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률학(音律學)
율제(律制)의 구성과 응용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
○ 개설
일반적으로 “율학(律學)”은 형률을 다루는 학문으로 알려져 있지만 음악분야에서의 율학(律學)은 율제(律制)의 구성과 응용을 연구하는 학문 분야로서 일명 음율학이라 한다. 중국에서의 율학은 악학(樂學)과 함께 악률학(樂律學)이라 통칭(統稱)하기도 하는데, 음악에서 모든 음고 방면에 대한 연구는 율학의 범주에 속한다. 예를 들면, 발음체의 진동규율ㆍ악음의 수리(數理)관계ㆍ생율법(生律法)ㆍ율제관계ㆍ정율기 등은 모두 율학 분야에 속하며 역법(曆法)과 도량형(度量衡)과도 관계한다.
율학이라는 말은 오대 후주의 율학가인 왕박(王朴, 905~959)의 저술 『율학』에 처음 보이지만, 율학 이론의 시원은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의 “5성ㆍ6율, 12관이 돌아가면서 서로 궁(宮)이 된다[五聲、六律、十二管, 旋相爲宮]”이라고 한 선궁(旋宮)이론으로 소급된다. 오성(五聲)과 율려(律呂)는 율학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데, 그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문헌 역시 춘추시기로 주(周)나라 경왕(景王) 23~4년(b.c.522~521)에 영주구(伶州鳩)가 음악을 논한 내용을 수록한 좌구명(左丘明)의 『국어(國語)』 권3 「주어하(周語下)」이다. 경왕 23년(b.c.522)에는 오성이 거론되었고, 이듬해에는 12율을 음양(陰陽), 즉 육률(六律)과 육려(六呂)로 구분하여 언급되었다.
한편, 진(秦)대 여불위(呂不韋, ?~b.c.235)의 『여씨춘추(呂氏春秋)』 권5 「고악(古樂)」 편에는 “고대의 황제(黃帝)가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12율을 제작하게 하였다.”는 내용의 고사(故事)가 전한다. 여불위는 12율의 제작 시기를 황제(黃帝)의 시대, 즉 기원전 2500년 내지 3000년 무렵으로까지 소급하였을 뿐만 아니라 황제의 명을 받은 음악담당관[伶] 윤(倫)이 12율의 관을 만들 때 이미 음양(陰陽)을 구분하였다고 하였다. 그 때 윤이 12개의 대나무 통을 만들어 완유산(阮隃山) 아래로 가서 봉황(鳳凰)의 울음소리를 듣고 12율을 구별하였는데, 수컷이 우는 것을 여섯으로 하고, 암컷의 울음소리를 여섯으로 하여 황종지궁(黃鐘之宮)에 비견하여 알맞게 맞추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고유물 가운데 서주(西周)시기에 속하는 편종(編鍾)에 새겨진 음 이름을 보면 현재까지 사용되어온 12율의 명칭과 다르다. 따라서 여불위의 기술내용이 과연 얼마나 신빙성이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앞서 언급한 고대의 전적(典籍) 내용과 종합해보면 12율 자체의 유래는 매우 오래이며, 12율이 육률과 육려로 구별된 시기 역시 매우 이른 시기였음은 분명하다.
오성이나 12율을 산출하는 방법은 악조이론과 선후를 다툴 정도로 율학 이론에서 주요 관건 중의 하나이다. 선진시기에 속하는 관중(管仲)의 『관자(管子)』 「지원(地員)」편에는 “오성상구법(五聲相求法)”으로서의 “삼분법(三分法)”이 수록되었고, 그 삼분법은 여불위의 『여씨춘추』 「음률(音律)」 편에 이르러 “생율법(生律法)”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서한(西漢) 사마천(司馬遷, b.c.145 또는 b.c.135~? )의 『사기(史記)』 「음률」 편에서는 “오성상구법”과 “생율법”을 겸하였다. 『사기』 이후로 삼분법, 즉 “삼분손익법”은 역대 왕조에서 준순(遵循)하여 온 정통 “생률법”이 되었음은 물론, “오성상구법”의 정통으로도 자리하게 되었다.
『여씨춘추』의 「음율」 편은 율학 방면의 전문적인 연구라 할 수 있는데, 이후 전문적인 여러 연구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저술 혹은 편명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다. 『사기』에는 악학과 율학을 구분하여 「악서」와 「율서」 두 종류의 편명을 포함하였다. 송대 심괄(沈括, 1031~1095)의 『몽계필담(夢溪筆談)』에는 「악율」 권이 있어 악(樂)과 율(律)을 연용(連用)함으로써 악학과 율학을 동시에 취급하였고, 명대 주재육(朱載堉)의 『악율전서(樂律全書)』 역시 악과 율을 연용하였지만 그 내용에는 「악학신설」과 「율학신설」로 구분되어 있다. 채원정(蔡元定, 1135 ~1198)의 『율려신서(律呂新書)』나 주재육의 다른 저술인 『율려정의(律吕精義)』는 악과 율을 합쳐 율려지학(律呂之學)으로 일컬은 사례에 속한다. 이와 같이 율학은 악학과 합하여 악률학으로 논의되거나 독립된 저술 혹은 편명으로 논의되어왔으며, 그러한 여러 연구 결과들은 후대의 여러 학자들에게 연구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나라는 1116년(고려 예종 11)에 북송 휘종(徽宗)으로부터 대성아악이 유입되었고 그와 함께 아악의 표기에 사용된 12율이 도입되어 이후로 중국의 12율을 사용하게 되었다. 우리나라도 역사가 오랜 나라이고 고대부터 음악을 즐겨온 민족이기 때문에 우리식의 악제와 기보법이 별도로 존재하였겠지만, 그에 관한 기록이 일체 전하지 않기 때문에 전혀 그 실체를 상고할 수 없다. 통일신라시대부터 당나라의 속악이 유입되기 시작하여 고려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송나라의 교방악과 사악이 유입되어 전성을 이루었고, 또 대성아악이 유입됨으로 인하여 『고려사』 「악지」에서의 악곡 이름이나 등가ㆍ헌가ㆍ악장 등을 통하여 비로소 악학과 상관된 기록이 발견되지만 여전히 율학의 단서는 매우 미흡하다. 율학에 관한 한, 고려시대의 기록 중에는 대성아악의 정성(正聲)과 중성(中聲)에 관한 기록이 유일하고, 당악의 악조명은 수평시기 중국의 관련 사료를 상고하여 그 음계를 추고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북송 휘종대의 대성아악, 즉 위한진악(魏漢津樂)에는 황종의 길이를 9촌으로 삼은 정성과 8촌 7분으로 삼은 중성 등 음고(音高)가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악기들이 구비되어 있었으며, 의례가 행해지는 시기의 절기(節氣)에 따라 정기(正氣)가 이르는 때에는 정성의 악기를, 중기(中氣)가 이르는 때에는 중성의 악기를 사용함으로써 음양의 조화에 대비하였다.
중국의 율학은 특히 유가의 예악제도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역대 왕조의 궁정악에서 실천되었다. 중국의 경우, 하나의 왕조가 건국되면 황종율관(黃鍾律管)을 정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황종율관은 도량권형(度量權衡)의 기본 잣대가 되기 때문에 전국의 자[度]와 됫박[量] 및 저울[權․衡]을 통일하려면 황종율관을 우선적으로 제작해야 했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부터 중국의 제도를 따르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건국 초기에 황종율관이 별도로 제작된 적이 없다.
○ 조선시대
조선조는 유교를 국시로 삼은 나라로서 건국 초기에는 원대의 유학을 답습하였지만 1419년(세종 1)에 명나라로부터 『사서오경대전(四書五經大全)』과 함께 『성리대전(性理大全)』이 유입되었고 1432년(세종 14)에 경연(經筵)에서 비로소 『성리대전』을 강독한 뒤로 본격적으로 성리학으로 대변되는 송대의 유학 연구로 진입하였다. 그에 앞서 1430년(세종 12)에는 봉상판관(奉常判官) 박연(朴堧)이 상서한 조건을 가지고 예조와 의례상정소가 함께 의논하여 올렸는데, 그 내용 중에는 제사악의 당상ㆍ당하에 주나라의 육합(六合) 제도를 회복한 일, 종묘(宗廟)ㆍ사직(社稷)ㆍ원단(圜壇)ㆍ풍운뇌우(風雲雷雨) 등의 영신악(迎神樂) 변수(變數)와 소속궁(所屬宮)을 회복한 일, 종묘를 비롯한 각종 제례의 송신악(送神樂)을 바로잡은 일, 성악(聲樂)의 조화 외 중국의 황종과 합치되는 율관을 제작하여 성률을 바로잡자고 한 일 등 율학의 범주에 속하는 조목들이 포함되어있다. 이러한 내용들은 1425년(세종 7)에 예조에서 악학별좌 박연의 수본(手本)에 의거하여 올린 “악서찬집건의안(樂書撰集建議案)”이 있은 뒤로 약 5년에 걸쳐 이루어진 연구 성과이다. “악서찬집건의안” 이후로 1430년(세종 12)에 올려진 일종의 경과 보고서에는 당시 아악부ㆍ당악부ㆍ향악부 3부악이 모두 정제되지 않았는데 아악부가 더욱 심하다는 지적도 있다. 유가(儒家) 음악의 대표성을 띠는 아악을 연구하려면, 표준음고(標準音高)ㆍ음계(音階)ㆍ음역(音域)ㆍ악조(樂調)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율학 방면의 연구가 필수적이고, 악기의 제작과 제도 방면에도 율학이 직접 관련된다. 이 시기에 우리나라 아악의 음역이 12율4청성으로 제도화되었고, 아악 악조가 궁조 일색을 이루게 되었으며, 중국 속악7음음계와는 다른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속악7음음계가 창제되기도 하였다. 조선 전기의 "속악7음음계"는 세종 말기 완성된 4종 신악에 체현되었다.
경연에서 아직 『성리대전』이 강독되기 이전인 1430년(세종 12) 8월에 경연에서 『성리대전』중의 『율려신서(律呂新書)』를 먼저 강독하기 시작하였다. 『성리대전』은 주돈이(周敦頤)의 『태극도(太極圖)』ㆍ『통서(通書)』, 장재(張載)의 『서명(西銘)』ㆍ『정몽(正蒙)』, 소옹(邵雍)의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주희(朱熹)의 『역학계몽(易學啓蒙)』ㆍ『가례(家禮)』, 채원정의 『율려신서(律呂新書)』, 채침(蔡沈)의 『홍범황극내편(洪範皇極內篇)』 등의 저술과 주석을 수록한 전집이다. 그 중 『율려신서』의 강독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그 즈음 세종의 관심이 율관 제작에 집중되어있었음을 말해준다. 세종이 율관 제작에 뜻을 둔 것은 1425년(세종 7)에 해주에서 거서(秬黍)가 나고, 1426년(세종 8)에 남양에서 경석이 생산되자 옛 것을 개혁하여 새롭게 바꿀 의지가 생겨나 박연에게 편경을 만들기를 명하면서부터였다. 음고가 정확한 편경이 제작되려면 율관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어 있어야 음의 교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1430년(세종 12) 당시에도 여전히 아악이 갖추어지지 못한 상태였고, 황종율관도 아직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 있었던 것이다. 『율려신서』의 강독과 함께 세종은 여러 『악서(樂書)』들을 두루 열람하였다. 이러한 독서를 통하여 세종이 음악 제작(制作)의 오묘한 원리를 깊이 깨닫게 되자 악제(樂制)에 관한 논의가 새롭게 제기되었다. 우선, 세종은 예문관대제학 유사눌(柳思訥)과 집현전부제학 정인지(鄭麟趾) 및 봉상소윤 박연, 경시주부 정양(鄭穰) 등에게 구악(舊樂)을 정리하여 바로잡게 한 뒤, 정인지와 정양에게 명하여 주척(周尺)을 상고하여 바로잡은 뒤에 악보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주척을 바로잡으려는 목적은 올바른 황종율관의 제작에 있었기 때문에 비록 이 작업은 한 달도 못 되어 취소되었지만 임금 주도 하에 율학의 일종으로서 율관 제작이 시도되었던 사건으로 한국율학사에서는 일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세종대의 율관 제작은 주로 박연이 담당하였다. 박연의 율관 제작은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마침내 성공하였는데,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1433년(세종 15) 이전에 이미 완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1433년 1월 1일의 회례연(會禮宴)에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연주하였고, 거기에 사용된 악기들이 이미 완성되어 있던 율관에 맞추어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완성된 율관은 이후로 악기의 제작에서 음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였다. 『악학궤범(樂學軌範)』 권1 중 “십이율위장도설(十二律圍長圖說)”에 세주(細注)로 성종대의 사용 악기들은 모두 장악원에 전하고 있는 2벌의 동율관(銅律管)으로 교정한다고 하였는데 그 2벌의 동율관이 바로 세종대에 박연에 의해 제작된 동율관이었다.
조선 전기의 율학 이론은 1493년(성종 24)의 『악학궤범』에 수록되어 전한다. 그 권1에는 ①「60조[六十調]」, ②「시용아악십이율칠성도(時用雅樂十二律七聲圖)」, ③「율려격팔응기도설(律呂隔八應氣圖說)」, ④「십이율위장도설(十二律圍長圖說)」, ⑤「변율(變律)」, ⑥「반지상생도설(班志相生圖說)」, ⑦「양율음려재위도설(陽律陰呂在位圖說)」, ⑧「오성도설(五聲圖說)」, ⑨「팔음도설(八音圖說)」, ⑩「오음율려이십팔조도설(五音律呂二十八調圖說)」, ⑪「삼궁(三宮)」, ⑫「삼대사강신악조(三大祀降神樂調)」, ⑬「악조총의(樂調總義)」, ⑭「오음배속호(五音配俗呼)」, ⑮「십이율배속호(十二律配俗呼)」 등이 수록되었고, 권6~7에는 「아부악기도설(雅部樂器圖說)」과 「당부악기도설(唐部樂器圖說)」 및 「향부악기도설(鄕部樂器圖說)」이 수록되었다. 권1의 ①「60조」부터 ⑫「삼대사강신악조」까지는 모두 중국의 율학에 속하는데, ⑩「오음율려이십팔조도설」이 중국 속악조인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모두 아악과 상관된다. 그리고 ⑬「악조총의」와 ⑭「오음배속호」 및 ⑮「십이율배속호」는 주로 향악의 율학에 속한다. 이러한 여러 항목에서는 아악ㆍ당악ㆍ향악 3부악의 악조(樂調), 표준음고(標準音高), 음계(音階), 음역(音域) 등이 망라되어있다.
그리고 권6에는 특종(特鍾)ㆍ특경(特磬)ㆍ편종(編鍾)ㆍ편경(編磬)ㆍ건고(建鼓)ㆍ삭고(朔鼓)ㆍ응고(應鼓)ㆍ뇌고(雷鼓)ㆍ영고(靈鼓)ㆍ노고(路鼓)ㆍ뇌도(雷鼗)ㆍ영도(靈鼓)ㆍ노도(路鼗)ㆍ절고(節鼓)ㆍ진고(晉鼓)ㆍ축(柷)ㆍ지(止)ㆍ어(敔)ㆍ진(籈)ㆍ관(管)ㆍ약(籥)ㆍ화(和)ㆍ생(笙)ㆍ우(竽)ㆍ소(簫)ㆍ적(篴)ㆍ부(缶)ㆍ훈(塤)ㆍ지(篪)ㆍ슬(瑟)ㆍ금(琴)ㆍ독(纛)ㆍ정(旌)ㆍ휘(麾)ㆍ조촉(照燭)ㆍ순(錞)ㆍ탁(鐲)ㆍ뇨(鐃)ㆍ탁(鐸)ㆍ응(應)ㆍ아(雅)ㆍ상(相)ㆍ독(牘)ㆍ적(翟):약(籥)ㆍ간(干):척(戚) 등 아악의 연주에 쓰이는 아악기와 의물 및 무구가 망라되어있다. 각 악기에는 공히 도설(圖說)이 명시되었는데 무율악기들은 악기의 모양과 제도 즉 형제(形制)와 해설만 있는데 반하여, 유율악기들의 경유에는 악기의 형제 외에도 산형(散形)이 추가되어있다. 관악기류의 산형에는 악기의 운지법과 각 지공(指孔)의 음을 명시하였고, 현악기류의 산형에는 조현법을 명시하되 슬에는 각 현의 음을, 금에는 각 현의 음위를 명시하였다. 그와 같이 관악기류와 현악기류의 산형에 명시된 음들을 통하여 각 악기들이 발해내는 음의 수, 음고, 음역 등을 파악할 수 있는데 그러한 음들을 파악하는 일은 율학의 연구 범주에 든다.
또한, 권7의 「당부악기도설」과 「향부악기도설」에는 각각 방향(方響)ㆍ박(拍)ㆍ교방고(敎坊鼓)ㆍ월금(月琴)ㆍ장고(杖鼓)ㆍ당비파(唐琵琶)ㆍ해금(奚琴)ㆍ대쟁(大箏)ㆍ아쟁(牙箏)ㆍ당적(唐笛)ㆍ당피리[唐觱篥]ㆍ퉁소[洞簫]ㆍ태평소(太平簫) 등의 당악기와 거문고[玄琴]ㆍ향비파(鄕琵琶)ㆍ가야금(伽耶琴)ㆍ대금(大笒)ㆍ소관자(小管子)ㆍ초적(草笛)ㆍ향피리[鄕觱篥] 등의 향악기가 수록되어 있다. 당ㆍ향악기 가운데 박이나 교방고 같은 무율타악기를 제외하면 모든 유율악기에 각 악기별로 도설, 즉 악기의 형제ㆍ산형과 함께 해설을 가하였다. 그 악기들 중 관악기류의 산형에는 아부(雅部) 관악기와 마찬가지로 운지법과 각 지공에 해당하는 음이 명시되었고, 현악기류 중 안족이 있는 대쟁ㆍ아쟁ㆍ가야금에는 조현법과 각 현의 음이 명시되었으며, 고정 괘가 있는 거문고나 비파류(월금ㆍ당피바ㆍ향비파) 악기들은 조현법, 각 현의 안현법과 음위(音位)를 명시하였다. 아악기의 예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유율당ㆍ향악기들의 산형을 통하여 각 악기가 발하는 음의 수와 음역 및 음고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심지어 당비파ㆍ아쟁ㆍ거문고ㆍ향비파ㆍ가야금ㆍ대금 등에는 각 악조별로 산형이 다양하게 명시되어 있어 당시 악조의 종류와 구조를 파악하는데 중요한 정보가 된다. 이와 같이 악기의 산형을 통해 파악되는 음에 관련된 연구 역시 율학의 범주에 속한다.
상기와 같은 『악학궤범』의 율학 내용은 주로 세종대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이루어졌으며, 여타의 악학 부분과 함께 조선조 전 시기에 걸쳐 궁중음악의 전범이 되어왔다. 비록 정조대(1776~1800)에 『시악화성(詩樂和聲)』(1780) 권2의 「악률본원(樂律本元)」과 『악통(樂通)』(1791)을 저술하여 율학을 전문적으로 다루었지만, 전혀 시행된 바가 없이 한낱 연구로 그쳤을 뿐이다. 두 저술에서 공히 세종대 박연의 황종율관을 잘못된 것으로 비판하고, 심지어 『악학궤범』을 “대부분 속악이 아악을 어지럽힌 것”으로 평가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잘못이라 판단한 내용들을 바로잡는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의 악률 전통은 변함없이 그대로 유지되었다.
1780년(정조 4)의 『시악화성』은 주로 명대 주재육(朱載堉)의 『율려정의(律呂精義)』에 의거하여 이루어진 저술로서 권2의 「악률본원」 편은 “정율요결(定律要訣)”ㆍ“서척진수(黍尺眞數)”ㆍ“면멱적실(面冪積實)”ㆍ“후기측영(候氣測景)”으로 구분하여 각 조목 별로 역대의 사례를 상고한 뒤 이상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반면, 1781년(정조 15)의 『악통』은 청조 강희제(康熙帝)의 『어제율려정의(御製律呂正義)』(1714, 강희 53) 혹은 『어제율려정의후편(御製律呂正義後編)』(1746, 건륭 11)을 근본으로 삼고 주재육의 『율려정의』를 참고하여 이루어진 저술로서 강희제의 신법율수(新法律數)를 핵심주제로 삼았다는 점에서 『시악화성』 「악률본원」과 대비된다.
강희제의 신법율수는 중국 고대에 형성된 삼분손익법과 격팔상생법을 재해석함으로써 창출된 율학이론으로서 “강희십사율제(康熙十四律制)”로 대변된다. 강희제는 삼분손익법과 함께 역대로 율을 제작하는 원칙(제율지칙(製律之則))으로 간주하여온 격팔상생법을 “음을 살피는 표준[심음지법(審音之法)]”으로 정의하고는 삼분손익법과 함께 논해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격팔상생을 “7성음계의 8도 동성(同聲)”로 해석한 동시에 기존의 7성음계는 양률과 음려가 섞여 있기 때문에 그 음계구조가 잘못된 것이라 판단하였다. 음양이 서로 섞이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7성음계의 각 음간 거리가 균등한 “등거칠성음계(等距七聲音階)”라는 새로운 음계와 선궁방법을 창출하였다. “등거칠성음계”에서는 순전히 양률로만 구성되는 7성음계와 음려로만 구성되는 7성음계로 구분된다. 즉 “궁:黃, 상:太, 각:姑, 변치:㽔, 치:夷, 우:無, 변궁:潢[半黃鍾]”을 “양률 오성이변(五聲二變)”이라 하고, 汰[半太簇]가 청궁(淸宮)으로서 황종과 호응한다. 또한 “궁:大, 상:夾, 각:仲, 변치:林, 치:南, 우:應, 변궁:汏[半大呂]”를 “음려 오성이변”이라 하고, 浹[半夾鍾]이 청궁으로서 대려와 호응한다. “강희십사율제”의 양률과 음려 7음음계는 각 구성 음간의 음정이 모두 장2도로 균등하고, 궁과 청궁 사이가 14율이 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생겨난 “강희십사율제”는 역사상 전대미문의 악률이론으로서 당시 절대권력자였던 강희제는 그 “십사율제”에 의거하여 청조의 모든 궁정악기를 개혁하였다. 그 결과, 기존 12율4청성의 편종과 편경은 배이칙[侇]부터 응종까지 16율을 음양으로 구분하여 상하단에 각 8개씩 매달되, 양월에는 상단에 양의 종ㆍ경을 매달고 연주하고, 음월에는 상단에 음의 종ㆍ경을 매달고 연주하도록 하였다. 배소(排簫) 역시 양배소와 음배소를 갖추게 하였고, 훈(塤)은 황종훈과 대려훈을 두어 양월에는 황종훈을, 음월에는 대려훈을 사용하도록 하였으며, 적(笛)ㆍ지(篪)ㆍ소(簫)도 고선적(姑洗笛)ㆍ지ㆍ소와 중려적(仲呂笛)ㆍ지ㆍ소를 두어 양월에는 고선적ㆍ지ㆍ소를, 음월에는 중려적ㆍ지ㆍ소를 사용하도록 하는 등 혁신적으로 악기를 개량하였다.
정조가 청대의 독특한 율제를 연구하여 『악통』을 저술하였지만 오랜 기간 이미 깊숙이 뿌리 내려온 전통을 개혁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시악화성』권7에는 정조의 부친 경모궁(사도세자)를 위하여 아악 양식으로 지은 《경모궁제례악》이 수록되어있는데, “경모궁 예(禮)의 정문(情文)이 질서정연하여 송(宋)ㆍ명(明)보다 뛰어나니, 진실로 백왕(百王)의 법칙으로 삼을 만하다”고 극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조차 실제로 사용된 적이 없다. 『악학궤범』의 율학 내용은 그 근본이 북송 휘종대의 대성악(大晟樂)으로 소급된다는 점에서 정조에 의해 비판되기도 하였지만, 정조대는 물론, 조선조 존속기간 내내 궁정음악의 전범으로서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현재, 악기의 형제나 악조의 종류 등의 면에서 많은 변화가 발생하였지만, 『악학궤범』에 수록되어있는 악기 도설들은 율학적 변천과정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권1에 수록된 한국 율학의 근본적인 내용은 한국 율학의 총체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율학을 파악할 수 있는 잣대로서 연구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보고(寶庫)가 되고 있다.
『世宗實錄』 『弘齋全書』 권179, 「群書標記」. 『御製律呂正義』(四庫全書, 經部9, 樂類), 1714(康熙 53). 『御製律呂正義後編』(四庫全書, 經部9, 樂類), 1746(乾隆 11). 正祖, 『樂通』
김종수ㆍ이숙희 역주, 『譯註詩樂和聲』 「해제」, 김수현, 「『樂學軌範』권1에 나타난 중국 음악이론의 주체적 수용 양상에 대한 고찰 -‘時用’을 중심으로 - 」, 『조선의 악률론과 근대 음악론』, 경인문화사, 2021. 김종수, 「경모궁(景慕宮) 제례악 연구」, 『동양음악』 18, 서울대학교 동양음악연구소, 1996. 정화순, 「북송 휘종대의 정성과 중성에 관한 연구」, 『동양예술』 14, 한국동양예술학회, 2009. 정화순ㆍ김인숙, 「선초 속악의 7음음계에 관한 연구」, 『한국음악사학보』 69, 한국음악사학회, 2022. 萬依ㆍ黃海濤, 『淸代宮廷音樂』, 中華書局香港分局・故宮博物院紫禁城出版社, 1985. 天壇公園管理處, 『德音雅樂 - 天壇神樂署中和韶樂』, 學苑出版社, 2010.
정화순(鄭花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