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의 학자 서명응의 저술로서 시(詩)와 악(樂)에 관한 총체적 논의가 이루어진 악서(樂書)
『시악묘계(詩樂妙契)』는 정조 대의 지악지신(知樂之臣)인 서명응(1716~1787)의 저술로서 “시와 악이 묘하게 서로 맞는다”는 제목에 보이는 것처럼 시와 악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이루어진 책이다. 『시경』의 풍(風)ㆍ아(雅)ㆍ송(頌)의 일부 시를 골라 그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덧붙였고 이들의 음악이 어떤 조(調)로 이루어져야 하는지 그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고 악보를 만들어 수록했다.
『시악묘계』의 ‘묘계(妙契)’라는 말은 ‘묘하게 서로 맞는다’는 의미로 장횡거(張橫渠, 1022~1077)의 장횡거화상찬(張橫渠畵像贊)의 ‘묘계질서(妙契疾書)’, 즉 ‘절묘하게 부합한 생각을 빠르게 적는다’라는 구절에서 취해온 것이다. 『시악묘계』의 시(詩)는 『시경』의 풍ㆍ아ㆍ송이며, 악(樂)은 그 시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조선 후기 시경론(詩經論), 나아가 시악론(詩樂論)의 방향을 가늠해 볼 수도 있다. 서명응이 여러 해 동안 시와 악에 대해 공부했고, 그 결과 깨달은 바가 있어서 시(詩)와 악(樂) 두 편으로 나누어 저술했다.
○ 체재 및 규격
2권 1책. 33.5cm×22.5cm
○ 소장처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 편찬연대 및 편저자 사항
서명응이 쓴 『시악묘계』의 저술연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다만 『시악묘계』가 실려 있는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의 편집연도가 1783년(정조 7)이고, 『시악묘계』의 하편 「악계(樂契)」 ‘균조총서(均調總敘)’ 말미에 “『원음약(元音鑰)』을 참조하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원음약』 이후, 『보만재총서』가 편집된 1783년 사이의 저술로 볼 수 있다.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영ㆍ정조년간에 걸쳐 부제학, 이조판서, 대제학 등을 고루 역임한 인물로 영ㆍ정조대에 국가 규모로 이루어지는 편찬 사업에 두루 참여하여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정조의 세손 시절 스승으로 정조의 학문 수련에 큰 도움을 주었고, 정조 즉위 이후에는 혁신 정치의 중추로 세워진 규장각(奎章閣)의 초기 제학(提學)으로 활동했다.
○ 구성 및 내용
『시악묘계』는 앞부분에 「서(序)」와 「후서(後序)」가 있고 크게 상편 「시계(詩契)」, 하편 「악계(樂契)」의 두 편으로 되어 있다. 「시계」에서는 『시경(詩經)』의 풍(風)ㆍ아(雅)ㆍ송(頌)의 일부 시를 골라 그에 대한 해석과 설명을 덧붙였고 「악계(樂契)」에서는 국풍(國風)ㆍ소아(小雅)ㆍ대아(大雅)ㆍ주송(周頌)이 각각 각조(角調)ㆍ치조(徵調)ㆍ궁조(宮調)ㆍ우조(羽調)로 되어야 하는 이유를 밝히고 이 가운데 각각 한 편의 시, 즉 관저(關雎), 녹명(鹿鳴), 문왕(文王), 청묘(淸廟) 네 편만을 골라 각각 각조(角調)ㆍ치조(徵調)ㆍ궁조(宮調)ㆍ우조(羽調) 12균(均)의 악보를 수록해 놓았다.
서명응은 『시악묘계』 상편 「시계(詩契)」에서 “시는 심학(心學)”이라 했다. 시가 심학이라 한 이유는 “시란 성정(性情)에서 나오는 것이니 성정이 바로 마음[心]”이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와 함께 『시경』 이남(二南)ㆍ소아(小雅)ㆍ대아(大雅)ㆍ송(頌)의 성정을 논했는데 “이남(二南)의 시는 평담(平淡)ㆍ중정(中正)하고 소아(小雅)의 시는 종용(從容)ㆍ화열(和悅)하며, 대아(大雅)의 시는 장정(莊整)ㆍ재숙(齊肅)하고, 송(頌)의 시는 심밀(深密)ㆍ근엄(謹嚴)하다”고 했다. 서명응의 논의는 주자의 견해를 따른 것이다. 주자가 “‘풍(風)’ 가운데에는 풍시(風詩)의 정경(正經)이 된 이남(二南-周南ㆍ召南)만이 성정의 올바름을 얻었다”고 한 견해를 수용하여 『시악묘계』에서 다루었고, 아(雅)와 송(頌)은 “화(和)하면서도 장엄하며 너그럽고 정밀한 시”라고 하는 주자의 평가를 존중하여 택하였다.
[차례]
시악묘계서(詩樂妙契序)
후서(後序)
상편(上篇): 시계(詩契)
시도총서(詩道總敘) 1-4
주남(周南): 관저(關雎)1, 토저(免罝)2, 부이(芣苢)3, 편의(篇義)4
소남(召南): 작소(鵲巢)5, 채번(採蘩)6, 채빈(采蘋)7, 소성(小星)8, 편의(篇義)9, 이남편의(二南篇義)10, 11, 변풍제(變風諸)11-15
빈풍(豳風): 통론(統論)1, 칠월(七月)2-4, 치효(鴟鴞)5-6
소아(小雅): 통론(統論)1, 녹명(鹿鳴)2-3, 편의(篇義)4
대아(大雅): 문왕(文王)1-2, 대명(大明)3-4, 금(錦)5-8, 한록(旱麓)9, 사제(思齊)10, 영대(靈臺)11-12, 편의(篇義)13, 변아위시(變雅衛詩)14
주송(周頌): 청묘(淸廟)1, 청묘(淸廟)2, 유객(有客)3, 주송편의(周頌篇義)4, 삼송편의(三頌篇義)5
하편(下篇): 악계(樂契)
균조총서(均調總敘)
국풍각조(國風角調)(관저(關雎))
소아치조(小雅徵調)(녹명(鹿鳴))
대아궁조(大雅宮調)(문왕(文王))
주송우조(周頌羽調)(청묘(淸廟))
서명응이 쓴 서문을 보면 『시악묘계』가 완성된 배경이 잘 설명되어 있다. “내가 시와 악에 대해 공부한 지 여러 해이지만 때때로 괴로워하고 충분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심해 침식을 잊은 지가 오래되었다. 그러다 하루아침에 어슴푸레하게나마 깨닫게 되어 풍ㆍ아ㆍ송의 강조(腔調)에까지 절절이 모두 통하게 되었다. 이에 시와 악 두 편을 저술하되 장횡거의 ‘묘계질서(妙契疾書)’란 말을 취해 『시악묘계(詩樂妙契)』라 이름하고 그에 서로 의존하게 되는 까닭을 말하며 서문을 지었다”라고 썼다. 서명응은 시와 악을 분리된 것으로 보지 않아서 『시악묘계』를 통해 서명응의 시악론, 더 나아가 조선 후기의 시악론을 한층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다. 즉, 삼대(三代)와 서주(西周)의 성세(盛世)를 이상적인 것으로 여기고 그것을 모델로 삼아 자신의 시대에 실현하고자 한 유학자들의 생각이 시경론에서도 예외가 되지 않았다. ‘노랫말로서의 시’라는 관점에서 출발한다면 그 노랫말에 입히는 음악의 경우도 같은 방향성을 지닌다. 서명응이 논하는 『시경』에 근거한 시와 악에 대한 논의를 바라보는 시각은 ‘옛 것으로의 단순한 회귀’로 비추어지기도 하지만 이는 단순한 상고(尙古), 호고(好古)의 태도는 아니다. 외래학문이었던 성리학을 국학으로 삼아 조선 후기에 이르러 ‘조선 성리학’이라는 조선 고유문화로서 토착화하기에 이르기까지의 노정은 선진문화를 수용하여 자기화하는 치밀한 조선의 문화 역량을 드러내었고, 외래사상으로 수입되었던 성리학은 조선 후기에 와서 치열한 철학적 근거 위에 독자성을 얻기에 이른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명응의 시악(詩樂)에 대한 논의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해된다.
『시악묘계』 『보만재총서』 『시경』
송지원, 「서명응의 음악관계저술 연구」, 『한국음악연구』 27, 1999. 송지원, 「『시악묘계(詩樂妙契)』를 통해 본 서명응(徐命膺)의 시악론(詩樂論)」, 『한국학보(韓國學報)』 26/3, 2000. 송지원, 「조선조 음악의 『시경』 수용과 활용 양상」, 『한국문학과 예술』 19, 2016.
송지원(宋芝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