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전기 문신·음악가, 박연(朴堧)의 시문과 상소를 모아 엮은 책
『난계선생유고』는 선생의 12세손 박심학(朴心學, 1764~1836)이 유고(遺藁)를 수습하여 편차(編次)하고,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의 서문과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발문을 붙여 1822년(순조 22) 교서관에서 간행한 1권 1책의 금속활자본이다.
『난계선생유고』의 난계(蘭溪)는 박연(朴堧, 1378~1458)의 호이다. 홍계희(洪啟禧, 1703~1771)가 지은 시장에 의하면, 선생이 살던 영동(永同) 심천(深川) 고당(高塘)에, “난초가 많이 생장하므로 세상에서는 난계선생이라 일컬는다”(其所居 蘭草多生 故世稱蘭溪先生)”고 한다. 선생의 『유고』 간행은 1767년(영조 43) 11월 14일에, “고 중추원 부사 박연(朴堧)에게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故中樞院副使朴堧謚文獻)” 내리면서부터 비롯된다. 선생에게는 “도덕이 있고 널리 들은 것을 전하며, 지혜롭고 질박하며 이치에 밝았다”는 도덕박문왈 문(道德博聞曰 文)이요, 지질유리왈 헌(智質有理曰 獻)이란 시호가 내려진 것이다. 시장(諡狀)은 담와(澹窩) 홍계희(洪啟禧, 1703~1771)가 지었다. 그런데 박심학은 선생의 시장에 오류가 있음을 발견한다. 초본 시장에는 선생 증조의 휘가 순충(純冲)인데 신열(臣悅)로, 고조의 휘는 이온(而溫)인데 문빈(文彬)으로, 오대조 휘는 혁공(赫公)인데 세공(世恭)으로 시조의 휘는 언인(彦仁)인데 언부(彦孚)라 잘못 기재 되어 있음을 알고, 1810년(순조 10) 8월에 상소하여 이를 바로 잡는다. 다만 시장에 선생의 막내아들 삼남(三男) 박계우(朴季愚)의 죽음에 대해 “계유정난(癸酉靖難)의 피화가 아닌 사육신과 함께 화를 당하였다”고 한 내용까지는 바로 잡지 못했다.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10월 10일에 수양대군이 정권을 잡을 목적으로 반대파인 김종서 등 여러 고명대신을 숙청한 정변인데, 선생의 삼남(三男) 계우가 와언(訛言)을 한 간당으로 지목되어 이듬해 1454년(단종 2) 9월 9일 교형(絞刑)되면서, 선생은 44년의 조정생활을 뒤로하고 전라도 고산(高山)으로 귀향 간다. 일남 박맹우(朴孟愚)는 광주로, 이남 박중우(朴仲愚)는 거제도로 각각 귀향을 간다. 이후 선생의 후손은 계유정난의 폐족(廢族)으로 지목되어 뿔뿔이 흩어져 살며 벼슬을 할 수 없게 됨으로써, 선생이 남긴 글과 글씨가 흩어지고 병화로 유실되어 간행이 늦어졌다. 선생의 『유고』 간행은 박심학의 할아버지 박사량(朴師良, 1708~1772)에 의해 박차를 가하게 된다. 그는 선생이 1455년(세조 1) 7월 일흔여덟 살에 유배지 고산에서 후손에게 남긴 『가훈』만을 따로 수습하여 1745년(영조 21)에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서문을 덧붙여 간행한다. 서문에, “내가 공의 후손에게 《난계집》을 빌려서 읽어보니 공의 소저 중에 가훈 한편이 있는데, 자손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저술한 것이다. 명언들이 아주 많다. 숙독하여 음미하면 한 권의 『소학』 책이라고 할 수 있다”고 술회하였다. 이는 선생에게 시호가 내려진 1767년(영조 43) 보다 무려 22년 전에 이루진 일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지금은 확인할 수 없으나, 소략하게나마 이미 『난계집』이 집안에 전해오고, 이것을 토대로 하여 박심학은 시(詩) 8수, 소(疏) 39편, 잡저 2편 조하의절(朝賀儀節), 가훈(家訓 -十七則-) 등을 재정리하고, 여기에 홍계희의 시장 오류를 바로잡고 황경원(黃景源, 1708~1787)의 신도비명-병서-와 차례로 김조순의 서문, 김노경의 발문을 붙여 1822년(순조 22) 『난계선생유고』를 교서관에서 금속활자본으로 간행한다. 이후, 『난계선생유고』는 두 차례 더 간행된다. 하나는 1903년(광무 7) 선생의 17세 방손(傍孫) 박경하(朴璟夏)에 의해 다시 간행되고, 다른 하나는 1979년 박윤하(朴允夏)에 의해 『문헌공난계선생문집』이란 표제명칭으로 다시 간행되어, 현재 『난계선생유고』는 일명 「심학본」(1822), 「경하본」(1903), 「윤하본」(1979) 등 3본이 전한다. 이것을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심학본(心學本) | 경하본(璟夏本) | 윤하본(允夏本) |
(순조 22년, 1822) | (광무 7년, 1903) | (1979년) |
난계선생유고 | 난계선생유고 | 문헌공난계선생문집 |
문헌공난계선생소상 | ||
난계사, 오봉사 전경 | ||
효자비 | ||
유묵 | ||
산도 | ||
난계추모가 | ||
난계선생유고서 | 난계유고서 | 난계선생문집서 |
김조순 | 김학진, 송태헌 | 김조순 |
문헌공난계선생문집목차 | ||
사적 | ||
난계유고목록 시 8수, 소 39편, 잡저 2편 조하의절(군신 조하의절, 왕세자 조하의절), 가훈 17칙 부록 시장, 신도비명 |
좌동 | 시 8수, 소 39편, 잡저 2편 조하의절(군신 조하의절, 왕세자 조하의절), 가훈 –17칙- |
방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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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록 효자문헌공난계선생행적(이서구 근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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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 충신 집현전 한림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부총관 박공(이서구) |
연시절차 | ||
시장 | ||
신도비명-병서- | ||
임오년 맹하 예각활인 | 광무7년 계묘 중하 학부활인, 초강서원정액소 | 초강서원정액소 |
김노경 근발 | 김노경 근발 | 김노경 근발 |
월성 김태제 근발 | 손희철 근발 | |
17세손 경하 근발 | 17세손 윤하 근발 |
위 3본의 차이점을 정리하면, 첫째, 문집 명칭의 경우 「심학본」, 「경하본」의 『난계선생유고』이고, 「윤하본」에서는 『문헌공난계선생문집』으로 표제명칭이 바뀌었다. 둘째, 서문과 난계선생 관련 자료들이 『심학본』 보다 「경하본」, 「윤하본」에는 더 추가되고 있다. 서문의 경우, 「심학본」에는 김조순의 서문이나, 「경하본」에서는 『난계유고』 서로 바뀌고 서문 또한 김학진(金鶴眞)과 송태헌(宋台憲)의 서문이 더 추가되며, 「윤하본」에서는 『난계선생문집서』라 하여 첨언 없이 김조순의 서문을 머리글로 삼고 있다. 그러나 「윤하본」에서는 초상(肖像), 난계사(蘭溪祠) 및 오봉사(五峯祠) 전경, 효자비(孝子碑), 유묵(遺墨), 산도(山圖), 난계 추모가(蘭溪追慕歌), 연보(年譜), 사적(事蹟), 가장(家狀), 행적(行蹟), 연시절차(延諡節次), 초강서원청액소(草江書院請額疏)와 김노경(金魯敬)의 발문 이외에 손희철(孫囍喆), 윤하(允夏)의 발문 등이 더 추가 되어 있다. 셋째, 발문의 경우 〈심학본〉에는 유당 김노경의 발문이 있는 반면에, 〈경하본〉에는 김로경 발문 외에 월성 김태제(金台濟)와 경하(璟夏)의 발문이 추가되어 있으며, 〈윤하본〉 또한 김노경 외에 손희철(孫喜喆)과 윤하의 발문이 더 들어 있다.
한편, 『난계선생유고』의 간행과 관련하여, 특히 서문 2편・발문 1편・신도비명 1편・시장 1편 등 5편의 글쓴이는 박심학과 학연 친연을 맺고 있다. 이들 글쓴이의 관계를 살펴보면, 『유고』 이해에 한층 도움이 될 것이다. 이것을 정리하면 <표 2>과 같다.
《난계유고》의 서・발・명・장 | 글쓴이 | 간지 | 비고 |
서문 | 풍고 김조순(金祖淳, 1765〜1832) | 上之 二十二年 孟夏 1822년(순조 22) 4월 |
순조의 장인 |
가훈 서문 | 도암 이재(李縡, 1680〜1746) | 乙丑 五月 1745년(영조 21) 5월 |
인현왕후의 조카(이모) 김창협의 문인 |
시장 | 담와 홍계희(洪啟禧, 1703~1771) | 1767년(영조 43) 시장 | 이재의 문인 |
신도비명 | 강한 황경원(黃景源, 1708〜1787) | 대제학 1767년(영조 43) 이후 |
이재의 문인 |
발문 | 유당 김노경(金魯敬, 1766〜1837) | 이조판서 1819년(순조 19) 이후 |
김정희의 아버지 |
이와 같이 글쓴이는 한결같이 당대 문장가이며, 당색으로는 서인계 노론에 속하는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서 가훈 17칙 서문을 지은 도암 이재는 『난계선생유고』 간행 과정에 중요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재는 『난계선생유고』가 간행되기 22년 전에 박사량에 의해 편집된 『가훈』 별집 서문을 쓰는데, 그는 노론의 대표적 인물로,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는 낙론을 지지한 사람이다.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희경(熙卿), 호는 도암(陶菴)ㆍ한천(寒泉)이다. 아버지는 진사 만창(晩昌)이며, 어머니는 민유중(閔維重)의 딸이다. 김창협(金昌協)의 문인이었다. 곧, 이재는 인현왕후가 이모이며, 김창협은 문곡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의 둘째 아들로,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손자가 된다. 따라서 『가훈』 서문에 의하면, “이재에게 가훈의 서문을 부탁한 사람은 박사량이고, 이재는 을축, 1745년(영조 21) 5월 서문을 삼가 쓴다”고 하였으니, 『난계선생유고』의 서문을 지은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자, 김창집의 고손자로, 김창협은 작은 고조할아버지가 된다. 곧, 시장을 지은 담와 황계희와 신도비명을 지은 강한 황경원은 이재의 문인으로, 김창협과 이재, 황계희, 황경원은 서로 학문적 연원이 같다. 또 서문을 부탁한 박심학은 김조순의 종숙부로 성리학에 밝고 예설(禮說)과 역학(易學)에도 조예가 깊은 삼산재(三山齋) 김이안(金履安, 1722~1791)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김조순과는 영동군 심천면 각계리 선지당(先志堂)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다. 영동 각계리 선지당은 고려 말의 문신으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이며, 선생의 외숙부 상촌(桑村) 김자수(金自粹)의 유적인데, 후일 선지당은 후학을 가르쳐 많은 인재를 길러내던 곳으로 유명하다. 순조 초에 후손 김노경이 선지당이라 당호를 써서 걸었으며, 김정희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는 ‘장의자손(長宜子孫)’이란 친필 편액을 쓴 것으로 보면, 그 학연(學緣)과 친연(親緣)을 알 수 있다.
『난계선생유고』의 내용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선생의 정서적 감흥을 읊은 시문과 『유고』 간행의 배경과 행장을 비롯해 후손에게 전하는 가훈 등을 담고 있는 서문, 시(詩) 8수, 시장(諡狀), 신도비명(神道碑銘), 발문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조 세종대왕과 함께 악학정비와 아악부흥이란 위대한 업적을 이룬 과정과 내용을 소상하게 살필 수 있는 소(疏) 39편, 잡저 2편이다. 곧, 소 39편에는 주로 1426년(세종 8) 4월 25일에서 1450년(문종 즉위년) 11월 22일까지의 음악정비 과정과 동지, 정조(正朝), 즉위, 탄일 등 국가 경축일을 맞아 왕세자와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임금에게 하례하던 조하의절 등을 담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상소 39편과 잡저 2편 조하의절, 가훈 등의 내용을 중심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난계선생유고』 상소 39편을 정리하면 다음 <표 3>과 같다.
상소 제목 | 풀 이 | 실록에 실린 년월일 |
---|---|---|
請頒行家禮小學三綱行實訓民五音疏 | 널리 가례와 소학 삼강행실을 가르치고 오음정성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상소 | 실록에 없음 |
請修 朝賀禮及禁用女樂疏 | 조하의 의례를 개수하고 아울러 여악의 사용을 금지하자는 상소 | 실록에 없음 |
請制律管疏 | 율관을 제작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定 廟朝正樂疏 | 종묘와 조회에 올바른 음악을 정하자는 상소 | 실록에 없음 |
請 祭享樂成告備疏 | 제향의 악을 완성하고 아악령을 두어 집례자에게 고하게 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正 祀享雅樂疏 | 사향의 아악을 바로잡자는 상소 | 세종 8년 4월 25일 |
請正 祀享樂律疏 | 사향의 악률을 바로잡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 廟樂用四成疏 | 묘악에 사성을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23년 1월 6일 |
請正 朝賀樂律疏 | 조하의 악률을 바로잡자는 상소 | 세종 13년 11월 5일 |
請 坐殿時樂備始終疏 | 전정의 예배에 왕이 의자에 앉고 설 때에 악을 시종 연주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21일 |
請石磬備造前姑用瓦磬疏 | 석경을 갖추기 전까지 잠시 동안 와경을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笙匏依本制疏 | 생황의 재료인 박을 본래의 제도에 의거해 만들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加造方響疏 | 방향을 추가로 더 만들어야 한다는 상소 | 세종 13년 12월 25일 |
請改造塤制疏 | 훈을 옛 제도에 따라 바르게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改正祝制疏 | 축을 옛 제도에 따라 바르게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樂懸復古制疏 | 악현을 옛 제도대로 복수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舞佾依古制疏 | 일무를 옛 제도에 따르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擇登歌人疏 | 등가에 노래하는 사람을 가려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武舞人勿雜以刑官之人疏 | 무무를 추는 사람 중 형관을 지낸 사람을 섞어 사용하지 말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用華樂及我 朝歌曲疏 | 당악을 화악속부로 고치고 아울러 우리나라의 가곡 가사를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校正雅部樂疏 | 아부의 악을 교정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改正祭樂工人服飾疏 | 제사 때 입는 악곡의 복식을 개정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陶造土缶疏 | 토부의 악기를 분원에서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備造大鼓疏 | 대고를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易換雷鼓靈鼓疏 | 뇌고와 영고를 바꾸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改正雷鼓靈鼓路鼓之制疏 | 뇌고 영고 노고의 제도를 바로잡자는 상소 | 세종 23년 1월 6일 |
請堂上之樂用拊疏 | 당부의 악애 부를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改造竹牘疏 | 대나무로 만든 독이란 악기를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改造建鼓疏 | 건고를 고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豫備樂架疏 | 악가를 미리 설비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21일 |
請管絃之工幷許除職疏 | 관현의 음악을 맡은 악공에게 벼슬을 주자는 상소 | 세종 13년 12월 25일 |
請堂下加設琴瑟歌工疏 | 당하에 금슬과 노래하는 공인을 설치하자는 상소 | 세종 14년 9월 3일 |
請 宗廟樂改用六句黃鍾疏 | 종묘악에 6구 황종을 고쳐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5년 1월 9일 |
請用軒架依古制疏 | 헌가의 악을 옛 제도에 따라 사용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21일 |
請 校正鍾磬疏 | 종경의 소리를 올바르게 교정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備鑄編鍾疏 | 편종을 주조하자는 상소 | 세종 12년 2월 19일 |
請使臣宴享勿用女樂疏 | 사신연향에 여악을 사용하지 말자는 상소 | 문종 즉위년,1450) 11월 22일 |
請復設歌童疏 | 다시금 가동을 설치하자는 상소 | 문종 즉위년(1450) 11월 22일 |
請印行樂譜疏 | 악보를 간행하자는 상소 | 문종 즉위년(1450) 11월 22일 |
위의 『난계선생유고』 소 39편은 대부분 『조선왕조실록』에 수록된 것으로, 선생이 상소를 올리기 전에 작성한 초간본으로 이해된다. 다만 『유고』의 상소 중에는 『조선왕조실록』에는 없는 「청반행가예소학삼강행실훈민오음소(請頒行家禮小學三綱行實訓民五音疏)」 「請修 조하예급금용여악소(請修 朝賀禮及禁用女樂疏)」 「청정 묘조정악소(請定 廟朝正樂疏)」 3편이 더 들어 있으며, 나머지 상소는 주로 『조선왕조실록』 1430년(세종 12) 2월 19일자에 22건이 집중되어 있으나, 1426년(세종 8) 4월 25일에서 1450년(문종 즉위년) 11월 22일까지의 내용이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먼저 『난계선생유고』 소 중에는 제사음악 관련 글이 모두 11건 수록되어 있는데, “종묘와 조회에 올바른 음악을 제정하자. 「청정묘조정악소(請定廟朝正樂疏)」”와 “제향에 사용되는 아악의 악조를 바로잡자. 「청제향악성고비소(請祭享樂成告備疏)」”를 비롯해 9건이 더 수록되어 있다. 모두 제향악과 관련하여, 종묘악을 정비해야 할 당위성과 이전의 제향악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주례』 「춘관」에 의거하여 등가 헌가에 주나라 6합 제도에 따라 악조를 바로 잡고, 종묘를 비롯한 여러 제향음악에 악장․무절․음율․악조․복식․악기 등을 올바로 제정하자는 내용이다. 또한, 조회음악은 “조하의 의례를 개수하고 아울러 여악의 사용을 금지하자 「청수조하례급금용여악소(請修朝賀禮及禁用女樂疏)」,” “조하의 악률을 바로잡자 「청정조하악률소(請正朝賀樂律疏)」” 등의 상소에서 조회와 회례음악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낱낱이 전달하고 있다. 이 외에 「청생포의본제소(請笙匏依本制疏)」, 「청개조훈제소(請改造塤制疏)」, 「청개정축제소(請改正柷制疏)」 등 1430년(세종 12)에 올린 일련의 상소는 대부분 악기의 제작을 건의하는 상소로서, 생(笙), 훈(塤), 축(柷), 부(缶), 대고(大鼓), 독(牘), 건고(建鼓), 편종(編鐘), 편경(編磬), 방향(方響) 등의 악기를 『주례』와 송대의 진양이 지은 『악서』 등의 기록에 의거하여 제작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율관제작에 심혈을 기우린다. 율관은 음(音)의 표준이 되는 관(管)을 말하는데, 율관에는 12율려에 따른 12율관이 있다. 이 12율관은 기본이 되는 황종관을 정하고 이를 삼분손익법(三分損益法)에 의해 나머지 율관을 얻는 방식인데, 선생은 세 차례의 율관 제작을 시도한다. 1차는 1425년, 2차는 1427년, 3차는 1430년에 시도 하지만, 세 차례의 실패 후, 그는 자연산 기장[秬黍] 대신에 밀랍(蜜蠟)으로 빚어 만든 인조(人造) 기장으로 황종율관을 제작하여 그 악기제작의 뜻을 이룬다. 이외에도 선생이 강조한 악서편찬은 성종조에 이르러 『악학궤범』 완성으로 이어져 음악자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었다.
둘째, 잡저에 실려 있는 조하의절이다. 본래 조하는 ‘조회(朝會)와 경하(慶賀)’의 말을 함께 올리는 의례를 말한다. '조현봉하(朝見奉賀)'의 약칭인데, 달리 조회라고 한다. 따라서 조회에는 대조회와 소조회가 있다. 대조회는 동지와 정조 및 성절일(聖節日)을 맞아 행하는 망궐례로 삼대조회(三大朝會)라 하고, 이외에 황제의 영조칙서(迎詔勅書)를 맞고 보낼 때, 임금의 즉위, 탄일 따위의 경축일에 신하들이 조정에 나아가 국왕에게 하례를 드리는 일을 말한다. 또 소조회는 시사(視事)와 경연(經筵)이 있다. 시사에는 상참, 조참, 차대, 인견 등의 의례절차가 있다. 그러므로 매달 초5일, 11일, 21일, 25일에 모이는 조참 조회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소조회에는 음악이 사용되지 않는 반면에 동지, 정조, 성탄일에 거행하는 대조회에는 의례에 걸 맞는 의절과 음악이 장엄하게 갖추어진다. 이외에도 설날과 동지에 내명부와 외명부가 왕비께 하례를 올리는 중궁정지명부조하의(中宮正至命婦朝賀儀)와 하례 의식을 마친 내, 외명부들을 위해 왕비가 베푸는 중궁정지회명부의(中宮正至會命婦儀) 등 왕비가 내전에서 행했던 조하의례 절차와 음악이 따로 연주된다.
그런데 『유고』 잡저에는 1431년(세종 13) 3월 16일자에 “예조에서 탄일에 왕세자의 조하를 받는 의절, 군신의 조하를 받는 의식을 아뢴” 대동소이한 내용의 왕세자 조하의절과 군신 조하의절 두 편의 의례절차를 수록하고 있다. 이는 동지, 정조, 성탄일에 거행하는 대조회의 의절과 음악 쓰임을 살필 수 있는 내용으로, 선생이 올린 상소를 예조에서 논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잡저에 실려 있는 가훈 17칙이다. 가훈은 선생이 계유정난의 피회를 당하여 고산으로 귀향 가, 1455년(세조 1) 7월 일흔여덟 살에 유배지에서 후손에게 남긴 글이다. 후일 후손 박사량이 가훈만을 따로 수습하여 1745년(영조 21)에 도암(陶菴) 이재(李縡, 1680~1746)의 서문을 덧붙여 간행한다. 내용은 후손에게 효제충신의 가르침을 통하여 근검하고 청렴하며 치가의 도학정신을 실천궁행하는 교훈을 남겨 주고 있다. 이것을 정리하면 다음 <표 4>와 같다.
순번 | 주요 내용 | 비고 |
---|---|---|
1. | 생후 3〜4세가 되면 학업에 힘쓰게 하라. | 치가 |
2. | 형제, 친족 간에 후덕하게 하라. | |
3. | 가정에서 처신은 화평하고 유순하게 하라. | |
4. | 아내가 죽고 재취할 경우 전후실의 아들 다툼을 경계하라. | |
5. | 후사가 양자할 경우 반드시 본종(本宗)에서 양자하라. | |
6. | 집안 일가들 중에 가난하여 출가가 늦거든 서로 도와라. | |
7. | 상례와 장례는 《주자가례》를 따르도록 하라. | |
8. | 부모의 장사 지내는 일과 삼년상을 치르는 일은 유가의 법을 따르라. | |
9. | 효도, 충성, 신의, 예의, 염치를 가정의 법을 삼고, 착한 일을 하라. | |
10. | 가정에서는 삼현 가무를 가르치거나 소리 내지 마라. | |
11. | 매나 개를 기르고 사냥하는 것을 삼가 하라. | |
12. | 입고 화와 복의 출입구이니 항상 조심하라. | |
13. | 집안 일가나 친구의 소첩 집에는 경솔히 드나들지 마라. | |
14. | 여색은 명예와 절조에 관계되는 것이니 신중히 하라. | |
15. | 연희나 환락 장소에 오래 머물지 말라. | |
16. | 사헌부의 재판을 맡거든 신중하고 특별히 사족의 일은 말조심하라. | 근신 |
17. | 청렴하고 소박하게 하라. | 청렴 |
『난계선생유고』는 조선 전기의 음악과 이론, 사상을 총체적으로 망라하고 있다. 제례음악, 회례음악, 조회음악, 율관제작, 악기제작, 악보간행 이외에 악현, 복식, 일무, 노래 등 궁중의식 전반에 걸쳐 그 음악정비의 당위성과 필요성을 비교적 소상히 밝히고 있다. 이는 세종조 악학정비 아악부흥이란 위대한 업적으로 칭송되고 있으며, 예악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세종대왕의 ‘나라 만들기’ 사업에 기여했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세종은 국가 의례를 길례·가례·빈례·군례·흉례 순으로 된 오례 체제를 갖추고, 이에 걸맞는 음악정비에 선생은 길례, 빈례, 가례에 소용될 악기제작과 의절정비에 크게 기여했기 때문이다. 특히, 길례에 속하는 제례음악과 가례에 속하는 조회(朝會)음악에 따른 아악 완성의 업적은 동방의 기(夔)라고 칭송 될 만큼, 우리나라를 넘어 동아시아의 음악 지형을 가늠하는 사료적 가치로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선생의 길례 제례음악과 가례 조회음악 정비를 중심으로 그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례음악 정비이다. 선생에게 제사음악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래로 제사는 공경(恭敬)을 으뜸으로 하지만, 제사를 보면 당시의 정치와 인간의 바른 윤리(倫理)를 가늠할 수 있고, 음악은 신과 사람을 소통하게 하며, 선조의 공덕을 노래하고 칭송하는 유교의 이상적 치세지음(治世之音)을 대변했다. 이는 유교를 국시(國是)로 하고, 예악을 근본으로 새 왕조의 근본을 바로 세우는 일이기 때문에 지극히 중요한 부분이었다. 그런데 조선 초기 제례음악은 노래(樂章)․일무(佾舞)․음악(音樂)․악현(樂懸)․복식(服飾)․의물(儀物)․악기(樂器)․의식절차(儀式節次) 등 제향음악으로써 기능을 두루 갖추지 못해 형식적이고 허술한 부분이 많았다.이러한 제사음악의 정비는 1394년(태조3) 8월에 예조에서 올린 계문(啓文)을 필두로 논의가 지속되었는데, 1426년(세종 8)부터 1430년(세종 12) 사이에 집중적으로 살펴진다. 주로 ① 원구의 제사제도를 회복하자, ② 제사 악장을 일신하고자, ③ 복식과 의물 그리고 제사의식 절차 등에 당․송의 제도에 때라 제정하자, ④ 명나라로부터 악기를 들여와 종묘에 사용하자, ⑤ 아악과 당악을 개정하여 종묘와 조회, 연향에 쓰자는 등의 논의로 요약된다. 더욱이 제사음악 정비는 1423년(세종 5) 7월 24일 황해도 옹진현 수군 이철(李哲)의 텃밭에서 거서를 발견한 이래, 1425년(세종 7) 가을에는 각도의 관아에서 거서 14석 12두를 심어 264석을 수확하여 율관제작에 토대를 마련한다. 또 이듬해 1426년(세종 8) 봄에는 경기도 남양에서 맑고 아름다운 옥돌이 발견되어 편경제작에 새 국면을 맞으면서 제례․조회․회례․연향에 필요한 악기제작에 활기를 띄었다. 선생은 1426년(세종8) 가을부터 1428년(세종10) 여름까지 남양의 옥돌을 깎아 종묘를 비롯해 여러 제사에 사용되는 편경과 등가의 특경을 이루었는데 모두 528매였다고 한다. 따라서 선생의 제사음악 정비는 1430년(세종12) 윤12월 1일 선생에 의해 『아악보』의 완성으로 일단락 매듭지어진다. 다만 여기에서는 자못 넓은 제례음악의 범주를 다 다루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문화의 황금기라 할 수 있는 세종조의 제례음악 정비를 이룬 셈이다.
둘째, 조회음악 정비이다. 1402년(태종2) 6월 5일 예조에서 의례상정소제조(儀禮詳定所提調)와 더불어 “조회와 연향에 풍아(風雅)의 시(詩)를 참고로 하여 음악을 제정하자”는 논의 이후로, 비로소 1409년(태종 9) 4월 7일에 아악과 전악의 천전법(遷轉法)을 정하면서 조회와 연향에 모두 아악을 쓰도록 논의하고, 이어서 세종조에 이르러 선생에 의해 조회아악의 필요성이 점차 가시화되면서, 1427년(세종 9) 5월 15일 선생에 의해 한 틀에 12개 달린 편경을 새로 만든 이후로, 1430년(세종 12) 7월 30일에는 악학제조 유사눌이 새로 조회악기를 제작하고, 또 그해 10월 2일에 악학 별좌(樂學別坐) 상호군(上護軍) 남급(南汲)이 조회에서 사용할 헌가 악기를 만들었다. 1430년(세종 12) 9월 21일 예조에서 상정소와 더불어 선생이 조회에 쓸 음악에 관한 일을 함께 의논하여 아뢴 글을 보면, 선생의 조회음악에 대한 폭넓은 식견을 알 수 있다. 선생은 조회음악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주장하고 있다. ① 매달 초1일, 16일 두 차례는 조회에는 아악을 사용하고, 그 나머지 네 차례는 속악을 써 왔는데, 중국의 문헌기록에 의하여 모두 조회에 아악을 사용하자. ② 당상 당하에 악기를 설치하고, 연습과 악공 선발의 방안을 들고 있다. ③ 음악의 시작과 끝을 잘 하자. ④ 조회음악에 있어서 당상 당하의 음악을 일시 연주하자는 주장을, 『진씨 예서(陳氏禮書)』의 조하(朝賀) 의절을 따르자. ⑤ 조회음악의 악조 사용을 수월용조(隨月用律)로 하자. ⑥ 조회악기의 가자[틀]를 잘 관리하자. ⑦ 조회악기 가자 제작에 필요한 목재를 때에 맞추어 구입하자. ⑧ 조회 악기에 악기 감조색(樂器監造色)를 설치하여 악기를 장식하자. ⑩ 조회 음악을 연주하는 악공의 복식과 의례절차, 악현, 악궁사용하자. 등의 논의가 다방면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듬해 1431년(세종 13) 3월 16일 “예조에서 탄일에 왕세자의 조하를 받는 의절, 군신의 조하를 받는 의식을 아뢴 글”에서 조회의절까지 정비한 이후, 1433년(세종 15) 1월 1일에 “근정전 회례연에 융안지악, 서안지악, 휴안지악, 문명지곡 등 새로운 아악을 연주한다. 하지만, 옛 제도와 달라 정정 거듭한다.
지금까지 『난계선생유고』의 유래·내용·특징 및 의미를 살펴보았다. 하지만, 『난계선생유고』가 어언 200여 년 전에 시대적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간행되고, 이것을 1993년 국립국악원에서 한국음악학술총서2로 역주한 이래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선생의 음악업적 또한 많은 연구가 이루어져 있고, 또 『조선왕조실록』을 통하여 선생의 유작으로 추정되는 자료를 다수 살필 수 있고, 선생의 작품으로 밝혀진 시문도 4수가 더 발견된 만큼, 선생의 『유고』를 증보할 필요성을 느낀다. 일명 『증보난계선생유고』를 간행하여 선생의 업적이 동양 음악학 발전에 우뚝하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증보난계선생유고』에 보충 될 상소 내용을 대략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1. 請印行樂書樂譜疏 (세종 7년 2월 24일, 단종 1년 6월 23일)
2. 請軒架用簫管疏 (세종 8년 1월 10일)
3. 請正祀享樂章疏 (세종 8년 4월 25일)
4. 請正佾舞制疏 (세종 12년 2월 19일)
5. 請造壇風雲雷雨山川城隍疏 (세종 12년 2월 19일)
6. 請壇勿入牛羊疏 (세종 12년 2월 19일)
7. 請壇堂上堂下位分疏 (세종 12년 2월 19일)
8. 請設望遼疏 (세종 12년 2월 19일)
9. 請設祭享祠堂疏 (세종 12년 2월 19일)
10. 請修會禮及男樂官服疏 (세종 13년 8월 9일)
11. 請設宗廟功臣堂疏 (세종 14년 1월 21일)
12. 請定會禮樂章疏 (세종 14년 5월 7일)
13. 請加文武舞歌詞疏 (세종 14년 10월 18일)
14. 請定祭享官服疏 (세종 15년 1월 7일)
15. 請祭壇監造色疏 (세종 20년 11월 13일)
16. 請祭享祭物豫備疏 (세종 20년 12월 24일)
17. 請修壇廟疏 (문종 원년 11월 22일)
18. 請校正鍾磬疏 (문종 1년 4월10일)
『국조보감』 『조선왕조실록』 『문헌공난계박연선생문집』 『난계선생유고』 『국조오례의』 『오례의』 『의례경전통해시악』 『조선경국전』 『진씨예서』 『춘관통고』 1. 김세종·권오성 역주, 『난계선생유고』 서울:국립국악원, 1993 성경린.《세종시대의 음악》 서울:세종대왕기념 사업회, 1985 2. 『악성 난계선생』 제1집, 영동:난계기념사업회, 1994 3. 송망송, “세종대왕의 음악업적에 대한 역사적 재조명-21세기를 앞두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세종대왕탄신 600돌 기념학술대회), 서울: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97 4. 송혜진, “세종조 음악문화를 통해 본 현대 국악의 미래” 『세종대시대 문화의 현대적 의미』 성남: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8 5. 이장원, “관직으로 본 난계 박연의 음악 업적 연구-난계의 관직생활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제67집, 2020. 6. 이재숙외.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7.이혜구, “세종조 음악문화의 현대사적 재인식 『세종조문화의 재인식』, 성남: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4) 8. 이혜구, 『한국음악논집』, 서울:세광음악출판사, 1985 9. 이혜구, “박연의 율관제작의 년대,” 『한국음악논총』 289〜301쪽, 10. 장사훈, 『세종조음악연구』, 서울:서울대출판부, 1982 11. 한만영, “세종의 음악적 업적” 『세종조문화의 재인식』, 성남: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1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朝鮮王朝實錄音樂記事資料集(1)』 1996.
김세종(金世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