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조직된 정악 연주 단체
조선정악전습소 졸업생과 일반음악가들이 정악연주를 위해 1922년 7월에 결성한 동호회 성격의 단체이다. 홍긍섭(洪肯燮), 한귀호(韓龜鎬) 등이 주도했다. 1928∼1934년에 콜럼비아 레코드에서 여러 장의 줄풍류와 민요를 취입한 것으로 보아 1930년대에도 활동하였다.
조양구락부와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소감(所監)과 총무, 평의원, 연구위원 등을 지냈던 홍긍섭은 조선정악전습소를 나와 조선정악전습소에서 표방했던 음악적 지향을 가지고 전습소에서 같이 거문고를 배웠던 음악가 한귀호와 함께 이 단체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 단체의 성격이나 일부 회원들은 두 단체에서 두루 활동하기도 하여 조선정악전습소가 조직을 유지한 것으로 생각되지만 실제 조선정악전습소는 1919년 이래로 거의 해체되다시피하고 광복 직후인 1946년 조선정악원으로 다시 결성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 활동한 별개의 단체로 보아야 한다.
○ 설립 시기와 취지
1922년 7월 홍긍섭(洪肯燮), 한귀호(韓龜鎬) 등의 주도로 조선정악전습소 신구 졸업생들이 본소를 본위 삼아 만든 단체이다. 1922년 7월 22일 동아일보에는 정악구락부창립에 관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정악구락부창립. 금반 홍긍섭 한귀호 외 제씨의 발기로 정악전습소 신구졸업생 급 한산음악가의 일동을 망라하야 조선정악전습소로 본위를 삼아 정악구락부를 조직하였다더라” (동아일보, 1922년 7월 22일자)
1930년대에는 지방에도 같은 이름의 정악구락부가 독자적으로 조직되기도 하였다. 1932년 전주의 창립기사는, “정악구락부창설, 전주 전북 유지 서성칠, 이기태씨는 고래로부터 淸新稚趣한 조선정악의 쇠퇴하여감을 일대 유감으로 생각하고 동지 상모하야 금반 시내 팔달정 18번지 전 요정 동래각 자리에 정악구락부를 창설하고 지난 4일 정오부터 전주 유지 등을 다수 초청하여 성대한 피로회를 개장하였다고 한다.".(매일신보, 1932년 5월 5일자) 1933년 충북 음성에서의 기사는 “ 음성 정악구락부, 충북 음성 읍에서는 근일 김현구씨 댁에서 김두원 외 수인의 노력으로 일반 풍류를 구비하여 놓고 정악구락부를 조직하고 지원자에게는 무료로 친절교수한다고 한다”이다.(동아일보 1933년 7월 22일자)
○ 음악활동
조선정악전습소와 같은 교육기관이 아니라 음악단체로서 주요활동은 음반활동을 들 수 있다. 음반 취입은 1928년, 1929년, 1930년, 1934년에 각각 취입된 것이 남아 있거나 취입하였다는 광고를 볼 수 있다.
취입한 음악은 정악 줄풍류 중 상령산ㆍ세령산ㆍ타령ㆍ양청도드리, 민요는 경기민요 방아타령ㆍ양산도ㆍ이팔가 등으로 이 음악들은 현재 유성기음반에 남아있다. 이때의 연주자는 김상순(양금)ㆍ조이순(현금)ㆍ조동석(단소)ㆍ김계선(대금)ㆍ지용구(해금)ㆍ김경식(장고) 등이었다.
1933년 3월에 충북 음성(陰城)에서 김두원(金斗源) 등이 정악구락부를 조직하고 단체 이름을 ‘음성정악구락부’라고 하였다. 일반풍류를 구비하여 놓고 일반 지원자에게 무료로 가르친다고 한 점을 보면 정악동호인 모임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정악구락부라는 명칭은 정악연주단체를 이르는 용어로도 쓰였다.
1920년대 이후로 조선정악전습소가 분규로 인해 거의 해산되다시피한 상황에서 이 기관에 소속되었다가 결별하고 나온 홍긍섭의 주도로 만든 단체이지만 대부분 같은 전습소 관계자들이 참여하여 연주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로 음반을 남겼다는 점에서 조선정악전습소와 1946년 조선정악회 사이의 큰 간극을 메워주었고 줄풍류 음악을 오늘날까지 실질적인 소리로 이어오게 하였다는데 의미가 크다.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