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번
근대적 방식으로 결성된 여성 가무악 전문 기관이자 이익집단으로 전통적인 가무악의 교육 및 전승에 기여함.
가무악에 관한 전문적인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근대적 조직체이자 공연의 주선과 가무 활동에 대한 보상 등을 관리했던 이익집단. 기생조합 내에 가무악에 관한 학습 기능을 갖춤으로써 조직의 전문적 역량을 강화시키는 한편, 전통 가무악의 보존과 발전에 기여했다.
1894년이 단행된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가무 전문 여성들은 전근대적 한계, 즉 신분적 속박과 제도적 강제에 의해 공연 활동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났다. 1902년 이후부터 시작된 근대적 흥행을 계기로 이들의 예술은 특정 계층이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공공의 자산으로 변화되었다. 그런데 1908년 9월 25일에 이들을 통제하는 제도인 <기생단속령>(경시청령 제5호)이 발표됨으로써 기생 집단은 근대적 전문집단이자 이익집단이 되었다. 그런데 이 제도는 가무 전문가로서 기생의 정체를 확정하게 하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경찰서로부터 통제를 받게 함으로써 기생의 활동을 제약했다. 이에 여성들은 이 제도를 활용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하기도 했다. 여성들은 제도의 운용과 실행에서 확인되는 모순을 바로 잡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노력했다. 1916년에 <예기작부예기치옥영업취체규칙>(경무총감부령 제3호)이 발표됨으로써 <기생단속령>이 보완될 수 있었다. 이후로 기생조합은 가무 전문 여성들의 조직체로 사회적으로 안착할 수 있었다. 기생조합이 가무악 전문가 집단이라는 정체가 만들어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기생들이 체계적으로 학습한 가무악이었다. 기생 조합에 배치된 가무악의 교사들은 당대의 최고의 명인들이었고, 이들은 엄격하게 기생들을 학습시킴으로써 기생들이 능동적으로 공적 활동을 할 수 있게 했다. 가무는 기생에 대한 일제의 제도적 억압과 강제로부터 일정 부문 벗어날 수 있게 했을 뿐만 아니라 전문가로서 근대사회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했다.
1908년에 서울에서 결성된 한성기생조합은 여성 스스로 조직화한 최초의 가무전문 집단이었다. 기생의 근대적 조직화를 목도한 지역의 여성들은 대거 상경하여 다양한 기생조합을 결성했는데 그중 하나가 1913년에 설립된 무부기조합(다동조합)이었다. 다동조합은 독신의 여성들의 집합체로 주목되며 이후로 생겨난 기생조합의 모범이 되었다. 1920년대에는 전국의 대도시에서 지역을 대표하는 기생 조직이 자리를 잡았고, 또 1930년대에는 전국 거의 대부분의 군소 도시에도 기생조합이 만들어졌다.
1917년부터 기생조합이라는 명칭은 서울의 한남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일본식으로, 즉 권번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또 1920년부터 한남권번을 시작으로 기생들의 조직체는 동종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연합체로서가 아니라 주식회사 방식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부터 서울의 일부 기생 조합들은 일제에 의해 강제로 통합되기도 했고, 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에는 조직의 운영과 존속이 사실상 어려워졌다. 이에 해방 무렵에는 단일한 단체로 통폐합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
해방이 직후에 서울에는 통폐합된 기생 조직, 즉 예성사가 조직되었는데, 여기에 소속된 기생들은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던 일제 강점기의 관행에 저항하기 위해 1946년부터 총파업을 단행했다. 그러나 이후로 사회적 혼란이 가중되고 또, 제도적·이념적 상황이 변화하면서 사실상 이들의 활동은 회복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기생 조직은 해체의 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정부수립 직후 기생을 조직화하는 제도는 사라졌고 이에 따라 기생조직도 해체되었다.
기생조합은 전통적인 예술 유산을 중심에 놓고, 이를 바탕으로 신민요 같은 근대적·대중적 가창 갈래를 만들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외래 가무에 도전하하는 등 당대 사회의 요구되는 다양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기생조합은 여성 가무악 전문가들이 모여있는 집단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가무악의 교육 기관으로서도 기능했다. 각 기생조합들은 기예가 성숙했던 성인 기생들도 소속되어 있었지만, 장차 가무로써 활동하고자 하는 소녀들, 즉 학습이 필요한 동기(童妓)들도 포함하고 있었다. 따라서 기생조합은 이들을 체계적으로 학습을 시키기 위해 교육 과정을 운영했는데, 여기에는 당대 최고의 남녀 음악가들이 교육자로 참여했다.
기생 집단의 교육과정은 조합의 사정이나 시대 그리고 지역에 따라 달랐다. 예를 들면 평양의 경우처럼 규모가 큰 조직에서는 기생 교육을 위해 일반 학교의 교육 과정과 가무악 과정을 동시에 운영하기도 했지만, 규모가 작은 조직에서는 가무악 전문 교육 프로그램만을 운영했다.
한국 전쟁 이후 전문적인 가무를 갖췄던 과거의 기생들은 변화된 사회에서 새로운 활로를 개척했다. 예를 들면 기생조직 해체 무렵에 서울에서 등장한 여성국악동호회(1948)는 1950년대에 다수의 여성국극단들의 설립으로 이어졌고, 지방에서는 1958년부터 지방에는 여성농악단들이 경성됨으로써 기생 집단의 전문적인 공연 역량은 새로운 세대의 공연자에게 넘어갔다. 더 나아가 20세기 전반기에 기생 집단과 그 주변에서 축적되어 있었던 일부 공연 종목들은, 즉 전통 공연예술 종목들은 현재의 전통음악 및 무용 종목으로 이어지고 있다. 다만, 기생들의 주요 가창 갈래였던 해방 전의 신민요는 미국 대중음악이 주류 대중음악으로 자리를 잡게 되던 1960년대까지 지속되었을 뿐이다.
근대 이후로 일제 강점과 함께 서양문화가 밀려오면서 전통문화는 전승과 비평에서 열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근대 시기에 전통악무는 전승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대부분의 전통 공연 예술집단이 전근대로부터 이어졌던 조직과 레퍼토리를 전승하고 발전시키기 어려웠던 것에 비하여 기생집단은 제도적 기반을 갖추고 전통 예술의 공연과 학습을 동시에 아우르며 갈 수 있었다.
권도희, 「대한제국기 이후 삼패의 정치학-“안진소리”의 기호적 의미」,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38집, 2019. 권도희, 「기생의 가창 활동을 통한 근대에의 대응」, 『한국시가연구』 제32집, 2012. 권도희, 「대한제국기 황실극장의 대중극장으로의 전환 과정에 대한 연구-희대․협률사를 중심으로」, 『국악원논문집』 제32집, 2015. 권도희, 「20세기 기생의 가무와 조직-근대기생의 형성과정을 중심으로」,『한국음악연구』 제45집, 2009. 권도희, 「기생조직 해체 이후 여성음악가들의 활동」, 『동양음악』 25집, 2003.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홍인문화사, 1976.
권도희(權度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