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원 거문고
강포(江浦) 유홍원(柳弘源, 1716~1779)의 거문고로, 1726년 양양 낙산사 이화정(梨花亭)에 서 있던 오동나무를 얻어 만들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14호인 이 거문고는 강포(江浦) 유홍원(柳弘源, 1716~1779)의 유품 중 하나이다. 거문고 앞판 뒷면의 명문에 의하여 1726년 양양 낙산사 이화정에 있는 오동나무로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유홍원의 거문고를 양양금이라고 한 것은 양양의 지명을 차용한 것이다.
거문고 뒷판에는 유홍원이 쓴 〈제금관(題琴款)〉의 시가 초서로 새겨져 있다. 가로 162cm, 너비 20.7cm의 거문고이다. 강포 유홍원의 거문고는 거문고 고악보인 『어은보(漁隱譜)』와 함께 전승 보관되어 있다.
강포(江浦) 유홍원(柳弘源, 1716~1779)은 조선 숙종조 양양군수와 순천부사를 지낸 함벽당(函碧堂) 류경시(柳敬時)의 손자이다. 저서로는 『강포문집(江浦文集)』 3권 1책이 전하며 그 중에 〈제금관(題琴款)〉이 수록되어 있다. 거문고에도 뛰어나 세금을 받으러 왔던 관리가 거문고 소리에 반한 사연을 부사(府使)한테 말해 세금을 면제받기도 하였다는 일화가 있다. 양양금 앞판 후면에 이 거문고의 제작 연대와 내력을 알 수 있는 묵서한 기록이 다음과 같이 있다. 「材則此邑北隅洛山寺 梨花亭 所立桐也 未知其 幾百年而人皆以琴稱之 歲丁酉仲春爲風所拔故余始得 雍正四年丙午十二月日自造傳之無限」 이 기록으로 보아 양양금은 낙산사(洛山寺) 이화정(梨花亭)에 서 있던 오동나무를 정유 중춘(1717년 2월)에 얻어 옹정 4년 병오 12월(1726년 12월)에 드디어 거문고 모습을 갖추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 규격
길이 162cm, 너비 20.7cm
○ 소장처
한국국악진흥원 소장
○ 제작 연대 및 제작자 사항
양양금의 앞판 뒷면의 명문에 의하면 1726년 양양 낙산사 이화정에 있는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다.
○ 구성 및 내용
양양금은 악기 체계의 기본인 앞판의 좌단(坐團), 현침(絃枕), 대모(玳瑁), 학슬(鶴膝), 봉미(鳳尾)와 뒷판의 3개의 울림구멍(共鳴口), 운족(雲足)이 모두 갖추어져 있다. 앞판은 오동나무, 뒷판은 밤나무이다. 원래의 줄은 없으며 괘 16개와 안족 2개, 돌괘 1개만이 원래의 것이다.
2011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립국악원 개원 60주년 기념 특별전’에 출품될 당시에 새롭게 보수되었다.
유홍원의 거문고 뒷판에는 유홍이 쓴 〈제금관(題琴款)〉이 초서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다.
녹기금백아심(綠綺琴伯牙心) 종자시지음(鍾子始知音)
녹기금에 백아의 마음 종자기가 비로서 그 음악을 통해 알았네
일고복일음(一鼓復一吟) 냉냉허뢰(冷冷虛籟) 기요잠(起遙岑)
거문고 연주마다 탄식으로 돌아오니, 냉냉한 허공 속의 소리 먼 봉우리까지 들리네
영롱석상동일고일음(玲瓏石上桐一鼓一音)
영롱한 바위 위 오동 거문고 연주마다 탄식이 절로 나네
오십춘당시(五十春當時) 종자기(鍾子棄)
오십아이에 이르러 종자기가 떠나버리니
아거옥진금휘(我去玉軫金徽) 생소진(生素塵)
나도 거문고를 버려 흰 먼지만 이네
양춘백운광릉산(陽春白雲廣陵山) 상기(倘寄) 봉래산수인(蓬萊山水人)
정월에 흰눈이 광릉에 흩어지니, 급히 봉래산 수인에게 보내네
강포(江浦) 유홍원(柳弘源, 1716~1779)의 유물인 양양금은 1726년 양양 낙산사 이화정에 있는 오동나무로 만든 것이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거문고 유물 가운데 유일하게 이 거문고와 관련 있는 고악보 『어은보(漁隱譜)』와 함께 전승되고 있다.
양양금: 경상북도 유명문화재 제314호(1999)
국립국악원, 『우리악기, 우리음악』, 국립국악원, 2011.
주재근(朱宰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