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속악(中國俗樂)
중국 전래의 속악과 그 체제에 의하여 창작된 악곡을 포괄한 궁정 음악의 한 갈래.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기 이전부터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한 신라는 백제 멸망 직후인 문무왕 4년(664)에 귀당제감(貴幢弟監)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현재의 공주 지역인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보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 이는 한국음악사에서 당악의 유입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때 ‘ 당악’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당악(唐樂)은 통일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연주되어 왔던 궁정 음악의 한 갈래로서 아악(雅樂), 향악(鄕樂)과 함께 삼부악(三部樂)이라 한다. 삼부악 가운데 아악과 당악은 중국 전래의 악종(樂種)인데, 중국의 아악과 속악을 우리나라에서는 각각 아악과 당악이라 칭하여 왔다. 우리나라의 문헌에서 보이는 ‘ 한(漢)’이나 ‘당(唐)’이라는 용어는 한나라나 당나라라는 특정 조대(朝代)를 가리키는 경우도 있지만, 많은 경우 “중국”을 지칭하는 용어로 쓰이기도 하였다. 예를 들면 현대의 중국어를 한어(漢語)라 부르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당악은 본래 618년부터 907년간 존속했던 당나라의 속악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는 ‘중국 속악’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당나라와 수평 시기에 존재했던 통일신라시대의 당악은 당나라의 속악이 되겠지만, 고려시대 이후의 당악은 신라에서 전승된 당악의 바탕 위에 송, 원, 명나라의 속악까지 포함한다는 점에서 넓은 의미의 당악이라 할 수 있다.
(1) 통일신라시대
고려 태조 왕건이 임종 직전에 남겼다는 훈요 10조 가운데 그 제4조에 “우리 동방은 예로부터 당의 풍속을 흠모하여 문물 예악이 다 그 제도를 준수하여 왔다.”는 내용은 바로 통일신라시대 문물 예악제도의 실상을 단적으로 표현해 낸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라는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기 이전부터 이미 당문화(唐文化)를 선진 문화로 여겨 당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신라는 536년(법흥왕 23)에 처음으로 ‘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여 그 전통이 진덕여왕 3년까지 지속되었으나 ‘ 태화(太和)’를 마지막으로 650년(진덕여왕 4)부터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연호의 사용은 당나라에서 반포한 정삭(正朔)을 따르는 것으로서 바로 중국에 대한 예속을 의미한다. 그에 앞서 648년(진덕여왕 2)에 김춘추가 당나라를 방문하여 관리들의 휘장과 복식을 바꾸어 중국 제도를 따르겠다고 청하였고, 이듬해부터 법흥왕 7년(520)에 제정하여 시행해 오던 백관의 공복 제도를 바꾸어 중국의 의관을 착용하기 시작하였다. 백제 멸망 직후인 문무왕 4년(664)에는 교서로 부인들도 당나라의 의상을 입게 하였으며, 같은 해에 성천(星川)과 구일(丘日) 등 28명을 현재의 공주 지역인 웅진부성(熊津府城)으로 보내 당악을 배우게 하였다. 이는 한국음악사에서 당악의 유입에 관한 최초의 기록으로서 이 때 ‘ 당악’이라는 용어도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웅진부성에는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성천이 662년(문무왕 2) 당시 귀당제감(貴幢弟監)의 지위에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이때 배운 당악은 군악(軍樂) 고취(鼓吹)로 추정된다. 성천과 구일 등이 당악을 학습한 뒤 12종의 중국 악기를 가지고 돌아왔다고 하는 견해도 있지만 근거가 불분명하다. 그로부터 9년 뒤인 673년(문무왕 13)에 김유신의 장례(葬禮)를 위하여 군악 고취 100명을 보내 주었는데 그때 연주한 고취가 바로 웅진부성에서 당군(唐軍)으로부터 배운 당악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당악은 신라가 아직 통일신라시대로 접어들기 이전에 이미 신라에서 적극적으로 수용하기 시작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 당악이 성행하였다는 사실은 『삼국사기』의 기록 내용과 통일신라시대로 비정되는 여러 고고 유물에서 확인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악에 사용된 악기 가운데 박판(拍板), 대고(大鼓) 등 당 속악[연악]에 사용된 악기가 포함되어 있고, 삼죽과 삼현의 각 악기에 붙여진 해설에도 당악과 관련된 내용이 산견된다. 즉 삼죽은 당적(唐笛)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라 하였고, 현금과 가야금은 각각 당나라 악대(樂隊)인 악부(樂部)의 금과 쟁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였다. 악부(樂府)와 구별되는 악부(樂部)는 당 현종(713~755) 이래로 태상(太常)에 예속되어 있던 악대를 지칭하는 용어로서 입부(立部)와 좌부(坐部)로 구분되었다. 특히 비파와 삼죽의 음악에 쓰인 악조 가운데 다수의 당 속악조가 포함되어 있다. 즉 비파 음악에 사용된 궁조(宮調), 봉황조(鳳皇調)와 삼죽 음악에 사용된 평조(平調), 황종조(黃鍾調), 월조(越調), 반섭조(船涉調)가 당 속악조이고, 칠현조(七賢調), 이아조(二雅調) 역시 당 속악조로 추정된다. 그밖에 진덕여왕 때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라의 왕립 음악 기관인 음성서(音聲署)라는 이름도 당나라의 전성기에 음악인들을 총괄하여 ‘음성인(音聲人)’이라 불렀던 것에서 유래하였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삼국사기』의 여러 기록들을 통하여 당시에 당악이 크게 유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암사(碑岩寺) 계유명전씨아미타불삼층석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層石像)(673)〉, 〈감은사지 서3층석탑 금동제 전각형사리함(682)〉, 〈상원사(上院寺) 동종(銅鐘)(725)〉, 〈봉암사(鳳巖寺) 지증대사적조탑(智證大師寂照塔)(883)〉, 〈화엄사(華嚴寺) 사사자삼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8세기)〉, 〈실상사(實相寺) 백장암(百丈庵) 삼층석탑(三層石塔)(9세기)〉 등 통일신라시대의 고고유물에서 곡경비파(曲頸琵琶), 직경비파(直頸琵琶), 공후(箜篌), 쟁(箏), 피리[필률(觱篥)], 배소(排簫), 퉁소(洞簫), 횡적(橫笛), 생황(笙簧), 요고(腰鼓) 혹은 장고(杖鼓), 박판(拍板)[박], 동발(銅鉢) 등 삼국시대의 고고 유물에 보이지 않던 당 속악기의 모습이 보인다. 그중 동발을 제외한 모든 악기가 『신당서(新唐書)』의 당 속악기에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고고 유물에 묘사된 악기들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상당수의 당 속악기가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최치원(崔致遠, 857~?)이 쓴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雙溪寺眞鑑禪師大空塔碑)’에 의하면, 진감선사 혜소(彗昭, 774~850)는 804년(애장왕 5)에 당나라로 건너가 승려가 된 뒤 26년 만인 830년(흥덕왕 5)에 귀국하여 지리산 옥천사(玉泉寺)에서 불법과 범패를 가르쳤다. 비문 중 중국 청상(淸商) 3조의 하나인 “측조(側調)”의 명칭이 보이고, “길이 먼 곳에서 전해질 수 있게 하였다[永於遠地流傳]”는 내용으로 미루어 진감선사가 전수한 범패, 즉 어산(魚山)은 당나라에서 배워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어산의 오묘함을 배우는 사람들이 당(堂)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고, 진감선사가 입적한 지 37년이 지난 뒤에도 그 수가 줄어들지 않았을 정도로 그 무렵 당악의 일종으로서의 범패가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런데 진감선사와 유사시기에 생존했던 일본의 자각대사 엔닌(圓仁, 794~864)의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에는 신라인 장보고(張保皐)가 824년 중국 산동성(山東省) 문등현(文登縣)에 세운 적산원(赤山院, 이칭 적산신라원 혹은 적산법화원)에서 행한 신라 사원 의식(新羅寺院儀式)의 내용과 절차가 수록되어 있다. 당시 적산원에서는 적산원강경의식(赤山院講經儀式)ㆍ신라일일강의식(新羅一日講儀式)ㆍ신라송경의식(新羅誦經儀式) 등의 의식이 있었으며, 그러한 의식에 당풍(唐風), 신라음곡으로 된 범패,일본 범패와 같은 것 등 3종류의 범패가 불려진 것으로 전한다. 그 3종을 현재 당풍(唐風), 신라풍(新羅風), 일본풍(日本風) 혹은 고풍(古風)으로 부르고 있다. 진감선사가 옥천사에서 가르친 범패는 바로 당풍에 해당한다.
(2) 고려시대
통일신라시대의 당악이 당나라의 속악으로 한정되었다면 고려시대부터는 송의 속악이 대거 유입되면서 당악의 개념은 중국의 속악이라는 넓은 의미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의 당악은 통일신라에서 전승된 당악을 바탕으로 송조의 속악을 수용하면서 전개되어갔다.
고려조에서 송조의 속악을 처음 들여온 시기는 제4대 광종(949~975) 때이다. 당시 광종은 송조에 속악기와 악공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건너온 송조 악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대대로 그 업을 지키게 하였다. 광종 때 송나라에서 보내온 악공은 충렬왕(忠烈王, 1274~1298) 때의 김여영(金呂英)에 이르렀고, 또 충숙왕(忠肅王, 1313~1330) 때에는 여영의 손자 김득우(金得雨)로 이어졌다. 북송 전기에는 당대(唐代)의 옛 제도를 승습하여 교방(敎坊)이 독립된 기구로서 속악을 전담하고 있었다. 당대의 교방은 본래 태상시(太常寺)에 소속되어있었으나 현종 때에는 독립된 기구로 정식 출범하였고, 교방의 일상 업무는 환관 출신의 교방사(敎坊司)가 담당하였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광종 때 중국 전래의 속악(즉 당악) 담당 기구로서의 교방을 설치한 뒤 송조에서 보내준 악공의 자손으로 하여금 당송시기의 교방사에 준하는 업무를 담당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고려가 원 간섭기로 접어들기 전, 교방 악인들의 음악활동은 의종(1146~1170) 때 상정된 위장행렬에서 두드러지는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교묘(郊廟) 친사(親祀)의 법가위장(法駕衛仗)”의 경우, 교방악관(敎坊樂官)과 인가(引駕)가 100명, 안국기(安國伎) 40명, 잡기(雜技) 40명, 고창기(高昌伎) 16명, 천축기(天竺伎) 18명, 연악기(宴樂伎) 40명, 취각군(吹角軍) 20명, 취라군(吹螺軍) 20명이 참여하였다. 또 “봉원사진전친행(奉恩寺眞殿親幸) 상원연등(上元燃燈) 위장의 후전대(後殿隊)에 인가ㆍ교방악관 100명, 안국기 40명, 잡기 40명이 포함되었고, 서남경순행회가봉영위장(西南京巡幸回駕奉迎衛仗)의 후전대에도 인가ㆍ교방악관 100명, 안국기 40명, 잡극기 160명이 포함되었다. 상원연등회의(上元燃燈會儀)에서 의장대가 움직이고 행렬이 궁전 문을 나설 때나 중동팔관회(仲冬八關會儀)의 좌전수하군신헌수(坐殿受賀群臣獻壽)에서 왕의 이동시에 교방이 고취를 진작한 사례에 비추어 위장행렬에 동원된 교방악관은 고취 연주자들이다. 그리고 안국기, 고창기, 천축기, 연악기는 642년(당 정관16)에 제정된 10부악[十部樂] 가운데 4종 기악(伎樂)으로서 역시 중국의 속악이라는 점에서 고려 교방에 소속된 악무대임이 분명하다. 위장행렬에 동원된 음악 종목과 인원수를 통해 당시 당악의 규모를 확인할 수 있다. 원 간섭기로 접어든 1301년(충렬왕 27)에 무도(舞蹈)를 없앴는데, 이 때 안국기ㆍ잡기ㆍ고창기ㆍ천축기ㆍ연악기가 배제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목종(998~1009) 때 대악서령(大樂署令)이 있었다는 기록과 1044년(정종 10)에도 대악승(大樂丞)이 있었다는 기록을 통하여 고려 전기에 또 다른 음악기관인 대악서(大樂署)가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당나라의 대악서는 제사, 조하, 연향 등의 전례에 사용할 음악의 공급을 위하여 궁정예인들의 훈련과 심사를 주관했던 음악관리기구로서 그 장관이 대악령(大樂令)이고, 부직장이 대악승(大樂丞)이다. 관서명과 직책명이 같다는 점에서 고려 전기의 대악서 역시 제사, 조하, 연향 등의 전례에 사용할 음악을 위하여 설치된 기구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시대에는 성종(981~997)대에 비로소 원구제(圓丘祭)와 경적전(耕籍田)이 이루어지고,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건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교사(郊社)를 세우고 성종이 몸소 체협(禘祫)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례가 시행되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음악이 필요하다. 따라서 대악서는 981년(성종 원년)에 성종이 백관의 관호를 고칠 때 당의 제도를 수용하여 기존의 관서명을 바꾸었거나, 혹은 새로운 유교적 의례를 수립하면서 그에 상응하는 음악의 공급을 위하여 새로이 설치한 기구로 보인다.
고려의 당악 유입은 문종(1046~1083) 때 송조의 속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활발해졌다. 문종은 송 신종 희령(煕寧) 연간(1068~1077)에 송조에 악공(樂工)을 요청하였고, 그렇게 온 송조의 악공은 수년간 고려에 머무르면서 당악을 가르쳤다. 그 후에도 송나라로 사신 갈 때면 반드시 재물을 가져가서 송조의 악공들을 관사로 초빙하여 음악을 배워오곤 하였다. 1073년(문종 27) 2월에는 “연등회(燃燈會)에 여제자 진경(眞卿) 등 13명이 전해준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를 쓰자”는 교방의 상주(上奏)를 따랐고, 같은 해 11월의 팔관회(八關會)에서는 교방여제자(敎坊女弟子) 초영(楚英)이 새로 전해 받은 〈포구락(抛毬樂)〉,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를 올렸는데, 〈포구락〉은 13명, 〈구장기별기〉는 10명으로 구성되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077년(문종 31) 2월의 연등회에서는 교방여제자 초영이 55명으로 구성된 〈왕모대가무(王母隊歌舞)〉를 올렸는데, 춤으로 “군왕만세(君王萬歲)” 혹은 “천하태평(天下太平)” 4자를 연출하였다. 〈왕모대가무〉는 바로 무대(舞隊)의 대형(隊形)을 이용하여 각종 글자 모양을 이루는 일종의 자무(字舞)였다. 문종은 이후 신종 원풍(元豐) 연간(1078~1085)에도 악공(樂工)을 구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이와 같이 당악이 극성으로 치닫는 과정에서 문종은 1076년(문종 30)에 관현방(管絃房)을 신설하는 동시에 대악서를 재정비하였다.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는 고려의 왕실음악기구였던 대악서와 관현방을 대악국(大樂局) (혹은 대악사(大樂司))과 관현방(管絃坊)이라 칭하였고 또 대악사(大樂司)에는 260명, 관현방에는 170명, 경시사(京市司)에는 300여명의 여기(女伎)가 있다고 하였다. 서긍이 고려를 방문했을 시기(1124년, 고려 인종 2)에 여기가 소속될 수 있는 음악기구는 대악서와 관현방 외에 교방 밖에 없었기 때문에 서긍이 말하는 경시사란 곧 교방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의 수만 보아도 당시 대악서와 관현방 및 교방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서긍은 또 고려의 궁정음악에는 좌방악(左坊樂)과 우방악(右坊樂) 양부악이 있다고 한 뒤, 좌방악은 당악, 우방악은 향악이라 하였다. 즉 당악은 교방 외에 대악서와 관현방의 좌방에서도 연주되었고, 우방에서 연주되었던 향악과 대비되었다. 그리고 그 좌방과 교방의 당악은 용도에 따라 성격이 서로 다른 악종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 「악지」에 전하는 당악이 형식면에서 여기들의 노래와 춤이 위주가 되는 교방악, 노래와 관현악이 위주가 되는 사악(詞樂)으로 구분되는 점을 고려하면, 교방 담당의 당악은 교방악이고, 좌방의 당악은 사악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원 간섭기 이후로 교방은 음악기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충렬왕 때 왕의 연락(宴樂)에 관현방과 태악(즉 대악서)의 재인만으로는 부족하여 별도로 남장대(男粧隊)를 만들었다는 것을 보면, 이 때 이미 교방은 음악기구로서 존속되고 있지 않았음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당시 남장대는 여러 도의 관기와 도성 안의 관비・무당에서 선발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고려사』 「악지」의 당악은 모두 사악(詞樂)으로서 모음곡으로 구성된 대곡(大曲)과 단독으로 가창하는 산사(散詞)로 대별된다. 앞부분에 수록된 〈헌선도(獻仙桃)〉, 〈수연장(壽延長)〉, 〈오양선(五羊仙)〉, 〈포구락(抛毬樂)〉, 〈연화대(蓮花臺)〉, 〈석노교【곡파】(惜奴嬌【曲破】)〉, 〈만년환【만】(萬年歡【慢】)〉 등 7종목은 대곡에 속하고, 〈억취소【만】(憶吹簫【慢】)〉 이하 〈해패【령】(解佩【令】)〉까지는 모두 산사에 해당한다. 7종 대곡 가운데 앞의 5종 정재는 절차와 곡 이름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었지만, 〈석노교【곡파】〉와 〈만년환【만】〉은 가사만 수록되었기 때문에 공연 내용을 자세히 알 수 없다.
이러한 당악에는 문종 때 유입된 교방악 가운데 오직 〈포구락〉만 포함되어있을 뿐, 〈답사행가무〉와 〈구장기별기〉 및 〈왕모대가무〉는 포함되지 않아 전승이 단절된 것으로 나타난다. 문종대에 유입된 당악이 대부분 유실된 점으로 볼 때, 『고려사』 「악지」에 수록된 당악은 주로 예종 때 북송 휘종이 보내온 대성신악일 가능성이 크다. 휘종이 북송의 속악인 대성신악을 보내올 때 10책의 곡보(曲譜)도 함께 보내주었다는 사실은 예종대에 상당수의 당악이 유입되었음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유입 직후 약 4개월 뒤에 신악과 향악을 태묘에 병용하도록 하였고, 5개월 뒤에는 함원전에서 베푼 연회에서 신악이 공연되기도 하였다. 이는 유입되던 해에 이미 용도가 정해지고, 그에 대한 학습이 이루어져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고려사』 「악지」 소재 당악은 송 전래의 음악이 중심을 이루고 있어 고려시대 당악의 개념이 신라시대와는 다른 광의의 개념으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의 유입과 함께 여러 당악기도 유입되었다. 1114년(예종 9)에는 북송 휘종이 철방향(鐵方響)을 비롯한 15종의 당악기와 곡보 10책, 지결도(指訣圖) 10책을 보내주었다. 이 악기들은 1113년에 북송 휘종 때의 음악전담기구인 대성부(大晟府)에서 새로 제작한 연악용 신악기들이다. 당시 휘종은 이 악기들을 새로 만든 대성악과 함께 교방과 균용직(鈞容直) 및 개봉부(開封府)에 반포한 뒤, 종래의 구악(舊樂)을 일체 금하게 하였다. 당시 고려에서 이러한 악기들을 모두 활용했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의 당악에서 주로 사용된 당악기는 방향【철16】, 퉁소【8공】, 적【8공】, 피리[觱篥]【9공】, 비파【4현】, 아쟁【7현】, 대쟁【15현】, 장구[杖鼓], 교방고, 박【6매】 등 10종이었다.
(3) 조선시대
조선은 건국 초기에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전악서(典樂署)와 아악서(雅樂署)를 두고는 악공직으로 삼았다. 고려조에서 전악서와 아악서의 명칭이 처음 등장한 때는 각각 1308년(충렬왕 34)과 1391년(공양왕 3)이다. 고려 성종대부터 존속했던 대악서는 원 간섭기로 접어든 1308년(충렬왕 34)에 전악서로 개칭되었고, 공민왕 때 대악서와 전악서로 번복되다가 최종적으로 1372년(공민왕 21)에 전악서로 바꾼 이래 고려 말까지 유지되었다. 또 아악서는 고려 말기인 1391년(공양왕 3)에 처음으로 설치되었는데, 당시 공양왕은 기존의 관현방을 없앰과 동시에 별도로 아악서를 설치하고는 제례악을 익히게 하였다. 조선 건국 초기에 설치한 전악서와 아악서는 바로 고려 말의 제도를 승습한 것이다.
건국 초기의 아악서는 제향을 위하여, 전악서는 조회와 연향을 위하여 마련된 악공직들이었다. 1409년(태종 9) 당시 종묘에는 아악을, 조회에는 전악을, 연향에는 향ㆍ당악을 번갈아 연주하고 있었는데, 이 때 종묘에 쓰인 아악은 당악을 가리키기도 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에는 당악이 아악서와 전악서의 악공들에 의하여 모두 연주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연향에서 당악을 서쪽에, 향악을 동쪽에 배치한 뒤 향ㆍ당악을 번갈아 연주한 것은 고려 좌방과 우방의 전통을 계승한 것이다.
1393년(태조 2)에 정도전이 전악서의 무공방(武功房)을 거느리고 〈문덕(文德)〉ㆍ〈무공(武功)〉ㆍ〈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 등의 신악을 올렸을 때 정도전이 관습도감(慣習都監)의 판사(判事)였던 것을 보면 건국 초에 관습도감도 설치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당시 종묘와 제향(祭享) 등의 일을 담당했던 봉상시(奉常寺)가 아악서와 직결되었다면 관습도감은 전악서와 직결되었다.
조선조로 전승된 고려의 당악은 건국 이후로 조회와 연향에 활발히 연주되었다. 1402년(태종 2)에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함께 조회악과 연향악을 정해 올렸는데, 각 연향의 절차에는 다량의 당악과 당악정재가 포함되어 있다. 국왕연사신악(國王宴使臣樂)의 경우, 〈오양선정재〉ㆍ〈연화대정재〉ㆍ〈포구락정재〉가 추어지고, 〈하성조령(賀聖朝令)〉ㆍ〈수룡음(水龍吟)〉ㆍ〈금잔자(金盞子)〉ㆍ〈억취소(憶吹簫)〉가 기악곡으로 연주되었다. 그리고 가악(歌樂)은 시경의 시와 접목하여 가녹명(歌鹿鳴): 중강조(中腔調), 가황황자화(歌皇皇者華): 전화지조(轉花枝調), 가사모(歌四牡): 금전악조(金殿樂調), 가어리(歌魚麗): 하운봉조(夏雲峯調), 가신공(歌臣工): 수룡음조(水龍吟調), 가남유가어(歌南有嘉魚): 낙양춘조(洛陽春調)로 연주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고려 말의 아악서와 전악서에서 전하던 당악 중에서 선정한 것들로서 정재 이외의 곡들 중 〈하성조〉와 〈중강령〉 및 〈금잔자〉는 각각 고려 교방악 〈연화대〉와 〈수연장〉 및 〈헌선도〉의 반주음악에서 취한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산사에서 취한 것이다. 특히 가악은 고려의 사악에서 쓰인 노래 말을 모두 시경의 시로 바꿈으로써 시악화를 이루었다. 국왕연사신악 외에 국왕연종친형제악(國王宴宗親兄弟樂), 국왕연군신악(國王宴群臣樂), 국왕견본국사신악(國王遣本國使臣樂), 국왕로본국사신악(國王勞本國使臣樂), 국왕견장신악(國王遣將臣樂), 국왕로장신악(國王勞將臣樂), 의정부연조정사신악(議政府宴朝廷使臣樂), 의정부연본국사신악(議政府宴本國使臣樂), 의정부전본국장신악(議政府餞本國將臣樂), 일품이하대부사공사연악(一品以下大夫士公私宴樂)에도 당악이 편성되었지만 국왕연사신악에 비해 그 수가 적고, 종목도 국왕연사신악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세종대(1418~1450)에 이르러 조선조 아악이 새로이 창제됨에 따라 아악서에서는 비로소 진정한 아악을 전담하고, 전악서에서는 속악을 전담하되 좌방은 당악, 우방은 향악을 담당하게 되었다. 태종 때까지의 아악서는 비록 아악이라는 명칭은 있었지만 실제로는 제사용 당악도 포함하는 등 혼란한 면이 있었으나 세종대에는 아악이 전성을 이루면서 아악서와 전악서가 기능면에서 온전히 체계가 갖추게 되었다. 세종대에 아악이 부흥됨에 따라 당악은 향악과 함께 타격을 받긴 하였으나 여전히 기악, 가악, 당악정재의 형태로 연주되었고, 문소전 등의 제례에 작헌악으로도 연주되었다.
선초에는 고려 전래의 당악 뿐만 아니라 새로운 당악과 당악정재를 창제하여 연향 등에 활용하였다. 성종대의 『악학궤범(樂學軌範)』(1493)에는 고려에서 전승된 〈헌선도〉, 〈수연장〉, 〈오양선〉, 〈포구락〉, 〈연화대〉 외에 〈금척(金尺)〉, 〈수보록〉, 〈근천정(覲天庭)〉, 〈수명명(受明命)〉, 〈하황은(荷皇恩)〉, 〈하성명(賀聖明)〉, 〈성택(聖澤)〉, 〈육화대(六花隊)〉, 〈곡파(曲破)〉 등 9종의 당악정재가 수록되어있다.
〈몽금척〉의 약칭인 〈금척〉은 〈수보록〉과 함께 정도전이 지어올린 악장으로 1398년(태조 7)에 전악서 무공방(武功房)의 시연과 함께 올린 신악(新樂)이고, 〈근천정〉, 〈수명명〉은 1402년(태종 2)에 하륜(河崙)이 지어올린 악장으로 1411년(태종 11)에 인군과 신하가 함께 잔치하는 예도[君臣同宴禮度]에 수장(首章)으로 채용된 바 있다. 정도전과 하륜의 악장에 기하여 이루어진 4종 당악정재는 이후 1432년(세종 14)에 정해진 회례의주(會禮儀注)에도 〈하황은〉과 함께 회례악으로 쓰였다. 〈하성명〉은 1419년(세종 1)에 변계량이 지어 올렸고, 〈성택〉은 1428년(세종 10)에 의식절차가 정해졌으며, 〈곡파〉는 오랫동안 쓰이지 않아 실전되었다가 1425년(세종 7)에 그 무악(舞樂)을 기억하는 노기(老妓)에 의해 복원될 수 있었다. 『악학궤범』에만 전하는 〈육화대〉는 세종 이후 성종 사이에 창제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새로운 당악정재를 창제하였을 뿐만 아니라 고려에서 전승된 5종 정재도 고려의 것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새로운 모습으로 재정비하였다.
성종대의 14종 당악정재에는 〈회팔선인자〉ㆍ〈헌천수[만]〉ㆍ〈헌천수[최자]〉ㆍ〈금잔자만〉ㆍ〈금잔자최자〉ㆍ〈서자고만〉ㆍ〈서자고최자〉ㆍ〈천년만세인자〉ㆍ〈연대청[인자]〉ㆍ〈중강[령]〉ㆍ〈청평악〉ㆍ〈오운개서조인자〉ㆍ〈만엽치요도[만])〉ㆍ〈최자[령]〉ㆍ〈보허자령〉ㆍ〈파자〉ㆍ〈절화[삼대]〉ㆍ〈소포구락령〉ㆍ〈수룡음[인쇄]〉ㆍ〈전인자〉ㆍ〈중선회〉ㆍ〈반하무〉ㆍ〈후인자〉ㆍ〈금척[령]〉ㆍ〈금전악[령]〉ㆍ〈하성조[령]〉ㆍ〈석노교〉 등이 반주음악으로 쓰였다. 〈전인자〉와 〈후인자〉는 본래 세종 말기에 창작된 향악정재 〈봉래의(鳳來儀)〉의 입퇴장곡으로서 조선 초의 속악7음음계로 창작된 악곡임에도 불구하고 〈연화대〉의 입퇴장곡으로 쓰였다. 이 두 곡을 제외하면 성종대의 당악정재에 쓰인 반주음악은 모두 당악곡이다. 단, 〈곡파〉의 반주악곡 이름으로 명시된 전편(攧遍)ㆍ입파(入破)ㆍ허최(虛催)ㆍ최곤(催袞)ㆍ최박(催拍)ㆍ중곤(中袞)ㆍ헐박(歇拍)ㆍ쇄곤(煞袞)은 곡명이 아니라 〈석노교〉의 각 부분이라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속하는 『세종실록』 「악보」와 『세조실록』 「악보」에는 각각 당대(當代)에 새로이 창작된 당악곡인 〈여민락〉과 진찬악 〈풍안지악〉이 수록되어있다. 〈여민락〉은 〈봉래의〉의 한 악곡이고, 〈풍안지악〉은 세조가 친제한 악곡으로 종묘제례의 진찬 뿐만 아니라 철변두와 송신의 절차에서도 각각 〈옹안지악〉과 〈흥안지악〉이라는 곡명으로 연주되었다. 두 악곡을 통하여 조선 전기에 중국 속악의 2종 악조, 즉 연악7음음계로 알려진 “속악조”와 청악7음음계로 알려진 “신음계(新音階)”, 즉 “하치조(下徵調)”의 당악곡들이 연주되었음이 확인된다. 〈여민락〉은 〈보허자〉와 같이 “황-태-고-중-임-남-무”로 구성된 속악조[연악7음음계]에서 제3음인 “고”가 생략된 악곡이고, 〈진찬악[풍안곡]〉은 〈낙양춘〉과 같이 “황-태-고-중-임-남-응”으로 구성된 신음계(즉 하치조[청악7음음계])의 악곡이다.
한편, 성종대의 『경국대전(經國大典)』(1471)에는 당악의 취재 곡목으로 〈삼진작보〉ㆍ〈여민락령〉ㆍ〈여민락만〉ㆍ〈낙양춘〉ㆍ〈오운개서조〉ㆍ〈만엽치요도최자〉ㆍ〈보허자령〉ㆍ〈보허자급박파자〉ㆍ〈환환곡〉ㆍ〈태평년만〉ㆍ《보태평》11성ㆍ《정대업》11성ㆍ〈진찬악[풍안곡]〉ㆍ〈전인자〉ㆍ〈후인자〉ㆍ〈반하무〉ㆍ〈정동방〉ㆍ〈환궁악〉ㆍ〈절화삼대〉ㆍ〈절화급박〉ㆍ〈소포구락령〉ㆍ〈청평악〉ㆍ〈수룡음〉ㆍ〈하운봉〉ㆍ〈억취소〉ㆍ〈백학자〉ㆍ〈헌천수〉ㆍ〈중선회〉ㆍ〈금전악〉ㆍ〈하성조〉ㆍ〈회팔선인자〉ㆍ〈헌천수최자〉ㆍ〈금잔자만〉ㆍ〈금잔자최자〉ㆍ〈서자고만〉ㆍ〈서자고최자〉ㆍ〈천년만세인자〉ㆍ〈성수무강인자〉 등이 있다. 이러한 악곡들 중 26곡은 고려의 당악에서 연원한 악곡들이고, 나머지는 조선 전기에 새로이 창작한 악곡들이다. 그런데 〈삼진작보〉ㆍ〈여민락령〉ㆍ〈여민락만〉ㆍ〈낙양춘〉ㆍ《보태평》11성ㆍ《정대업》11성ㆍ〈진찬악[풍안곡]〉ㆍ〈전인자〉ㆍ〈후인자〉ㆍ〈정동방〉ㆍ〈환궁악〉ㆍ〈금전악〉 등은 향악 취재 곡목에도 포함되어있고 〈성수무강인자〉는 향악 취재곡목에 〈성수무강〉으로 포함되어있다. 《보태평》11성ㆍ《정대업》11성ㆍ〈전인자〉ㆍ〈후인자〉 등은 세종대에 제작된 신악들로서 전통적인 5음음계의 평조ㆍ계면조와 세종대에 탄생된 속악7음음계로 이루어진 악곡들이라는 점에서 당악의 범주에 들지 않는다. 그러나 향ㆍ당악의 취재 곡목에 공통으로 포함되어있는 악곡들은 이 시기에 향ㆍ당악기의 혼합 편성 상황을 말해주므로 이를 통하여 당시 향ㆍ당악 융합 상황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1447년(세종 29)에는 평상시에 사용하는 속악[시용속악(時用俗樂)]을 정한 뒤 악보로 남겼는데, 그 중에 당악이 포함되었다. 그 기술 순위를 보면 먼저 문소전(文昭殿)과 광효전(廣孝殿)의 삼헌악 5곡을 열거한 뒤 이어서 당악 11곡과 향악 7곡을 차례대로 열거하였다. 〈환환곡〉ㆍ〈미미곡(亹亹曲)〉ㆍ〈유황곡(維皇曲)〉ㆍ〈유천곡(維天曲)〉ㆍ〈정동방곡〉 5곡은 문소전ㆍ광효전의 삼헌악이고, 〈헌천수〉ㆍ〈절화〉ㆍ〈만엽치요도최자〉ㆍ〈소포구락〉ㆍ〈보허자파자〉ㆍ〈청평악〉ㆍ〈오운개서조〉ㆍ〈중선회〉ㆍ〈백학자〉ㆍ〈반하무〉ㆍ〈수룡음〉 11곡이 당악이다. 당시 문소전과 광효전에 음악을 쓰는 원칙은 태종대의 종묘제례와 마찬가지로 초헌에는 당악을, 아헌에는 향악을, 종헌에는 향ㆍ당악을 겸용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초헌악인 〈환환곡〉과 〈미미곡〉은 각각 태조와 태종을 제사할 때 쓰인 초헌악의 미칭으로서 그 선율이 당악 〈중강령〉이므로 당악의 범주에 든다. 『경국대전』의 당악 취재곡목에는 〈환환곡〉만 있고 〈미미곡〉은 없는데, 〈미미곡〉의 음악 자체는 〈환환곡〉과 같기 때문에 『경국대전』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반면, 아헌악의 미칭인 〈유황곡〉과 〈유천곡〉은 그 선율이 향악 〈풍입송(風入松)〉이고, 종헌악인 〈정동방곡〉은 고려가요 〈서경별곡〉에서 연원하였지만 향ㆍ당악 겸용의 악곡이다. 그래서인지 《정동방곡》은 『경국대전』의 향ㆍ당악 취재곡목에 모두 포함되었지만, 〈유황곡〉과 〈유천곡〉은 〈유황곡〉을 대표로 향악 취재곡목에만 포함되었다. 고려 전래의 당악 중 〈낙양춘〉ㆍ〈환궁악〉ㆍ〈금전악〉ㆍ〈성수무강〉ㆍ〈보허자〉나 세종ㆍ세조 때 창작된 〈여민락만〉과 진찬악 〈풍안(지)곡〉도 당악임에도 불구하고 〈정동방곡〉처럼 『경국대전』의 향ㆍ당악 취재곡목에 모두 포함되었다. 고려 전래의 일부 당악곡들이 모두 향ㆍ당악 겸용의 악곡들도 바뀌어 나타난 현상 역시 당시의 향ㆍ당악 융합 상황을 말해준다. 『대악후보』 권2에 수록된 〈정동방곡〉의 출현 음이 <下五[黃]-下四[太]-下三[仲]-下二[林]-下一[南]-下一界[無]-宮[潢]-上一[汰]-上二[㳞]>이고, 현행〈정동방곡》의 출현 음이 <黃-太-仲-林-南-無-潢-汰>인 것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정동방곡〉은 비록 향악 〈서경별곡〉에서 연원하였지만, 애초 당악곡으로 창작된 악곡이었다. 그 악조는 세종대의 〈여민락〉과 같이 중국의 속악조[연악7음음계]에서 제3음이 생략되었다. 결국, 세종 말기에 정한 평상용의 속악 중에는 앞에 열거한 고려 전래 당악 11곡과 〈환환곡〉ㆍ〈미미곡〉ㆍ〈정동방곡〉을 합하여 모두 14곡이 당악이다.
이후 1759년(영조 35)에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이 왕명을 받아 편집된 『대악전보(大樂前譜)』에는 〈보허자〉와 〈낙양춘〉을 비롯한 15곡의 당악곡이 수록된 것으로 전한다. 『대악전보』는 세종대의 음악을 수록한 악보집으로 알려져 있지만, 1447년(세종 29)에 정한 시용속악에 비해 배제된 악곡도 있고, 추가된 악곡도 있어 서로 차이가 있다. 『대악전보』에 수록된 당악곡들이 영조 시기의 당악을 반영한 것인지, 세종대 중 어느 한 시기의 당악 사용 상황을 나타낸 것인지 불분명하다. 만일 전자라면 이 무렵 당악은 상당히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양란 이후로 조선조의 궁정음악은 치명타를 입었고 당악 역시 쇠퇴일로로 치달았다. 1795년(정조 19)에 봉수당(奉壽堂)에서 베푼 혜경궁(惠慶宮)을 위한 연회에서 〈금척〉, 〈수명명〉 등 12종의 정재가 공연되었는데, 그 반주곡으로 〈여민락〉ㆍ〈청평악〉ㆍ〈오운개서조곡〉ㆍ〈향당교주〉ㆍ〈천세만세곡〉ㆍ〈유황곡〉ㆍ〈환환곡〉ㆍ〈하운봉곡〉ㆍ〈정읍악〉ㆍ〈낙양춘곡〉 등 10곡이 사용되었다. 사용된 음악 가운데 조선 전기의 당악곡명이 일부 보이지만, 〈여민락〉은 당악정재와 향악정재를 불문하고 5종 정재와 〈처용무〉에 두루 연주되었고, 〈낙양춘곡〉이 향악정재인 〈첨수무〉에 연주되는 등 반주음악에서 향ㆍ당악의 구분이 문란해졌다. 당악정재에는 당악을, 향악정재에는 향악을 반주했던 조선 전기의 전통이 이 시기에 이미 무너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향당교주〉가 조선 전기의 향ㆍ당악기 혼합편성의 의미를 벗어나 하나의 악곡명으로 새롭게 출현하였다. 순조 때에는 〈첨수무〉의 반주음악도 이 〈향당교주〉로 대체된다. 『속악원보(俗樂源譜)』에 수록되어 전하는 《관악영산회상》이 〈향당교주〉라는 곡명으로 〈처용무〉 반주에 쓰이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조선 말기에 이르러 조선 전기부터 전해오던 당악은 거의 소멸되어버리고 만다. 조선 말기에 속하는 『속악원보』에는 《종묘제례악》 중 진찬악 〈풍안지악〉(철변두악 〈옹안지악〉과 송신악 〈흥안지악〉도 같은 악보임), 《경모궁제례악》 중 진찬악 〈혁우곡(赫佑曲)〉ㆍ〈보허자〉ㆍ〈낙양춘〉ㆍ〈여민락만〉ㆍ〈령〉만 수록되었을 뿐 여타의 당악곡은 일체 수록되지 않았다. 그나마 〈(여민락)령〉도 조선 중기부터 이미 향악정재인 〈향발무〉와 〈광수무〉의 반주음악으로 활용되는 등 향악화되어온 지 오래이다. 같은 조선 말기의 사료로서 고종대의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1893[계사])에서도 당악정재의 반주악으로 〈향당교주〉가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그 다음이 〈보허자령〉이다. 김천흥을 비롯하여 봉해룡, 김기수, 박영복, 김태섭 등의 구술에 의하면 정재 반주악으로서의 〈향당교주〉는 “《관악영산회상》 중 〈상령산〉의 처음부분, 즉 빈 각 부분만 가락을 넣어 달리하고 나머지는 같게 하면 된다.”고 한다. 이는 이왕직아악부 시절 이전, 즉 19세기 초반에 이미 〈향당교주〉가 《관악영산회상》의 〈상령산〉으로 확고하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조대에 〈처용무〉 반주로 쓰인 〈향당교주〉 역시 《관악영산회상》의 〈상령산〉일 가능성이 있다. 동일한 한 악곡을 용도에 따라 다른 명칭으로 부르는 사례에 속한다. 비록 순조 때 〈장생보연지무(長生寶宴之舞)〉ㆍ〈연백복지무(演百福之舞)〉ㆍ〈제수창(帝壽昌)〉ㆍ〈최화무(催花舞)〉 등 4종의 당악정재가 창제되기는 하였지만, 그 반주음악이 당시 이미 당악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당악의 부흥을 이끌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실정은 오늘날로 그대로 이어져 현재 고려 전래의 당악 중 〈보허자〉와 〈낙양춘〉 두 곡만 남았고, 〈여민락만〉ㆍ〈령〉과 함께 “당피리 중심의 음악”에서 핵심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
현재 연주되고 있는 당악은 《종묘제례악》 중 진찬악 〈풍안지악〉(철변두악 〈옹안지악〉과 송신악 〈흥안지악〉도 악보가 같음), 《경모궁제례악》 중 진찬악 〈혁우곡〉ㆍ〈보허자〉ㆍ〈낙양춘〉ㆍ〈여민락만〉ㆍ〈여민락령[본령]〉ㆍ〈정동방곡〉 등이다. 〈풍안지악〉과 그 축소곡인 〈혁우곡〉은 제례악이고, 〈보허자〉 이하 5곡은 관악합주곡으로서 모두 황종의 음고가 “c”라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세종대에 창작된 〈여민락만〉은 〈만〉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으며, 〈령〉은 그 악곡에서 〈해령〉이라는 새로운 악곡이 파생되어 나오자 “본래의 〈령〉”이라는 의미의 〈본령〉이라는 이름으로 연주되고 있다. 세조 때 창작된 진찬악 〈풍안지악〉에서도 〈혁우곡〉이 파생되어 나왔으며 여전히 종묘제례 뿐만 아니라 무대에서도 연주되고 있다.〈보허자〉 이하 5곡의 관악곡들은 본래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를 중심으로 하면서 그 악기편성이 당피리, 당적, 대금, 해금, 장구, 방향, 북인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이 5곡의 당악곡들은 20세기 이후 본래의 기능을 잃고 무대용 연주음악으로 바뀌게 되면서 기존의 방향이 편종과 편경으로 대체되었고, 그 편성 규모도 확대되었다. 그러나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점”에서는 여전히 당악의 속성을 그대로 유지하였다.
2015년에 출간된 국립국악원의 『피리정악보[觱篥正樂譜]』에 의하면, 그 후반부에 《종묘제례악》과 《경모궁제례악》 외에 황종의 음고가 “c”인 7종의 현행 관악합주곡의 악보가 수록되어있다. 이 7종의 관악합주곡들은 당피리 중심의 악곡들로서 황종의 음고가 동일할 뿐만 아니라 악기편성도 모두 동일하다. 그런 점에서 악보의 후반부에 수록된 관악합주곡들은 모두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점” 등의 당악의 속성을 지닌 악곡들에 속한다. 악보의 수록 순위에서 〈유황곡〉과 〈정동방곡〉이 《경모궁제례악》 다음에 자리한 것은 이 두 곡이 조선 전기에 문소전ㆍ광효전의 아헌과 종헌에도 연주되었던 점이 반영된 듯하다.
그런데 『피리정악보』 중의 관악합주곡에는 앞서 언급한 5종의 전통 당악곡 외에 〈유황곡〉과 〈해령〉이 더 들어가 있다. 〈유황곡〉은 조선 전기에 문소전ㆍ광효전의 아헌악으로 쓰이던 향악곡으로서 『경국대전』에도 향악취재곡목에만 포함되었으며, 그 악조도 <黃-太-仲-林-南> 5음을 구성 음으로 하는 전형적인 향악 “5음음계 평조”이다. 그리고 〈여민락령〉에서 파생된 〈해령〉의 음계는 선초에 5음음계의 평조와 계면조를 조합하여 새로이 생성된 속악7음음계로서 <黃-太-夾-仲-林-南-無>의 구조를 이룬다. 결국 〈유황곡〉과 〈해령〉은 악조 면에서는 당악과 거리가 멀지만 “황종의 음고가 ‘c’인 점”, “당피리가 중심이 되는 점” 등 당악의 속성을 지닌 면에서 당악의 대열에 합류되어 연주되고 있다. 전통 당악곡 중 〈여민락령〉의 경우, 『속악원보』시기만 해도 <黃-太-(姑)-仲-林-南-無> 의 음계구조를 지닌 악곡이었으나 아악부 악보에서 이미 “無”가 도태됨으로써 5음음계 평조의 악곡으로 바뀌었다. 〈유황곡〉이 비록 조선 전기부터 전형적인 향악으로 분류되긴 했지만, 〈여민락령〉이 전통 당악곡인 이상, 동일한 음계구조와 연주 조건을 갖춘 〈유황곡〉을 더 이상 당악으로부터 분리할 명분은 없을 듯하다.
한편, 중국 전래의 〈보허자〉는 〈낙양춘〉에 비해 향악화가 많이 이루어졌을 뿐만 아니라 그로부터 〈밑도드리〉ㆍ〈웃도드리〉ㆍ〈양청도드리〉ㆍ〈우조가락도드리〉 등의 파생곡들이 생겨났다. 4곡의 파생곡들은 모두 향악의 황종 음고인 “e♭”에 맞추어 연주하되, 〈밑도드리〉는 규모가 큰 관현악곡으로, 〈웃도드리〉ㆍ〈양청도드리〉ㆍ〈우조가락도드리〉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관현악, 즉 세악(細樂) 편성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곡들에 사용되는 피리는 향피리와 세피리이며 당피리는 사용되지 않는다. 또 별도로 현악기로만 연주하는 〈보허사(步虛詞)〉가 있어 관악기로만 연주하는 〈보허자〉와 대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악곡들을 통칭하여 〈보허자〉계 악곡들이라 하는데 〈보허자〉[관악]만 황종의 음고가 “c”이고, 나머지는 모두 “e♭”이다. 〈보허사〉는 황종의 음고가 “e♭”인 향악곡이기는 하지만 그 거문고 악보는 오히려 고악보 중의 옛 〈보허자〉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어 여러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한국음악사에서의 당악사는 통일신라시대로 소급되지만, 사료의 부족으로 인하여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아쉬움이 있다. 그러나 고려 예종대에 집중적으로 유입된 고려시대의 당악은 『고려사』 「악지」에 수록되어 전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가 가능하다. 특히 『고려사』 「악지」의 당악은 주로 송대의 사악으로 편중되었다는 특징이 있지만, 중국에서도 전하지 않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에 전해온 것과 제목은 같으면서 내용이 다른 작품이 수록되어 있어 중국학자들에게도 중요한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入唐求法巡禮行記』 『高麗史』 『宣和奉使高麗圖經』 『太宗實錄』 『世宗實錄』 『世祖實錄』 『正祖實錄』 『樂學軌範』 『增補文獻備考』 『新唐書』 『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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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