 것은 바로 풍류방에서 풍류객들에 의하여 이루어진 결과이다. 이러한 풍류객들의 특성상 그들의 연주는 악보에 매이지 않았다. 장단이라는 주어진 틀 안에서 자유롭게 어우러졌던 것이다. 풍류에 관해 지영희 선생이 남긴 글을 보면 “줄풍류는 전국사람이 처음으로 만나서 악보 없이 연주를 하여도 통쾌하게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자유로운 변화와 수용으로 한 곡에서 시작한 《영산회상》이 열다섯 곡으로 되어 오랜 세월 살아 움직이며 지금에 이른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풍류의 또 하나의 가치는 옛 풍류인들이 지녔던 나눔의 정신에서 찾아야 한다. 너나없이 어려운 시기를 거치면서 풍류방 주인의 가족은 시도 때도 없이 모여드는 풍류객들의 수발을 위해 많은 희생을 기꺼이 감내했다. 끼니때에 식사 대접할 형편이 안 되면 감자라도 삶아서 함께 나누고, 언제라도 찾아올지 모르는 풍류객들을 위해 풍류방 주인의 사후에도 한 삼 년 사랑방에 불을 지펴두었었다는 풍류방 주인 후손들의 이야기는 코끝을 시큰하게 한다. 풍류인과 그 가족들의 그런 마음 덕분에 명맥을 이어온 특별한 전통문화가 풍류이다.
구례향제줄풍류: 국가무형문화재(1987) 이리향제줄풍류: 국가무형문화재(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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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상숙(南相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