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함(북한, 고문헌)
한국 전통음악에 사용됐던 관악기 중 가로로 부는 형태의 관악기이다. 대나무(주로 쌍골죽)로 만들며, 입으로 입김을 불어 넣는 취구(吹口) 1개와 손가락으로 막는 지공(指孔) 6개, 악기를 제작할 때 음정을 조절하기 위한 칠성공(七星孔) 1개 또는 2개로 구성된 악기이다. 1940년대까지 연주된 것으로 보이나 이후 실전된 악기이다. 현재 국립국악원에 악기 실물이 소장되어 있다.
중금은 대금, 소금과 같은 한반도의 가로로 부는 관악기(횡적, 橫笛)류의 악기와 기원을 공유한다. 한반도의 관악기는 신석기 시대부터 유물이 나타나며 이 후 뼈, 대나무, 나무, 옥, 철, 도기(陶器)등 다양한 재료로 제작되었다. 그 중 대나무를 재료로 한 가로로 부는 죽적(竹笛)이 대금, 중금, 소금으로 정리되어 현재까지 전승되었다. 이 중 대금과 소금은 현재까지 연주되고 있으며, 중금은 1930~1940년대 이후로 연주되지 않는다.
중금이라는 명칭의 최초 기록은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권32 「잡지(雜志)」 중 ‘신라악’(新羅樂)에 관한 설명 중에 나타난다.
신라악에는 삼죽과 삼현, 박판, 대고, 노래와 춤이 있다. 춤은 2인이 추는데, 그들은 방각복두를 쓰고, 자색 큰소매의 예복을 입고, 홍색 가죽 띠의 도금 장식 요대에 오피화를 신었다. 삼현은 첫째 거문고이고, 둘째 가야금이며, 셋째 비파이다. 삼죽은 첫째 대금이고, 둘째 중금이며, 셋째 소금이다. (新羅樂 三竹三鉉拍板大鼓歌舞 舞 二人 放角幞頭紫大袖公襴紅鞓鍍金銙腰帶烏皮靴 三絃 一玄琴 二加耶琴, 三琵琶 三竹 一大笒 二中笒 三小笒.)
『삼국사기』가 편찬된 고려 시대에 신라의 삼죽(三竹)과 중국에서 유래한 가로저인 당적(唐笛)은 구분되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중금은 대금, 소금과 함께 삼국시대 이전부터 한반도에서 전승되던 가로로 부는 관악기 형태의 악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사』권71 속악조의 중금 기록을 보면 중금은 열 세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대금과 동일한 구조를 가진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고려사』 권72 「식화지」에 따르면 1076년(문종 30) 대악관현방 소속 송나라의 교방악사 중 중금업사(中笒業師)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업사’란 고려 시대 악공을 일컫는 말로 당시 중금이 중요한 악기로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 권71 한림별곡(翰林別曲)을 보면 ‘아양의 금과 문탁의 적, 종무의 중금, 대어향과 옥기향의 쌍가야금, 금선의 비파와 종지의 해금, 설원의 장고, 아아! 밤을 지새우는 풍경이 어떠하겠습니까?(阿陽 琴 文卓 笛 宗武 中笒 帶御香 玉肌香 雙伽倻琴 金善 琵琶 宗智 嵆琴 薛原 杖鼓 偉過夜景何如)’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고려시대 선비의 풍류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제현(李齊賢)의 『익재난고(益齋亂藁)』권4의 시 중에는 홍규가 묘련사의 무외국사가 적(笛)을 잘분다는 이야기를 듣고 중금을 들고 찾아가 곡을 청한 내용이 나타난다.(洪南陽奎 聞妙蓮無畏國師善吹笛 自袖中笒 入方丈請之 國師爲作數弄) 이처럼 중금은 고려시대 궁중 외에 민간에서도 연주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중금은 중요한 악기로 사용되었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기록에는 종묘제향에 사용되는 종묘헌가(宗廟軒架)와 궁중의례나 연회에 사용되는 전정헌가(殿庭軒架)의 악현(악기배치)에 모두 중금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악학궤범』(1493)의 기록을 보면 당시 종묘헌가(宗廟軒架)에는 중금이 포함되어 있으나 전정헌가(殿庭軒架)에는 중금이 제외되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적어도 궁중의례 음악에 있어서 중금의 활용도는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중금의 구조에 관한 기록도 보이는데 『세종실록』 권132 가례서례(嘉禮序例) 악기조를 보면 대적(大笛)으로 소개된 대금의 그림이 있다. 이 그림에 묘사된 대금은 열 세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어 『고려사』에 소개된 대금의 설명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고려사』에 중금 또한 열 세 개의 구멍을 가지고 있다고 하였으니 『세종실록』에 소개된 대금의 구조와 거의 동일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악학궤범』 권7의 향부악기 대금 설명 중 중금은 “제도 및 악보가 대금과 같다(中笒小笒制及譜同)”고 설명되어 있다. 이를 보면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 이르기까지 중금의 형태와 구조는 대금과 거의 동일한 형태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후에도 중금은 종묘제례에 꾸준히 사용되어 온 것으로 보인다. 숙종대의 『종묘의궤(宗廟儀軌)』의 종묘 헌가를 보면 중금이 기록되어 있으며 중금 연주자가 태평소를 겸하여 연주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후 대한제국기의『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다시 중금이 종묘헌가에 포함되어 나타난다. 또한 당시 중금이 종묘제례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1898년 7월 15일 의정부찬정탁지부대신(議政府贊政度支部大臣) 민영기(閔泳綺, 1858~1927)가 작성한 문서인 ‘궁내부소관경효전악기조성비 예산외지출청의서(宮內府所管景孝殿樂器造成費 預算外支出請議書)’를 보면 당시 명성황후의 신위를 모신 경효전(景孝殿)에 사용하기 위해 제작한 악기 중에 중금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일제강점기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의 『악리(樂理)ㆍ악제(惡制)』(1930년대) 중 아악부연혁(雅樂部沿革)의 기록을 보면 당시 중금이 전공악기가 아닌 보통악기로 분류되어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다른 악기를 연주하는 연주자가 겸해서 연주하는 악기로 명맥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악리(樂理)ㆍ악제(惡制)』 중 제례악진열도에는 중금이 포함되어 있지 않아 당시 이 시기부터 점차 제례에 사용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선아악기사진첩 건(朝鮮雅樂器寫眞帖 乾)』(1927~1930), 『조선악기편(朝鮮樂器編)』(1933), 『조선아악기해설(朝鮮雅樂器解說)』(1935), 『조선아악기사진첩(朝鮮雅樂器寫眞帖)』(1935), 『이왕가악기(李王家樂器)』(1939)와 같은 일제강점기 시기 문헌에 중금에 관한 설명이나 사진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전공악기는 아니지만 중요한 궁중악기로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명맥을 유지했던 중금은 일제강점기 이후 점차 연주되지 않게 되면서 실전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중금의 형태는 점차 변화하여 현재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는 형태에 이르렀다. 국립국악원에 소장되어 있는 중금은 청공이 없는 취구 한 개, 지공 여섯 개, 칠성공 한 개의 여덟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남아있다. 언제 그 형태가 변화한 것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조선아악기사진첩 건(朝鮮雅樂器寫眞帖 乾)』(1927~1930), 『조선아악기사진첩(朝鮮雅樂器寫眞帖)』(1935)에 사진으로 수록된 중금은 취구 한 개, 청공 한 개, 지공 여섯 개, 칠성공 한 개의 아홉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보인다.(해설상으로는 중금의 청공이 없다고 하지만, 사진상에는 청공의 모습이 보인다.) 반면 『조선악기편(朝鮮樂器編)』(1933), 『이왕가악기(李王家樂器)』(1939)에 그림과 사진으로 남아 있는 중금의 모습은 청공이 없고 취구 한 개와 지공 여섯 개, 칠성공 다섯 개로 열 두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가 보인다. 이렇듯 일제강점기에 중금의 모습은 일정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있으며 현재는 중금을 청공이 없는 취구 한 개, 지공 여섯 개, 칠성공 한 개의 여덟 개의 구멍을 가진 악기로 설명하고 있다.
○ 구조와 형태
중금은 대금과 형태와 재료면에서 큰 차이가 없고 규격에 차이만 있다. 현재 악기로만 남아 있는 중금은 입김을 불어 넣는 취구 한 개와, 지공 여섯 개, 연주에는 사용되지 않고 대금 제작시 음정 조절을 위해 뚫는 칠성공 한 개로 구성되어 있다. 중금의 관대는 자연재료인 대나무로 만든다. 역사적으로는 황죽을 사용했으나 근래에는 대금과 마찬가지로 돌연변이에 일종인 쌍골죽(雙骨竹)을 주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쌍골죽을 쓰는 이유는 대나무의 외벽이 두꺼워서 단단하고, 내경(內徑, 대나무의 빈 부분 안쪽의 벽)을 깎을 때 일정하게 깎기 용이하여 악기를 만들기에 적합하기 때문이다.
중금의 규격은 역사적으로도 유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문헌에는 『악학궤범(樂學軌範)』 이후 대부분 대금과 제도와 악보가 같다는 문구로 중금의 설명을 대체했기 때문에 시대적으로 정해진 규격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시기에 사진으로 남아 있는 중금의 모습도 각각 달라서 『조선아악기사진첩 건(朝鮮雅樂器寫眞帖 乾)』(1927~1930), 『조선아악기사진첩(朝鮮雅樂器寫眞帖)』(1935)에 사진으로 남아있는 중금은 청공을 가지고 있고 그 길이가 짧아 정악대금에 2/3정도의 길이인 반면, 『이왕가악기(李王家樂器)』(1939)에 사진으로 남아있는 중금의 경우 정악대금보다 3~4cm 정도 짧은 편이어서 그 편차가 크다.
○ 음역과 조율법
중금은 현재 연주되지 않는 악기로 현행 음역대를 말할 수 없으나 역사적인 기록을 통해 그 음역과 조율법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조선악기편(朝鮮樂器編)』(1933)과『조선아악기해설(朝鮮雅樂器解說)』(1935)에 중금의 연주법과 연주할 수 있는 음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보통 입김으로 부는 평취(平吹)에서는 황종(黃)에서 무역(無)까지 음정을 낼 수 있었고 세게 부는 역취(力吹)에서는 청황종(潢)에서 청임종(淋)까지 음정을 낼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단 이 악기의 황종이 C인지 E♭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겨레음악대사전』(2012)의 중금 설명에서는 중금의 음역대를 향악계의 황종(E♭)이 아닌 당악계의 황종(C)에 맞춰 설명하고 있는데 약한 입김으로 부는 저취(低吹)로 태주(D4)에서 청황종(C5)까지 음정을 낼 수 있고, 평취에서 청태주(D5)에서 중청황종(C6)까지 낼 수 있으며 역취에서 중청태주(D6)에서 중청임종(G6)까지 낼 수 있는 악기로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을 기준으로 보면 중금은 두 옥타브 반 정도의 음역대를 가진 악기라 할 수 있을 것이며 현행 정악대금보다 완전3도 높은 음역대의 악기(최저음 기준)였다.
○ 연주방법
중금은 현재 연주되는 대금이나 소금과 같은 계통의 악기이므로 연주법은 현행 대금이나 소금의 연주법과 동일했을 것으로 보인다. 단 중금에 따라서 저취의 연주법이 없이 평취와 역취만으로 연주하거나 대금과 통일하게 저취, 평취, 역취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연주악곡
중금은 성종 이전에는 궁중의례 음악에 두루 사용되었던 악기이며 성종 이후 《종묘제례악》의 헌가에 배치되었던 악기로 주로 《종묘제례악》의 연주에 사용되었던 악기이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대금을 연습하기 전에 중금으로 먼저 연습하여 그 연주법을 익혔다고 하였으니 민간에서도 꾸준히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제작 및 관리방법
현재 남아 있는 중금을 보면 대금이나 소금과 마찬가지로 주로 쌍골죽(雙骨竹)을 재료로 제작하였다. 자연 상태의 대나무의 외관을 그대로 두고 최소한으로 가공하여 제작한다. 3년 정도 성장한 쌍골죽 중 4cm 정도의 직경을 가진 개체를 뿌리째 적당한 길이로 잘라 채취한다. 이 뿌리 부분에 취구를 만든다. 이후의 제조과정은 청공을 뚫는 과정을 제외하면 대금과 동일한 제조과정으로 만들어졌다.
중금은 현재 실전되었으나 대금, 소금과 함께 삼국시대부터 연주되었던 신라 삼죽(三竹) 중 하나로 한국 전통음악을 대표하는 가로저의 관악기였으며, 일제강점기까지 전승되어 그 명맥을 유지했던 오랜 역사를 가진 악기였다. 이러한 중금의 역사와 전통은 오랜 기간 전승된 한국 전통음악의 실증적 증거로서 역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국조오례의』 『고려사』 『대한예전』 『삼국사기』 『악학궤범』 『익재난고』 『조선왕조실록』
국립국악원, 『국악기 연구보고서』, 국립국악원, 2008. 국립국악원, 「조선아악기사진첩 건, 조선아악기해설ㆍ사진첩, 이왕가악기」, 『한국음악학학술총서』 10, 국립국악원, 2014. 송방송, 『한겨레음악대사전』 보고사, 2012. 이혜구 역, 『역주 악학궤범』, 민족문화추진회, 1989. 함화진 저ㆍ봉해룡 필사, 『조선악기편』, 193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https://db.history.go.kr/)
홍순욱(洪淳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