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전통연희를 중심으로 흥행하던 근대극장.
개화기부터 일제강점기 전통연희를 중심으로 공연한 근대극장으로, 동대문 전차 차고 안의 ‘활동사진소’를 시작으로 하여 전통연희의 맥을 잇고 시대변화에 따른 근대적 공연의 활성화에 기여했다.
극장명의 유래는 고종황제의 연호인 광무(光武, 1897.8.16.~1906.8.1.)에서 비롯되었다. 1898년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H. R. Bostwick)이 동대문에 있던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 전차 차고 안 창고 건물에 설치한 가설무대가 광무대의 시작인데, 정식 극장명을 광무대라 칭하고 첫 개장 공연을 1907년 5월28일 저녁 8시(1907. 5. 30. 〈만세보〉)에 올렸다. ‘동대문 내 전기창에 부속한 활동사진소’에서 일반인 대상 활동사진을 상영하다가, 극장명을 확정하면서 영역을 넓혀 창가ㆍ탄금ㆍ무용 등 전통 공연을 올린 후, 이듬해인 1908년 9월 흥행업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근대극장으로서 본격적인 전통연희 전용 극장으로 운영되었다.
○ 역사 변천 과정 한성전기회사는 1898년 1월 김두승(金斗昇)과 이근배(李根培)가 청원하여 세워졌는데, 근대화 추진을 위해 산업 진흥 정책의 하나로 고종을 비롯한 황실에서 추진하여 설립하게 되었던 회사다. 그러나 자본ㆍ기술이 부족해 미국의 도움을 받았는데, 회사소유권의 일부가 콜브란ㆍ보스트윅에게 넘어갔다. 1904년 7월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명칭 변경이 이루어졌고, 1909년 일본의 국책회사인 일한와사회사(日韓瓦斯會社)에 매도하게 되었다. 전차 승객의 증가를 위해 동대문 기계창에서 시작된 동대문 활동사진소는 처음에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한미전기회사는 활동사진과 더불어 연희패의 공연까지 기획했는데, 본격적인 흥행몰이를 하면서 “동대문 내 전기창에 부속한 활동사진소 내의 연극장”을 “광무대라 명칭”(1907. 5. 30. 〈만세보〉)하게 되었다. 1908년 박승필이 광무대를 인수한 후, 일본와사(瓦肆) 전기회사의 소유로 넘어가면서 회사가 사업 확장을 위해 광무대 건물을 차고로 사용하겠다고 하여 1913년 5월에 폐관되었다. 이후 1913년 6월 황금정 4정목(현 을지로 4가)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연기관(演技館)을 임대하여 다시 광무대라 칭하고 공연을 재개했다. 사라져가는 전통연희 중심의 공연을 펼쳤지만, 시대변화와 경영에 한계를 느껴 신극단체인 극단 토월회(土月會: 1923~1931)에 광무대 직영권(1925.4~1926.3)을 넘겼으나, 1926년 다시 재운영하게 되었다. 이후 1927년 4월 박승배에게 경영권을 넘기고 박승필은 영화상설관인 단성사만을 운영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28년 8월 황금정의 광무대와 종로의 권상장(일본인 항곡(港谷久市)이 1922년 종로 4정목에 세운 서양식 2층 복합 상업 건물로 1층은 상업 공간, 2층은 전시ㆍ공연 공간)의 광무대로 분화된 활동을 하다가, 1928년 10월 조병환이 황금정의 광무대를 인수하게 되었다. 1929년 11월 박승배의 취인정지 후 1930년 5월 2일 황금정의 광무대가 화재로 소실되며 전통연희의 중심극장이었던 광무대의 막을 내리게 되었다. ○ 설립 목적 및 설립 주체 한성전기회사가 연희사업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전차 운영을 위해 이용객 수를 늘리고자 했던 상업적 목적에 있었다. 이전의 활동사진은 상영의 시간제한이 있었으므로, 다양한 연희를 통해 흥행을 유도하여 이용객을 늘리고자 했던 것이다. 광무대 첫 개장공연의 호응에 힘입어 1908년 9월 박승필이 경영권을 인수하면서 판소리, 창극, 전통무용, 재담 등 전통연희 전용 극장을 표방하며 흥행을 지속했다. 다른 극장이 영화와 신파극 중심의 영리 목적을 추구할 때도, 전통 예능을 보존하려는 초심을 잃지 않고 다양한 전통 공연과 개량된 연희를 올렸다. 개관기념일 공연을 통한 홍보 전략과 신문 기사의 상시적 공연 광고 등 박승필의 전문 경영을 통해 광무대는 황금유원 내 연기관 이전 후에도 전성기를 이루었다. 시대의 변화를 읽었던 박승필은 1912년 영화 상영 중심의 단성사를 인수하면서, 전통연희 중심의 광무대 운영을 본격화하고, 공연 수요계층의 다변화로 전통연희 외의 신파극, 또는 신극 단체들에게도 무대를 개방했다. 경영난에 의해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1년간 임대 후 재운영하면서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올렸으나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또한 황금유원 내 광무대와 당대 복합쇼핑몰 형태의 권상장 내 광무대를 분화 운영하면서 경영의 다각화를 시도했으나, 조병환 그리고 박승배에게 인수되면서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1907년 5월 광무대의 발기인은 당시 한미전기회사의 임원이었던 이상필(李相弼), 곽한승(郭漢承), 곽한영(郭漢英)이었다. 1908년 5월 전 경무사 장우근(일제의 관제개혁으로 감원된 전 고위 경찰 관료의 경영 관리)이 사장을 역임하면서 조선인 경영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1908년 9월 박승필에 의한 전문극장경영이 시작되었다. 1909년 8월 일한와사 전기회사가 인수하면서 극장주도 변경되었다. 일한와사 전기회사의 확장 사업으로 광무대가 이전하여 황금유원 내 연기관을 임대하면서, 다시 극장주는 황금유원의 다무라 기지로(田村義次郞)로 바뀌었다. 상업자본가 또는 극장주는 바뀌었으나 박승필에 의한 극장 운영은 지속되었으며, 전문 경영 및 흥행업자로서 면모를 보여주었다. 박승필일행(朴承弼一行)을 조직하여 전속 기생을 고용하고, 명창 송만갑(宋萬甲)ㆍ박기홍(朴基洪)ㆍ이동백(李東伯)ㆍ김창환(金昌煥) 등 당대의 명창 중심의 전속공연, 임성구(林聖九)의 혁신단(革新團), 김소랑(金小浪)의 취성좌(聚星座) 등 신파극, 또는 신극 단체 수용 등을 통해 전속 또는 협업 단체 형태의 장기 공연이 가능한 체계를 구성했다.
○ 극장의 활동 양상
영화 상영을 주목적으로 운영되던 동대문 활동사진소가 광무대라는 극장명으로 확정되면서, 새로운 전통 연희 무대를 선보이기 위한 첫 개량 대상으로 판소리 《춘향가》를 올렸다. 《춘향가》 중 한 대목을 창극화했는데, 이를 위해 당대 명창인 김창환과 송만갑을 초빙해 가창이 가능한 어린 여아 연화와 계화를 지도하도록 하여 전속 고용했다. ‘미려한 용모’와 ‘청아한 가후’ 즉 맑고 고운 성음을 가진 창가를 할 줄 아는 기녀의 공연은 성공적으로 이뤄졌고, 전속 기생의 고용은 비슷한 시기 설립된 연흥사, 단성사, 장안사 등 사설극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초기의 공연은 대부분 구체적 내용을 게재하지 않아 기록된 것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관기남무(官妓男舞)〉ㆍ〈가인전목단(佳人剪牧丹)〉ㆍ〈검무〉ㆍ〈승무〉ㆍ〈한량무〉ㆍ〈성진무(性眞舞)〉ㆍ〈무고(舞鼓)〉 등 전통춤과 〈전기광무(電氣光舞)〉ㆍ〈지구무(地球舞)〉와 같은 창작 춤이 관기에 의해 행해졌고, 《주악(奏樂)》ㆍ《연희(演戱)》ㆍ《연극각종(演劇各種)》ㆍ《잡극(雜劇)》 등의 공연 명칭으로 전통연희 공연이 이루어 졌다.
한일병탄 이후 1910년대 일제의 전통연희 공연을 비하하는 사회적 분위기의 조장과 장안사, 연흥사의 폐관 등으로 전통 공연이 위축되던 상황에서 광무대의 과감한 전통연희 중심의 활동은 전통예술을 지켜내는 역할을 하게 되었다. 상풍패속(傷風敗俗)으로 규정된 창극을 멸시하고 유입된 신파극을 선량한 풍속으로 선전하며 감시를 강화하던 일제의 단속에, 공연 종목을 조정하고 단발성으로 신구연극이라는 명목으로 공연을 기획하는 등 새로운 시도를 통해 전통연희를 지켜내는 노력을 이어갔다. 광무대의 스타였던 옥엽, 채란, 산옥 등 전속 기생 고용을 통한 광무대의 개량 연희는 큰 인기를 얻었는데, 전통연희 전반에 재주가 있었던 이들은 다양한 장르에 출연하며 광무대의 흥행을 책임졌다. 특히 땅재주를 비롯한 여러 장르에 지속적으로 출연한 광무대의 간판 김인호(金仁鎬)와 솟대쟁이 등 마당의 연희를 극장화하여 선보이거나 춤만의 구성으로 관기를 출연시켜 공연 레퍼토리화 하고, 경서도 명창으로 가곡, 가사, 시조, 각종 가무, 재담과 희극에도 능했던 박춘재(朴春載)를 꾸준히 출연시키는 등 다양한 연희의 개량을 통해 다른 극장의 공연 내용에도 막강한 영향력을 끼쳤다. 홍도(紅桃)ㆍ보패(寶貝)ㆍ임명옥(林明玉)ㆍ이소향(李素香)ㆍ김옥희(金玉姫)ㆍ이금향(李錦香)ㆍ이일선(李一仙) 등이 명인ㆍ명창으로 활동했고, 흥행작이었던 창극 《춘향가》와 《심청가》는 단일 공연명으로 올려지기도 하지만, 판소리의 한 부분을 떼어내어 《옥중화》ㆍ《개량 춘향가》ㆍ《어사출도》ㆍ《농부가》ㆍ《어사순찰광경》ㆍ《암행어사시찰》 등의 제목으로도 공연되었는데 매우 인기가 좋았다. 이외에도 《장자고분지탄》ㆍ《박타령》ㆍ《효자소설》ㆍ《백상서》ㆍ《연의각》ㆍ《개량 제비타령》 등이 있다.
1920년대에는 혁신단, 취성좌 등의 신파극, 또는 신극과 양악까지 수용하고, 1925년 토월회의 광무대 직영시기에는 ‘신ㆍ구극을 물론하고 창작극과 번안작을 상시 모집’한다는 내용의 각본 현상 모집 광고를 내는 등 ‘신극(류) 및 고전의 현대화 상연의 병행’을 시도했다.
이러한 활동은 당시 신문 기사에 박승필의 활동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매년 창립기념 공연을 필두로 한 대대적인 광고를 통해 알려졌다. 그 중 1927년 4월 13일 광무대에서 열린 일류명창대회 때 김인호ㆍ김창룡ㆍ이동백ㆍ강소춘ㆍ고비연ㆍ고향란ㆍ이행화ㆍ이화중선 같은 남녀명창들이 총출연했고, 1928년 9월 9일자 광고에는 《가야금》ㆍ《경성무가》ㆍ《경성좌창》ㆍ《기계체조》ㆍ《남녀창》ㆍ《단가》ㆍ《바이올린》ㆍ《서도잡가》ㆍ《서양춤》ㆍ《신파활극》ㆍ《일본가곡》ㆍ《재담》ㆍ《줄타기》ㆍ《창가》ㆍ《채플린 패러디》ㆍ《평양굿》 공연과 김금선ㆍ김유앵ㆍ김종기ㆍ이일선ㆍ임명월 등이 출연했다고 한다. 시대변화에 적응하며 전통연희를 지키고자 했던 광무대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광고라고 생각한다.
1908년 박승필이 광무대를 인수하면서 전통연희 중심의 극장을 선명하게 표방했다. 구극ㆍ판소리ㆍ민요ㆍ무용ㆍ연희 등 주요 분야의 개량화를 시도하며, 당대 타 극장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연레퍼토리를 선보였다. 선도적인 공연 형식의 변화는 신문지면을 통한 전략적 홍보를 통해 가시화되면서, 다른 극장과 당대 서민층에 반향을 일으켰다. 흥행을 위한 목적이기도 하지만, 전통예술을 지키고자 했던 박승필의 의지와 신문화 유입에 따른 변화에 적극 대처했던 전략적 목표가 잘 맞았던 결과였다. 비록 소수이지만 전통연희의 안정적 개량화를 위해 극장의 전속 고용 체제를 만들고, 전통연희의 상설화를 정착시킴으로서 당대 명인들의 활동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신인의 발굴과 성장에 기여했으며, 구극ㆍ신파극ㆍ신극 등을 올려 레퍼토리의 영역을 확장했다. 이것은 1925년 토월회의 광무대 직영기에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는데, 신극 단체임에도 광무대와의 관계에 따라 고전과 전통적 연희물의 수용 및 막간의 활용과 같은 흥행 극단으로서 면모를 보이며 이원적 체제로 운영했다. 일제강점기 최초의 활동사진소로 출발하여 전통연희 전용 극장으로서 전통문화의 보존과 계승에 앞장섰고, 당대 예인들의 활동 공간으로서 대중화에 성공하며 민족 정서의 보루 역할을 했던 광무대는 구극ㆍ신극ㆍ신파극 등 다양한 공연 장르의 근대화 과정에 핵심적 매개 장소로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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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욱(朴羨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