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전개된 전통춤을 범주화한 용어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는 1920년대부터 전개된 서양문물에 대응하는 조선 고유의 고전에 대한 인식을 배경으로 형성되었고,1930~1960년대에 주로 사용되었다. 고전무용의 실제는 조선시대로부터 전승된 춤들로, 궁중무와 승무, 검무, 입춤 등의 기녀들이 추었던 춤들과, 농악, 탈춤, 무속춤 등을 지칭했다. 한성준이 주도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1938~1941년의 공연들에 대해 언론들은 고전무용의 정수라고 표현했다. 다만 1950년대에 외형적으로 전통춤과 유사한 최승희 조택원이 양식화한 신무용 계열의 춤들도 한시적으로 포함했다. 고전무용의 용어가 서양문물에 대응하는 조선 고유의 춤들을 지칭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전통무용이라는 용어가 널리 사용되면서 고전무용의 용어는 퇴조하였다.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는 1930년대 초에 등장했으나, 1910년대부터 ‘고전’이라는 용어를 새롭게 조명했던 사회문화적 배경을 갖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고전(古典)의 의미는 옛 규범이나 법도라든가, 지키고 전승된 제도, 규범이 될만한 문헌들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20세기초부터 서양문물이 끊임없이 도입되자, 조선의 문화 전반을 새삼스럽게 인식하면서 지식인들은 조선시대로부터 전승된 고유의 것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를 고전이라 칭하게 되었다. 최남선(崔南善, 1890~1957)이 1922년 조선학을 선언하면서 지식인들은 고전 문헌들을 재조명하기 시작했고, 그는 1927년에 『교간 삼국유사』를 출간했다. 정인보(鄭寅普, 1893~1950)도 『동아일보』에 1931년 1월부터 7월까지 「조선고전해제」를 20회 연재하였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정제두의 『하곡전서』,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홍대용의 『담헌서』, 이중환의 『택리지』, 이이명의 『소재집』, 정조가 어정(御定)한 『무예도보통지』 등을 해제하며, 조선의 고전들을 재인식하고자 했던 것이다. ‘고전적(古典的)’이라는 표현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조선권번의 안금향이 추는 승무를 보고 “고전적인 승무를 추는”(『경성일보』 1925. 7. 9.)이라 표현했으며, 일본궁내성에서는 조선 고래의 악보와 고전음악을 연구할 터이라”(『조선일보』 1926. 2. 26)고 했다. 최승희의 무용에 대해서도 고전적 기분과 환상으로 관중을 도취케 한다고 했다.(『동아일보』 1929. 12. 7.) 이렇게 ‘고전’의 의미는 조선적인, 조선 고유의 것, 전통적이라는 뜻을 갖으며, 서양의 것 또는 현대적인 것과는 다른 상대적인 의미로 통용되었다. 고전에 대한 인식은 1930년대에 고전부흥운동으로 이어졌다. 조선 문화의 고유성을 모색하기 위해 과거의 어문(語文) 뿐만이 아니라 정치ㆍ경제ㆍ력산(曆算)ㆍ수지(水地)ㆍ민속 등의 분야에서 고전(古典)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조선일보』는 1935년에 학예란 특집기사로 「조선 고전문학의 검토」를, 『동아일보』도 「조선문학의 독자성–특질의 구명과 현상의 검토」를 게재했다. 그리고 문학평론가 박치우(朴致祐, 1909~1949)는 1938년에 「고전부흥의 이론과 실제(7)」의 연재에서 “흔히 고전이라면 의례히 문학작품만을 연상하기 쉬운 모양이나 문학작품만이 고전의 전분야를 독차지할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해석에 따라서는 회화도 조각도 음악도 무용도 고전의 세계에 참여할 수 있을 수 있을 것이다.”(『조선일보』 1938.6.14.)라고 했다. 문헌과 같은 문자 텍스트로서 고전 뿐만이 아니라 민속이나 공연예술의 고전도 주목해야 한다고 제기한 것이다. 수입된 서양공연예술들이 일반 대중의 호응을 받는 동안, 조선시대로부터 전승된 고유의 공연예술들이 천대받고 있었으나, 조선학과 고전부흥의 사조에 따라 1930년대에는 전 시대로부터 이어진 조선 예술을 고전예술, 고전무용, 고전음악이라는 용어로 칭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20세기 초반의 사회문화적 흐름을 배경으로 해서 고전무용의 용어와 함께 고전무용의 개념이 생성되고 범주화된 것이다. 고전무용의 실제는 이전 시대로부터 전승된 조선 고유의 춤들이었다.
○ 형성과정 고전무용이라는 용어가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전에 신무용가 최승희와 조택원의 공연을 언급하며 사용되었다. 왜냐하면 이들은 신무용가로서 서양춤을 도입했는데, 조선의 고전무용을 근대식 무용으로 표현하거나, 조선의 고전무용을 새로 개척해보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활동한 박영인도 기회를 보아 조선 고전무용의 연구도 해보겠다고 했다. 이들은 모던댄스를 추는 무용가들로서 조선의 고전무용을 인식하며 이를 소재로 작품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학계와 문화계에서 고전부흥운동이 전개되고 고전무용이 언급되는 중에, 한성준이 1937년에 조직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춤들을 고전무용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조선악과 고전무용은 우리 조선(祖先)의 호흡이 숨어있고 우리의 성품과 감정이 물결치고 있는 것이라고(『조선일보』 1938. 1. 6.) 하면서,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공연을 “조선의 유일한 고전예술인 고전무용의 밤을 가지기로 하였다.”(『조선일보』 1938. 6. 19.)라든가, “오늘밤 춤의 무대는 열린다. 고전무용의 호화판”(『조선일보』 1940. 2. 27.)이라고 소개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춤들을 고전무용의 정수라고 대대적으로 기사화했다.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프로그램은 <승무> <검무> <살풀이춤> <태평무> <상좌무> <사호락유> <급제무> 무극 <한량무> <단가무> <신선악> 등이었다. 이전부터 기생과 재인들이 추면서 전승된 조선 고유의 춤들과, 조선 고유의 춤으로서 고전이라 할만한 춤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작품도 있었다. 이 춤들은 한성준이 19세기 후반에 배웠고, 기생들이 추었던 조선춤들이었다. 최승희와 조택원이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양식화한 신무용과는 차별성이 있었기 때문에 조선음악무용연구회의 춤들을 ‘고전무용’이라 칭했던 것이다.
○ 전개과정 광복 후에도 고전무용의 용어는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8․15기념음악과 무용의 밤’에 “악극과 명창대회 국악원의 남녀 명창 수십명이 민족적 자랑인 정통 고전가무를 피로한다.”(한성일보 1946. 7. 28. 2면)라 했고, 인천 우리예술관 주최로 ‘제 1회 조선고전무용강습회’에서 김보남을 초빙하여 고전무용 해설과 실기를 강습한다고 했다.(대중일보 1947. 7. 17.) 또 김윤학고전무용발표회에서 화랑무와 흥무 등을 공연했다.(동아일보 1949. 5. 16.) 고전예술대제전에 전주 정읍 농악대 동양제일의 줄타기王 김영철군 특별출연 춘향전 등을 선보인다고 했다.(영남일보 1949. 6. 21.) 서양의 공연예술이 아닌 조선 고유의 국악, 전통춤, 연희 등을 고전가무, 고전무용, 고전예술이라고 칭하고 범주화했던 것이다. 그리고 1949년에 문교부가 예술위원회를 설치하면서, 무용분과와 함께 고전예술분과도 구분했다. 여기서 무용분과의 쟝르는 모던댄스ㆍ 발레ㆍ 신무용이었으며, 고전예술분과의 쟝르는 국악ㆍ전통춤ㆍ탈춤ㆍ농악 등의 전통공연예술이었을 것이다. 한국전쟁 후에도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는 사용되었다. 1952년 ‘음악 및 무용의 밤’에서 박귀희와 김소희는 고전무용과 창극을 했으며, 1953년에 전통무용가인 강선영은 고전무용발표회를 연다고 했다. 그리고 1954년에 ‘8ㆍ15 해방 9주년기념무용발표회’에서 고전무용으로부터 현대무용, 발레에 이르기까지 발표한다고 했다. 즉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는 현대무용이나 발레와는 다른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춤을 말한 것이다. 한편 궁중무와 민속춤을 아울렀던 김천흥(1909~2007)은 1950년대에 고전무용을 우리 민족무용 중 하나로 분류하면서, 고전무용을 궁중무로 설명했다. 이 경우 즉흥적이고 가변적으로 추는 민속춤이 아니라 전범(典範)이 있는 궁중무를 고전무용이라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1956년에 김백봉은 ‘김백봉고전무용발표회’를 열며 부채춤, 장고춤, 무용극 우리마을 이야기 등을 공연했다.1958년 김문숙은 무용발표회에서 기원, 성황당, 수평선, 토끼와 거북이 등을 춤추었는데 그녀를 고전무용가로 소개했다. 김백봉과 김문숙의 작품들은 모던댄스의 기법으로 전통춤을 소재로 추는 신무용 스타일이었다. 또 1965년 유인희고전무용발표회에서 사선무, 무애무, 춤추는 무당 등을 선보이며 고전무용을 발표한다고 했다. 1969년 국립무용단 공연에 올려진 무용극 모란정과 무용극 봉선화도 고전무용으로 소개했다. 즉 1950년대 후반부터 전통춤 뿐만이 아니라 신무용 스타일의 작품들도 고전무용의 범주에서 언급되었다. 서양춤에 대응하는 의미로 고전무용의 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1960년대에 이르러 전통문화 논의가 본격화되고, 1970년대부터 전통무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고전무용의 용어는 퇴조하게 되었다.
고전무용의 용어가 20세기 중반에 사용되었으나, 고전무용의 실제 종목은 조선시대로부터 전승된 춤들이었다. 궁중무와 승무, 검무, 입춤 등의 기생들이 추었던 춤들과 농악ㆍ 탈춤ㆍ 무속춤 등을 아우른다. 수입된 서양춤에 대응하고 조선 고유의 춤들을 재인식하면서 1930년대부터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그리고 1950, 60년대에 최승희 조택원이 양식화한 신무용 계열의 춤들도 한시적으로 고전무용으로 칭해졌다. 신무용 작품들도 의상으로 한복을 입고, 반주로 국악을 사용하여 외형적으로 유사했기 때문에, 서양무용으로 분류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분류는 고전무용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할 때 서양의 문물과 대별되는 조선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범주화가 유지되었음을 방증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1960년대에 문학계에서 진행된 전통에 대한 논의, 문화재제도의 시행 에 따라 전통문화의 개념과 용어가 대두하고, 1970년대에 전통무용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1970년대부터 고전무용과 전통무용의 용어가 혼용되다가, 고전무용의 용어는 1980년대부터 별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현재에 고전무용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근대로 접어들면서 사회문화적 변화와 배경에 따라 20세기 중반에 전통춤들을 지칭하고 사용된 용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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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희(金伶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