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기 성악가로 활동하던 바리톤가수 전형철은 음악박물관을 설립하기 위하여 세계 여러 나라의 악기와 악보 등을 수집하던 중 우리나라의 전통음악을 기록한 악보도 소장하고자 하였으나, 당시까지 전통음악을 체계적으로 수록한 악보가 갖추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본인이 직접 전통음악의 악보를 제작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1939년 무렵, 당시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사장(雅樂師長)이었던 함화진(咸和鎭)이 제공한 아악부의 악보를 바탕으로 이를 필사하고, 전통 제책방식으로 제본하여 총 열 책의 악보집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형철의 음악박물관 설립계획은 그의 경제적 사정으로 인하여 성사되지 못하였다. 전형철이 제작한 열 종의 악보 중 『가야금보』를 제외한 아홉 종을 1949년(단기 4282) 9월 7일 국립국악원의 전신인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가 구입하였고, 이 악보들이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다.
국립국악원은 1988년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5집』에 대금보·피리보·당적보·단소보·거문고보의 다섯 종을, 그리고 1989년에 제28집으로 가야금보·해금보·양금보·아쟁보·경종보의 다섯 종을 영인·간행하였다. 이 중 가야금보는 1949년 이 악보의 구입 때 누락되었던 것인데, 작곡가 겸 가야금 연주가였던 황병기(黃秉冀, 1936~2018)교수가 1950년대 후반에 어느 고서점에서 구입하여 소장하던 것을 함께 영인·간행한 것이다. 황병기 소장의 가야금보는 그의 사후에 국립국악원에 기증되어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됨으로써 『아악부악보』 열 종 한 질(秩)을 갖추게 되었다.
이들 악보의 표지에는 가야금보·대금보처럼 악기명만 적혀 있으나, 1988년 한국음악학자료총서 간행 때 해제자에 의하여 이들 모두를 통칭하는 명칭으로 『아악부악보』가 제안되었던바. 이 명칭은 성경린(成慶麟)·김천흥(金千興) 등 아악부 출신 국립국악원 원로사범들의 의견을 구하여 동의를 얻은 바 있다. 따라서 이들 악보는 『아악부악보』로 불리게 되었으며, 개별 악보는 『아악부 가야금보』·『아악부 대금보』 등으로 불리게 되었다.
전형철이 제작한 이 악보를 『아악부악보』로 부르게 된 것은, 이들 악보에 실린 내용이 당시 아악부에 전승되던 음악이며, 이를 기록한 기보법 역시 당시 아악부에서 사용하던 정간보의 서법(書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형철이 이 악보를 제작한 1939년 무렵 아악부에는 이전부터 전해오던 정간보와 아악생(雅樂生)들이 개인적으로 채보하여 간직하던 정간보가 있었고, 1920년대 말부터 시작된 오선채보 사업의 제1·2차분 결과물이 있었다. 그리고 소장 악사들이 주도한 제3차 채보작업이 마무리되어가던 시점이었다. 이전부터 전해오던 아악부의 정간보는 정간 안에 율명을 적어 기보하는 방식이었는데, 고종(高宗) 때 아악사장이었던 함재운(咸在韻, 1854~1916)이 이를 개선하여 보다 실용적인 악보를 고안하고, 이후 각 악기의 고유한 주법과 장식음을 표기하는 부호가 추가되어 실용성을 높였는데, 20세기 초에 아악부의 악보 중 다수가 이러한 체계로 기보되었다. 전형철이 악보를 제작할 때 함화진이 제공한 악보는 당시 아악부에서 통용되던 이들 악보였을 것이므로, 이 악보를 『아악부악보』로 부르게 된 것이다.
『아악부악보』의 제작자는 전형철이지만, 그는 단순히 이 악보의 필사·제책을 주도했던 인물일 뿐, 이 악보에 수록된 음악적인 내용과는 무관하다. 이 악보의 제작 때 저본(底本)이 되었던 아악부의 악보 편찬자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으나 이왕직아악부를 이끌었던 아악사장들의 업적과 당시의 정황을 미루어볼 때, 기존음악들을 정간보로 옮겨 악보화(樂譜化)하는 데 공헌한 김영제(金甯濟, 1883~1956)와, 함재운의 자제이며 당시 아악사장을 지냈고, 자신이 거문고 연주자이기도 하였던 함화진(咸和鎭, 1884~1949) 등이 음악적인 내용에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 체재 및 규격 『아악부악보』 10종의 크기는 두 가지로 나뉜다. 현금보(거문고보)·아쟁보·경종보는 세로 42.0~42.4 × 가로 29.3~29.5 cm이고, 대금보·당적보·단소보·해금보·양금보·피리보·가야금보는 세로 33,3~33.5× 가로 29.2~29.3 cm이다. ○ 소장처 국립국악원 ○ 편찬연대 및 편저자 사항 1939년 경, 성악가 바리톤가수 전형철이 이왕직아악부의 함화진이 제공한 악보를 바탕으로 전문 필사자에게 의뢰하여 필사·제책하였다. ○ 구성 및 내용 『아악부악보』에 수록된 악곡은 궁중음악과 풍류방의 기악곡인 <여민락>·《영산회상》·<보허사> 및 대표적인 성악곡인 《가곡》을 포함한다. 그러나 각 악보별(악기별)로 수록곡이 일정하지 않으며, 수록 순서도 일치하지 않는다. 각 악보별 수록 내용은 아래 <표>에 정리 하였다. 이 악보의 수록 내용에서 주목되는 점은 아래와 같다. 첫째, 《종묘제례악》을 비롯하여 사직·문묘 등 제례악이 보이지 않는 점 둘째, 피리보에 <수제천>과 <동동> 및 <경풍년>이 누락된 점 셋째, 대금보에 <송구여지곡>이 누락된 점 넷째, 《평조회상》의 경우 대금·피리·당적·단소는 '유초신지곡'으로, 해금·거문고·양금·가야금은 '취태평지곡'으로 곡명을 표기한 점 다섯째, 거문고·가야금 악보의 《취태평지곡》에 <하현도드리>가 포함된 점 여섯째, 대금·피리·가야금 등 다른 악기별 악보는 《중광지곡》 뒤에 《천년만세》라는 곡명이 있으나, 거문고 악보만 《중광지곡》 뒤에 《천년만세》라는 곡명 없이 <계면가락환입>·<양청환입>·<우조가락환입>의 세 곡이 이어서 실린 점 『아악부악보』의 기보상의 특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경록무강지곡>·<기수영창지곡>·<태평춘지곡>·<서일화지곡>은 정간 없이 율자보만 기보하였고, 장단 표기는 없다. 나머지 악곡은 정간보 안에 율자보를 적어 기보하였으며, 대부분 장단표기가 있다.. 둘째, 정간보의 한 행은 한 장단 단위이며, 한 행의 정간 수는 32·20·12·10정간으로 다양하고, 한 행을 세분하는 대강 표시는 없다. 악곡별 한 행의 정간 수는 아래 <표>에 정리하였다. 셋째, 피리보와 현악기 악보에는 탁성(濁聲)과 배탁성(倍濁聲)을 기보하기 위하여 ‘亻’과 ‘彳’이 사용되었는데, 이들 부호는 20세기 접어들어 아악부를 중심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 『아악부악보』에 전해져 필사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20세기 초기의 정간보로는 『송사 현금보(松史 玄琴譜)』 1과 2, 아악부 『비파보』, 강릉 선교장 소장 『현금보 초(玄琴譜 抄)』 등이 있으나, 탁성과 배탁성의 표기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본다면 율명 표기에 배성과 배탁성을 표기한 것은 『아악부악보』가 처음인 것으로 보인다. [악보 차례]
악보명/쪽수
곡명
(아명/속명) |
경종보 | 대금보 | 피리보 | 당적보 | 해금보 | 아쟁보 | 단소보 | 현금보 | 양금보 | 가야금보 | 정간 유무 |
장단 표기 |
1 행 정 간 수 |
비고 | |
---|---|---|---|---|---|---|---|---|---|---|---|---|---|---|---|
50 | 218 | 208 | 127 | 227 | 56 | 153 | 211 | 161 | 182 | ||||||
경록무강지곡 | 여민락만 | ④ | ① | ① | ③ | ④ | ④ | × | × | ||||||
기수영창지곡 | 낙양춘 | ① | ② | ② | ① | ② | ① | × | × | ||||||
태평춘지곡 | 여민락령 | ② | ③ | ③ | ② | ① | ② | × | × | ||||||
서일화지곡 | 해령 | ③ | ④ | ④ | ④ | ③ | ③ | × | × | ||||||
수제천 | ⑤ | ⑤ | ⑤ | ○ | ○ | 20 | 대금보 장단표기 없음 | ||||||||
동동 | ⑥ | ⑥ | ○ | ○ | 20 | 대금보 장단표기 없음 | |||||||||
승평만세지곡 | 여민락 | ⑦ | ⑦ | ⑥ | ⑥ | ⑥ | ⑨ | ① | ③ | ③ | ③ | ○ | ○ | 10월 20일 | 1·2·3장/4·5·6·7장 |
수연장지곡 | 밑도드리 | ⑧ | ⑧ | ⑦ | ⑦ | ⑧ | ② | ④ | ⑤ | ○ | ○ | 12 | |||
송구여지곡 | 잔도드리 | ⑧ | ⑦ | ⑧ | ④ | ④ | ○ | ○ | 12 | ||||||
장춘불로지곡 | 보허자 | ⑤ | ⑨ | ⑤ | ⑧ | ⑦ | ○ | ○ | 20 | ||||||
황하청 | 보허사 | ⑤ | ⑤ | ⑥ | ○ | ○ | 10월 20일 | 1·2·3·4장/5·6·7장 | |||||||
표정만방지곡 | 삼현영산회상 | ⑨ | ○ | ○ | 12월 20일 | 상·중·세·가/삼·염·타·군 | |||||||||
유초신지곡 | 평조회상 | ③ | ○ | ○ | 12월 20일 | 상·중·세·가/삼·염·타·군 | |||||||||
취태평지곡 | 평조회상 | ⑨ | ⑧ | ⑨ | ○ | ○ | 12월 20일 | 상·중·세·가/삼·(하)·염·타·군 | |||||||
중광지곡 | 영산회상 | ⑨ | ⑤ | ⑥ | ⑥ | ⑦ | ○ | ○ | 12월 20일 | 상·중·세·가/삼·하·염·타·군 | |||||
천년만세 | ⑥ | ⑦ | ⑦ | ⑧ | ○ | ○ | 12 | ||||||||
만파정식지곡 | 취타 | ⑥ | ⑨ | ⑧ | ④ | ⑨ | ○ | ○ | 12 | ||||||
수요남극지곡 | ○ | ○ | 12 | ||||||||||||
절화 | 길군악 | ○ | ○ | 12 | |||||||||||
우림령 | 길타령 | ○ | ○ | 12 | |||||||||||
금전악 | 별우조타령 | ○ | ○ | 12 | |||||||||||
군악 | ○ | ○ | 12 | ||||||||||||
요천순일지곡 | 청성곡 | ⑤ | ○ | ○ | 32 | 해금보 장단·정간표기 없음 | |||||||||
경풍년 | 자진한잎 | ○ | ○ | 32/20 | 본가곡·농·낙/편 | ||||||||||
헌천수 | 염불타령 | ○ | ○ | 20 | |||||||||||
우조조음 | 우조다스름 | ① | ① | ① | ○ | × | 20 | 양금보 장단표기 있음 | |||||||
계면조조음 | 계면조다스름 | ② | ② | ② | ○ | × | 20 | 양금보 장단표기 있음 | |||||||
만년장환지곡 | 가곡 | ⑦ | ○ | ○ | 32/20 | 본가곡·농·낙/편 | |||||||||
수록악곡수 | 8 | 19 | 18 | 17 | 23 | 10 | 7 | 11 | 10 | 11 | |
조선시대의 장악원과 대한제국 시기의 교방사 등 국가음악기관의 기능을 계승한 일제강점기의 이왕직아악부는 전통음악의 전승과 음악인의 양성 등으로 전통음악 보존과 계승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아악부에서는 교육과 음악 전승과정에서 악보에 의존하기보다는 대부분의 연주곡을 구전심수로 교육하였으며, 연주자들은 이들 악곡을 암기하여 연주하였다고 한다. 다만 악보는 개인적으로 기록하거나 참고하는 역할만을 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아악부에 전승되던 음악을 체계적으로 기록한 악보를 공식적으로 편찬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아악부의 음악을 기록한 악보가 후대에 전해지는 것이 어려울 수도 있었으나, 다행하게도 아악부의 악보를 바탕으로 이를 정서(正書)·제책한 『아악부악보』가 남아 전하게 되었다. 이 악보는 20세기 전반기에 전승되던 궁중음악과 풍류방음악 연주에 편성되던 열 가지 악기의 음악을 대부분 수록한 귀중한 음악문헌이다. 아울러 오늘날 국악교육 현장에서는 악보가 매우 중요하게 활용되고 있는 바, 『아악부악보』는 현재 국립국악원 등에 전승되는 악기별 악보의 바탕이 되는 소중한 자료라는 점에서 음악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국가등록문화유산 <이왕직 아악부 정간보(총 11점)> 등록(2024. 8. 8.) * 국가등록문화유산 등록 때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에서 기록된 <비파보>를 포함하여 열한 점이 등록되었으나, <비파보>는 기보방식과 악보의 체제 등이 『아악부악보』와 다르다. 또한 국립국악원에 전하는 이왕직아악부의 악보 중에는 오선보로 채보된 다수의 악보가 있으므로, 이와의 혼동을 피하고자 국가등록문화유산에 등록된 정간보만을 지칭하기 위하여 <이왕직 아악부 정간보>라 부르게 되었다.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5집, 국립국악원, 1988. 국립국악원, 『한국음악학자료총서』 제28집, 국립국악원, 1989. 함화진, 『조선음악통론』, 민속원(영인복간), 1983.
김영운(金英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