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무(僧眞舞), 승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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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 성진(性眞)과 팔선녀(八仙女)를 모티프로 창작되어 기생들이 추었던 춤 작품
소설 『구운몽(九雲夢)』의 등장인물인 성진(性眞)과 팔선녀(八仙女)를 모티프로 하며, 1908년에 광무대 공연에서 초연되었다. 1910년대에 기생들이 추었으며, 성진 1인이 추거나 성진과 팔선녀의 9인이 추어도 성진무라고 하였다. 19세기 중순에 무동이 행하던 놀이가 20세기 초에 기생들의 레파토리로 작품화되었다. 극장을 통해서 진행된 전통춤 근대화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성진무라는 명칭으로 추어진 시기는 20세기 초지만, 그 유래는 19세기 중반이다. 경복궁 중건(1865~1867)에 부역한 인부들을 위로하기 위해 1865년에 연행된 연희들이 『기완별록(奇玩別錄)』에 실렸는데, 그중 성진과 팔선녀가 등장하는 놀이들이 있었다. 성진과 팔선녀는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의 소설 『구운몽』에 등장하는 인물로, 육관대사의 제자 성진이 꿈속에서 8명의 여인을 만나고 부귀와 영화를 누리다가 꿈에서 깨어나보니, 이는 일장춘몽이었음을 깨닫고, 팔선녀와 함께 죄를 뉘우치고 불법에 귀의한다는 내용이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에 크게 유행하여 민화로 다양하게 그려졌고, 연희의 소재가 되어 연행물로도 표현되었다. 『기완별록』에 의하면 3개의 놀이에 성진과 팔선녀가 등장했다. 첫 번째 팔선녀놀이는 팔선녀와 성진의 행렬을 보여주었고, 두 번째 금강산놀이는 산대처럼 가짜 금강산[假山]을 만들어 팔선녀를 세우고 가장자리에는 묵묵히 서있는 성진을 연출했다. 세 번째 팔선녀놀이는 팔선녀의 복색은 특색 없고 성진이 홍살문에 매단 북을 요란하게 치는 놀이이다. 모두 가장행렬처럼 인물들이 복색을 차려 입고 등장해서 성진과 팔선녀의 거동과 태도를 본뜬 놀이이다.
○ 역사 변천 과정
성진무라는 명칭으로 처음 추어진 공연은 1908년 5월 동대문에 있는 광무대 기획공연이었다. 이때 승무와 함께 성진무(性眞舞)가 올려졌고, 같은 해 8월에 순종황제 즉위기념 ‘경회루 연향’ 때에도 성진무(聖眞舞)가 추어졌다. 이때의 성진무가 호응을 얻었기 때문인지, 1912년 4월에 단성사에서 롱선이 승진무를 추었고, 춘계대운동회에서도 승진무가 추어졌다. 그해 5월에는 단성사의 ‘강선루’ 기획공연에서 <승진무(僧眞舞)>라는 제목으로 8명, 또는 9명의 기생이 춤추었다. 8명이 출연할 때는 팔선녀만 출연하고, 9명이 출연할 때는 성진과 팔선녀가 추었던 것이다. 9명은 시곡기생(신창기생조합의 전신)의 롱선, 련, 금홍, 경, 련심, 금선, 초선, 련화, 련향이었다. ‘강선루’ 공연 중에 팔선무(八仙舞), 팔선녀무(八仙女舞)라는 제목으로도 소개되었다. 조선 말기까지 소설 『구운몽』을 모티브로 한 그림, 연희, 탈춤이 만들어졌었고, 이러한 선행 연희물들과 구운몽의 서사를 바탕으로 20세기 초에 성진무라는 춤이 만들어진 것이다.
1914년에는 신창기생조합이 개최한 일본 동북지방이재민의연연주회에서 성진무를 추었고, 1915년 9월에 개최된 시정오년기념조선물산공진회의 조선연극장 야간공연에서도 성진무가 추어졌다. 성진무는 꾸준히 인기 있는 춤이었다. 그리고 1917년 11월에는 한남권번이 성진무를 <구운몽연의(九雲夢演義)>로 재구성했다. 구운몽에 나오는 여러 인물들을 직접 등장시켜 일종의 무용극으로 꾸몄던 것이다. 1923년 평양전차개통식의 여흥에서 평양 기생이 행한 20여종의 연예물 중에 <구운몽>도 있었다.
성진무의 배경은 소설 『구운몽』이다. 이 소설은 조선후기에 민간에서 대중적으로 회자되었으며, 인생무상과 불법에 귀의하는 주제가 독자들에게 크게 공감되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그림으로 그려지고, 가장놀이나 탈춤으로도 묘사되었다. 육관대사와 성진과 팔선녀가 펼치는 서사가 작품화하기에 좋은 소재였기 때문이다. 성진무의 초연은 1908년 광무대 기획공연이었다. 광무대가 흥행을 위해 새롭게 창작한 지구무, 이화무, 시사무, 전기광무와 함께 추어졌고, 이 춤은 1910년대에도 꾸준히 추어졌으며, ‘구운몽연의’로 확대하여 재구성되기도 했다. 무동이 행한던 놀이가 20세기 초에 기생들의 레파토리로 작품화되고 재구성된 것이다. 이는 20세기 초에 극장을 통해서 진행된 전통춤 근대화의 과정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기완별록(奇玩別錄)』에서 “홍ᄉᆞᆯ문에 북을 달고 셩진(性眞)이가 법고(法鼓)치ᄂᆡ / 져 셩진이 거동 보소 장ᄉᆞᆷ(長衫) ᄉᆞᄆᆡ 졋쳐 ᄆᆡ고 / 두 손에 북ᄎᆡ 쥐고 어즈러디 두다릴 제”라는 내용은 성진이 법고 치는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이는 승무의 유래설 중에 ‘성진무설(性眞舞說)’의 주요한 근거라 하겠다.
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