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설립된 민간 음악교육기관으로서 조선정악전습소의 전신 조직
1909년 9월 15일에 발기회를 열었고 한석진(韓錫振) 등 9명의 발기로 조선악과 서양악을 두루 연구하고 가야금, 단소, 남창가곡 등을 교수하기로 하고 12월 29일 서부 자하동에 설립한 조직이다. 1911년에는 조선정악전습소로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교육을 시작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1907년 통감부의 통제를 받으며 과제개정이 일어나 국가 음악기관으로서의 장악원 같은 기관은 존재할 수 없이 궁중음악도 위기에 처해 있었으며 교회와 미션스쿨을 중심으로 서양음악이 학교 교육의 교과목이 되고 있었던 시기에 조선후기부터 중인층을 중심으로 형성해 온 가곡, 가사, 시조, 영산회상 등의 줄풍류 음악을 주도해온 계열의 사람들이 위기의식을 느끼며 민간 교육기관을 구상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1909년 9월에 발기회가 열리고 1909년 12월에 창립되었으며 1911년 6월에 조선정악전습소로 명칭이 개칭되었으므로 조양구락부로의 활동은 만 1년 반 정도의 시기이다. 이때는 아직 학생들의 모집이 본격화 되지 않은 듯 하다.
○ 설립목적
구 가악을 전습하여 신악을 발전하기 위하여 구가(舊歌) 남창과 여창의 우조 계면조, 가사 등과 구악 현금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 등을 포함하며 풍금과 사현금 등의 신악과 악리를 교수하고자 하여 설립한다고 하였다.
○ 설립시기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일람」에 의하면 1909년 9월 15일에 한석진씨 등 9명을 발기인으로 백용진의 집에서 발기회를 열고 명칭을 ‘조양구락부’라 이름 하였다고 하였다. 실제 설립은 발기회가 있었던 3개월 뒤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소식은 1909년 12월 29일자 황성신문과 1910년 1월 20일자 대한매일신보에 게재되었다.
1910년 7월에는 기로소로 본격적으로 이사를 하기 위해서 궁내부에 청원했다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조양구락부의 설립을 위해 황실에서 내탕금 2,400원과 매달 200원의 지원금을 하사하였다.
○ 조직과 음악활동
1909년 12월 말에 조직되어 1911년 6월까지 근 1년 6개월 동안 활동한 조양구락부는 아직 본격적인 교육기관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신문 기사에 의하면 “가야금 단소 남창 등 각종 가곡의 선수를 임원으로 선정하고 신선한 서양악까지 섞어서 신구를 참작 교수하기로 의정하였다”라고 한 것을 볼 때, 준비 단계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실제 모집 기사가 광고에 나지도 않았을뿐더러 교수와 관련된 기사도 없다.
교사와 커리큘럼, 학칙을 두고 모집의 형태로 설립한 근대적 전문 음악학교를 지향한 조선정악전습소의 전신으로서 조양구락부는 아직 연구소 단계였다고 할 수 있다. 1909년 12월에 설립되고 1910년 상반기에 활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8월 일제의 강제 병합 직전이라는 시기는 국권 상실의 위기에 직면하였으면서 황실에 의존하여 조직한 단체라는 면에서 더구나 황실 영선군 이준용에게 재정을 의지하였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강혜인, 「한국 개화기 음악교육 활동의 역사적 의의」,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0. 노동은, 「해제-조선정악전습소일람」, 『낭만음악』 겨울호 4/11, 낭만음악사, 1991. 박은경, 「한국 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 연구」, 『음악과 민족』 21, 민족음악학회, 2001. 신경숙, 「근대 초기 가곡 교습-초기 조선정악전습소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47,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7. 김수현, 「운초 장사훈의 근대음악사 연구성과-『여명의 동서음악』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70, 한국국악학회, 2021.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