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가야금 음악에 사용된 2종 악조 가운데 하나
하림조는 신라의 가야금 음악에 사용된 악조 가운데 하나로서 ‘하림’은 낭성(娘城)에 소재했던 진흥왕의 별궁의 이름과 같고, 그 곳에서 우륵이 진흥왕에게 자신의 연주를 들려주었다는 점에서 하림궁과 상관되는 악조로 본다. 우륵은 신라로 건너온 뒤로 국원(國原)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에서의 그의 음악적 경험은 당시의 국원으로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하림조는 그러한 여건에서 탄생된 악조로서 현재의 충주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고 있는 악조라고 할 수 있다.
551년(진흥왕 12)에 진흥왕이 낭성의 하림궁에서 우륵과 이문이 새로 창작한 음악을 감상한 뒤로 만덕, 계고, 법지를 파견하여 우륵으로부터 가야금 음악을 전수받게 하였는데, 그들은 우륵이 가야국에서 창작한 11곡을 학습한 뒤 아정하지 못하다고 여겨 그것들을 5곡으로 줄였다. 우륵이 하림궁에서 연주한 새 노래나 세 사람에 의하여 요약된 5곡은 기존의 신라풍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진흥왕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마침내 가야금을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는 계기가 되었다.
하림조(河臨調)는 신라의 가야금 음악에 사용된 악조 가운데 하나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신라의 가야금 음악은 눈죽조(嫩竹調)와 함께 185곡에 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하면서 점차 유실되어 1430년(세종 12) 당시 옛 하림조와 눈죽조의 악곡들은 이미 다 유실되었고 단지 악조의 이름으로만 남아있었을 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세종대에 진행된 옛 악곡의 수집 사업은 하림조가 훗날 『악학궤범』에 청풍체(淸風體)라는 이름으로 재등장하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하림조의 “하림”은 진흥왕의 별궁인 하림궁과 이름이 같다. 551년(진흥왕 12)에 진흥왕은 국내를 순수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하림궁에 머물면서 우륵(于勒)과 이문(尼文)을 청하여 그들의 음악을 감상하였는데, 당시 우륵과 이문은 가야에서 창작했던 기존 악곡들을 연주하지 않고 새로운 노래를 창작하여 연주하였다. 하림조를 우륵이 연주한 장소인 하림궁과 연관지어 그 지역의 음악적 특징을 담고 있는 악조라고 한다.
현재, 『삼국사기』에 언급된 낭성이 청주의 낭성인지 불분명할 뿐만 아니라 하림궁의 위치 역시 청주인지, 충주인지 규명되지 않은 상태이다. 신라의 하림궁은 “강을 접해있는 궁”의 의미로서 명칭 등 여러 가지 정황상 “한강을 접하고 토성이 발견된 충주의 탄금대 부근이 확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다. 하림조는 명칭상 하림궁과 상관되는 악조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하림궁의 위치가 청주가 되던 충주가 되던 크게 관계하지 않는다. 우륵은 신라로 건너온 뒤로 국원(國原, 현재의 충주로 신라 경덕왕 때 중원으로 개칭되었음)에 안치(安置)되어 있었기 때문에 진흥왕의 특명은 한시적으로나마 그가 충주 반경을 벗어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국원 반경을 벗어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신라에서의 그의 음악적 경험은 당시의 국원으로 집중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하림조는 그러한 여건에서 탄생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충주 지역의 정서를 담아낸 음악에 활용되었던 악조로 추정된다. 충주 일대는 본래 백제의 영토에 속했지만, 진흥왕이 차지하기 직전까지 70여년간 고구려의 영역에 속하였기 때문에 당시 그 지역의 음악은 백제와 고구려의 정서를 담고 있었을 것이다.
진흥왕의 명을 받고 파견된 만덕(萬德), 계고(階古), 법지(法知)는 우륵으로부터 가야국에서 창작한 11곡을 학습한 뒤 그것을 5곡으로 줄여 아정한 음악으로 재정리하였다. 그들이 줄인 5곡이 앞서 진흥왕이 하림궁에서 감상한 우륵의 새 음악과 동일하였다는 사실은 진흥왕이 세 사람의 연주를 들은 뒤 “전에 낭성에서 들었던 음악과 다름이 없다”고 평가한 데서 드러난다. 우륵이 하림궁에서 연주한 새 노래나 세 사람에 의하여 요약된 5곡의 가야금 음악은 기존의 신라풍과는 다르다는 점에서 진흥왕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줄 수 있었고, 마침내 가야금을 신라의 대악(大樂)으로 삼게 되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우륵이 진흥왕 앞에서 가야금을 연주하였을 당시 우륵이 새로 지은 음악이 하림조와 눈죽조라는 견해도 있지만, 『삼국사기』에는 우륵이 새로 지은 음악의 곡이름을 밝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림조와 눈죽조를 신라의 대악에서 가야금 음악에 사용된 악조라고만 기술하였을 뿐이다.
그런데 조선조 성종대의 문헌인 『악학궤범(樂學軌範)』에는 하림조로도 불리었던 2종의 악조가 전하고 있어 주목된다. 하나는 〈현금(玄琴)〉 조에 수록되어 전하는 최자조(嗺子調)로서 속칭 하림조라고 되어있다. 다른 하나는 〈현금〉조ㆍ〈향비파(鄕琵琶)〉조ㆍ〈가야금(伽耶琴)〉조에 전하는 청풍체(淸風體)로서 다른 이름으로 하림조라고 하였다. 전자는 5음음계 태주궁계면조(太簇宮界面調)로서 계면조 칠지(七指) 중의 막조계면조(邈調界面調)와 구성 음은 같지만 조현법과 사용 음위가 다른 별개의 악조이다. 후자는 '고ㆍ유ㆍ남ㆍ응ㆍ청대'로 구성된 5음음계 고선궁평조(姑洗宮平調)로서 평조 칠지(七指) 중 일지평조(一指平調)와 구성 음은 같지만 조현법과 사용 음위가 다른 별개의 악조이다. 신라의 가야금 음악의 악조인 하림조는 1430년(세종 12)에 이미 악조 이름으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에 후대의 최자조나 청풍체를 신라의 하림조와 직접 연관시키기는 어렵다. 더욱이 최자조는 조선 전기에 전하던 거문고곡 〈최자〉와 〈우식〉의 연주에 활용된 악조로서 가야금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후대의 기록에 왜 계면조의 최자조와 평조의 청풍체를 하림조라 칭하였는지, 그 두 악조는 신라의 하림조와 과연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충분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가야의 악사 우륵은 신라 진흥왕 때 가야의 현악기를 가지고 신라로 망명하였으나 신라 조정에 받아들여지지 않은 채 국원에 안치되었다. 신라로 건너온 뒤에 새로이 창작한 우륵의 가악(歌樂)을 들은 진흥왕은 만덕ㆍ계고ㆍ법지를 우륵에게 보내 음악을 학습하게 하였다. 우륵은 그들에게 자신이 가야에서 지었던 12곡을 전수하려 하였으나, 그들은 12곡을 다 배우기도 전에 이미 학습한 11곡을 5곡으로 줄여 아정하게 다듬었다. 처음에 우륵은 대로하였지만 그들이 재정리한 5곡을 듣고 감동하여 그들을 돌려보내 진흥왕에게 들려주게 하였다. 당시 간신(諫臣)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진흥왕은 나라의 잘 다스려짐과 혼란함은 음악과 관련되지 않는다고 여겨 가야의 현악기에 가야금이라는 칭호를 붙이고, 그 음악을 신라의 대악으로 삼았다. 오늘날 가야금이 전해질 수 있었던 것은 우륵이 새 악곡을 지어 진흥왕에게 들려준 점, 만덕 등이 우륵의 12곡을 5곡의 아정한 음악으로 재정리한 점, 진흥왕의 음악관이 함께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세종실록(世宗實錄)』 『악학궤범(樂學軌範)』
김천수, 「신라의 낭성, 하림궁은 충주 탄금대」, 『승인』 충청리뷰, 2022.12.01.
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