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 의례에서 사용한 악대의 총칭
악현(樂懸)은 제례, 조회, 연향, 책봉, 혼례, 교서 반포[敎書頒降], 문과전시(文科殿試), 문무과방방(文武科放榜), 대사례(大射禮), 국장(國葬) 등 다양한 궁중 의례에 수반된 악대를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음악 연주를 담당했지만, 상황에 따라 수행(隨行)만 할 뿐 주악(奏樂)을 하지 않기도 했다. 의례의 성격과 규모에 따라 사용하는 악현(樂懸)이 달랐으며, 각 악현(樂懸)에 배치한 악기의 종류와 수량에도 편차가 있었다.
악현(樂懸)은 악기를 매달다는 뜻으로, 종(鐘)・경(磬) 등을 틀에 걸어서 쓰는 모양을 함축한 단어이다. 보통 여러 악기로 편성된 악대의 의미로 통용된다. 제례뿐 아니라 연향, 조회, 책봉 등 궁중 의례 전반에 걸쳐 사용한 악대를 포괄한다.
그 용어는 『주례(周禮)』에서부터 등장한다. 「소서(小胥)」에 “악현(樂懸)의 등위(等位)를 바로잡았다. 왕은 궁현(宮懸), 제후는 헌현(軒懸), 향대부는 판현(判懸), 사(士)는 특현(特懸)으로 하여, 그 소리를 분별하였다.”라고 하여 위정자의 지위에 따라 악현(樂懸)을 차별적으로 운용했음을 밝혔다. 차등화된 악현(樂懸)은 악대의 규모로 구별되었다. 이는 각 악현(樂懸)에 배치한 종・경의 수량으로 조절하였다. 궁현은 종・경을 네 면에, 헌현은 세 면에, 판현은 두 면에, 특현은 한 면에만 배설하여, 왕의 악현(樂懸)인 궁현에서 가장 웅장한 음향이 펼쳐지는 구도였다. 그러나 『주례』에는 악현(樂懸)에 대한 설명만 있을 뿐이어서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악현(樂懸)의 모습은 진양(陳暘)의 『악서(樂書)』에서 볼 수 있다. 궁현, 헌현, 판현, 특현 등 다양한 악현도가 있는데, 진양이 여러 서적을 참고하여 복원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부터 악현(樂懸)이란 명칭이 나온다. 1025년(현종 16), 가뭄이 심해 국가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 중 “악현(樂懸)을 거둔다[輟樂懸]”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는 음악 연주를 금지한다는 맥락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떤 악기로 구성되었는지는 상세하지 않아, 그 형태를 파악하기 어렵다.
고려 시대에 종・경을 포함한 악현(樂懸)의 모습은 1116년(예종 11) 대성아악(大晟雅樂)의 전래에서 자세히 드러난다. 이때 송 휘종이 보낸 악현(樂懸)은 등가(登歌)와 헌가(軒架)였다. 편종・편경・일현금・삼현금・오현금・칠현금・구현금・슬・지・적・소・우생・소생・화생・훈・박부・축・어・진고・입고・비고・응고 등의 아악기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 악현(樂懸)은 원구, 사직, 태묘 등에 제례를 올릴 때 아악을 연주하는 방식으로 활용되었다.
고려 시대 악현(樂懸)의 전통은 조선 시대로 이어졌지만, 그대로 습용되지 않았다. 태종대부터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를 설치하여 고제(古制) 악현(樂懸)을 연구하였고, 『주례』의 내용을 제례에서 사용하는 악현(樂懸)에서 실현하려고 애썼다. 세종대까지 그 노력을 기울인 결과, 옛 제도에 가까운 악현(樂懸)을 구현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조회와 회례(會禮)의 고취, 헌가(軒架), 등가(登歌)를 마련하고, 예연 등에 쓸 전정헌가도 구비하였다. 세조대에는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을 속악으로 바꾸면서 아악기, 당악기, 향악기의 조합으로 종묘 악현(樂懸)을 새로 갖추었다. 즉, 조선 시대로 접어들며 궁중의 예악을 정립하는 가운에, 오례에 활용하는 악현(樂懸)도 한층 더 체계적으로 갖추어 운용하였다. 이렇듯 조선 전기에 정비한 여러 악현(樂懸)은 『악학궤범』에 총정리되어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의 여파로 악현(樂懸)에 편성된 악기의 종류가 줄어들고, 그 수량도 감소하였다. 그러나 경모궁제례와 관왕묘제례처럼 새로 제정한 제사에 쓸 악현(樂懸)을 별도로 마련하기도 하였고, 순조대에 이르러 연향 문화를 확장하면서 이에 사용하는 악현(樂懸)의 규모가 커지는 변화도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황제국의 위격에 맞게 환구제례를 올리면서 음악을 연주할 등가(登歌)와 궁가(宮架)를 갖추었으며, 다른 악현(樂懸)의 악기도 보완하여 그 위의를 드높였다.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는 국가 전례가 위축되어 종묘제례(宗廟祭禮)와 문묘제례의 악현(樂懸)을 중심으로 명맥을 이어 나갔다.
현재 궁중 의례를 재현하면서 조선 시대에 사용했던 악현(樂懸)을 복원하고 있는 상황이다.
악현(樂懸)은 의례의 성격, 규모, 상황에 따라 그 쓰임이 다양하였다. 제례의 경우 아부악현과 속부악현으로 양분된다. 아부악현은 아악기 일색으로, 환구제례, 사직제례, 문묘제례, 우사, 선농제, 선잠제 등에서 쓰였으며, 각각의 제사에 전용하는 등가(登歌)와 헌가(軒架), 등가(登歌)와 궁가(宮架) 등이 특화되어 있었다.
속부악현은 아악기, 당악기, 향악기를 혼용하는 경우로, 종묘제례(宗廟祭禮), 경모궁제례 등에서 쓰였다. 역시 각각의 제사에 전용하는 악현(樂懸)이 있었다. 이처럼 제례에 수반되는 악현(樂懸)은 개별성과 전문성이 강하였다.
제례에 사용하는 악현(樂懸)의 악기 편성은 당상에 현악기와 노래를 진설하고, 당하에 관악기와 타악기를 배치함을 원칙으로 삼았다. 이는 『주례』에 명시되어 있으니, 제례 절차에서 가창하는 악장(樂章)의 전달력을 높이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등가(登歌)에 관악기를 설치하기도 하는 등 상황에 따라 악기를 유연하게 배치하기도 하였다. 또한 제례 대상에 따라 환구제사[天]에는 뇌고와 뇌도, 사직제례[地]에는 영고와 영도, 종묘제향[人]에는 노고와 노도를 별도로 진설하여, 신(神)과의 감응을 돕게 하였다.
반면 전정헌가(殿庭軒架)는 국왕이 몸소 나오는 규모가 큰 의례에서 폭넓게 등장하였다. 예연(禮宴)을 비롯하여 영조서의(迎詔書儀), 영칙서의(迎勅書儀), 정조하례(正朝賀禮), 동지하례(冬至賀禮), 삭망하례(朔望賀禮), 대전 탄일하례(誕日下隷), 왕세자 관례(冠禮), 문무과방방의(文武科放榜儀), 친경의(親耕儀), 대사례(大射禮) 등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전정헌가에는 건고, 응고, 삭고를 배설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세 가지 북은 규격이 크고 그 소리가 웅장하여 국왕의 권위를 드러내는 상징성을 지녔다.
전정헌가와 유사한 기능을 지닌 악현(樂懸)으로 전정고취(殿庭鼓吹)가 있다. 전정고취는 조참의(朝參儀), 문과전시의(文科殿試儀), 생원진사방방의(生員進士放榜儀), 배표(拜表)와 배전(拜箋)의 권정례(權停禮) 등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전정헌가보다 상대적으로 격이 낮은 의례에 배치한 것이다.
그 밖에 행차와 관련된 전후고취(殿後鼓吹), 전부고취(前部鼓吹), 후부고취(後部鼓吹)가 있다. 전후고취는 궁궐 내에서 국왕이 이동할 때 음악을 연주하였고,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국왕이 궁궐 밖으로 나와 행차할 때 어가(御駕)의 앞뒤에서 행악(行樂)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혼례나 국장(國葬)에 따르는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주악(奏樂)을 하지 않았다. 이 악대들은 이동하면서 음악 활동을 하는 특성상 움직이면서 연주 가능한 관악기와 타악기를 중심으로 삼았고, 몸에 거는 당비파 같은 현악기를 활용하기도 하였다.
악현(樂懸)은 궁중 의례의 설행 목적과 실행 상황에 따라 음악을 연주하였고, 때로는 주악하지 않았으며 그 의미를 실현하는 데 일조하였다. 그리고 왕실(황실)의 위상과 품격을 드러내는 예악 구현의 매개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고려사』 『고종신축진연의궤』 『고종임인진연의궤』 『고종임진진찬의궤』 『국조오례의』 『기사진표리진찬의궤』 『대사례의궤』 『대한예전』 『사직서의궤』 『세종실록』 「오례의」 『순조기축진찬의궤』 『순조무자진작의궤』 『악서』 『악학궤범』 『영조정순후가례도감의궤』 『종묘의궤』 『주례』 『춘관통고』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문화사적 고찰』, 민속원, 2018. 송지원, 『정조의 음악정책』, 태학사, 2007. 송지원, 『조선 왕실의 음악문화』, 세창출판사, 2020. 송혜진, 『한국아악사 연구』, 민속원, 2000. 이정희, 『궁궐의 음악문화』, 민속원, 2021. 이정희, 『대한제국 황실음악』, 민속원, 2019. 이혜구 역, 『신역 악학궤범』, 국립국악원, 2000. 임미선,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의 사전 전개』, 민속원, 2011.
이정희(李丁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