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설립된 전문음악교육기관
1909년 조양구락부로 출발하여 1911년 설립된 조선정악전습소는 1914년까지 제3회 졸업생을 배출한 후 정악유지회의 경제적 후원이 없어지자 교육활동을 제대로 유지하기 어려웠다. 1919년 8회 졸업식에 31명이 배출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나 한석진 소장의 별세로 뒤를 이를 소장 선정에 파동을 겪다가 1919년 11월 28일에 명칭을 다시 전의 조양구락부로 개칭하여 재 정비를 시도했으나 다시 분규에 휘말려 1920년대 활동은 거의 미비했다. 이후 1935년에 조직된 수요회(水曜會)에 의해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해방 후 1946년에는 조선정악회를 결성하였고 이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명맥은 한국정악원(韓國正樂院)으로 전승됐다.
○ 설립 시기와 목적
조선정악전습소는 1909년 설립되었던 조양구락부가 1911년 6월에 명칭을 바꾸어 재설립하게 된 것이다. 1909년에 9월 15일에 백용진 집에서 열었던 발기회에서는 “구 가악을 전습하여 신악을 발전하기로 기원하여 구악은 현금,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와 기타 각종 음악을 포함하며 신악은 풍금과 사현금(바이올린)을 위주로 하며 아울러 악리를 겸하여 교수하며 음악보를 편집하기로 한다”는 취지와 내용을 밝혔다.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일람」에 의하면, 발기인은 김경남(金景南), 하순일(河順一), 조남승(趙南升), 한석진(韓錫振), 이병문(李秉文), 백용진(白瑢鎭), 고우경(高禹敬), 한규우(韓圭祐), 김현주(金顯炷), 한진구(韓鎭九) 등이다.
그러나 조양구락부에서는 아직 모집 광고를 내지 않았고 학제가 정비되기 전인 것으로 보여 설립시기는 명칭을 바꾸고 본격적인 모집광고를 내고 시작한 1911년을 설립의 시점으로 봐야 한다.
『매일신보』 1911년 6월 13일자 기사에는 조양구락부를 조선정악전습소로 개명한다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 조양구락부개명
조양구락부에서는 해당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라 개칭하고 歌樂의 교습과 기타 음악을 전습한다더라.
명칭을 바꾼 3개월 뒤에 조선정악전습소의 모집 광고를 낸 당시의 『매일신보』 기사를 보면 다음과 같다.
본소에서 가악을 발전할 목적으로 교수방법에 편리키 위하여 가보 악보를 연구편찬하고 학생을 모집하오니 입학에 지원하시는 첨군자는 본월 10일 내로 지원서를 본소에 제출하심을 요함.
1. 개학일자는 본월 15일 하오 5시
1. 조선가악
1. 서양음악
제 교과 및 제반 사건은 본 소에 와서 의논.
황토현 광화문통 기로소 (전화 1509)
조선정악전습소 고백
1913년 「조선정악전습소일람」의 규약에는 총칙이 있는데, 제1조에 “유래하던 가악을 유지하며 시의에 적용할 조율도 증보하여 사람의 전진하는 용기를 고발하며 교제하는 인정을 통창케 하기로 목적함”이라고 되어 있어 조선정악전습소 설립 목적을 밝히고 있다.
또한 조선정악전습소를 운영 유지 발전하기 위하여 1911년 2월에는 정악유지회(正樂維持會)를 발족하였다. 1913년 기록에 의하면 정악유지회의 유지회원은 이준용(李埈鎔) 박영효(朴泳孝) 윤택영(尹澤榮) 민병석(閔丙奭) 조중응(趙重應) 윤덕영(尹德榮) 유길준(俞吉濬) 이지용(李址鎔) 김종한(金宗漢) 민영찬(閔泳瓚) 박기양(朴箕陽) 김승규(金昇圭)이고 정악유지회의 취지는 다음과 같다.
正樂維持會 趣旨書
樂者는 歌를 和하여 聲을 作하는 機器라. 聖人이 德함을 渙發하심도 管絃의 彼之하고 龍將哲人의 雄氣情操와 閭巷兒童의 風謠 短章도 並皆登採樂譜하여 鼓之風動에 感發人情과 趣向勢道하는 一大 關健이라.
然이나 其中 有正 淫亂聲하니 果然 盛衰興發의 關係가 될 至重 且 大한 즉 此는 賢人 志士의 知音 較正이 아니면 其正音 雅樂을 難以維持故로 今에 一會를 組織하고 命名曰 正樂維持會라 하니 大抵 其委起於調陽俱樂部之創立이오 其結果則在於贊成員之同力이라 是以書之焉.
○ 조직과 구성원
학제 조직은 크게 가요부와 음악부가 있고 그 안에 이습과와 교수과로 나뉜다. 학과는 조선악과 서양악으로 그 안의 분과는 조선악에 성악과 기악으로 나뉘어 있으며 교수시간은 주로 매주 6회이며 서양악 기악만 횟수가 적다.
학과 | 조선악 | 서양악 | ||
분과 | 성악 | 기악 | 성악 | 기악 |
가(歌) | 현금, 가야금, 양금, 단소, 생황, 취악 병 | 성악, 악리, 창가, 곡조 | 풍금, 사현금 | |
교수시간 | 매주 6회 | 매주 6회 | 보통 매주 3회 전공 매주 5회 |
○ 단체의 청사와 역사적 변천
1911년 2월에 조직되었던 정악유지회가 같은 해 6월 16일 박영효(朴泳孝) 회장이 이왕가의 하사금을 받아 조선정악전습소라는 간판으로 재출범하였다. 1911년 11월 10일 하규일(河圭一)을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감으로 영입함으로써 조선정악전습소는 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비로소 가동하였다. 1911년 당시의 위치는 옛날 기로소(耆老所)를 수리하여 썼다가 1912년 5월 체신국에 그 장소를 빼앗기고, 재동(齋洞)에 있는 취운정(翠雲亭)에서 사무를 보았다. 또 1912년 7월 여악을 가르치기 위해서 중부(中部) 상다동(上茶洞)에 분실을 두었다. 전습소는 1913년에는 총독부의 통신국에서 사용하겠다고 해서 곤란을 겪었다는 기사가 있고 이후에는 청진동, 수송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인다.
1913년의 기록에는 당시 (1913년 10월 현재) 직원 및 교사 20명의 명단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취임 년월일 | 受持 敎科目 | 직명 | 씨명 | 본적 | |
---|---|---|---|---|---|
1909.12.29. | 소장 | 서부장 | 한석진 | 청주 | |
1909.12.29. | 교감 | 열사등 | 홍긍섭 | 남양 | |
1911.10. | 학감 | 전 군수 | 하규일 | 진주 | |
1911.06. | 양금 교사 겸 | 사무원 | 전 감독 | 백용진 | 수원 |
1911.06. | 생황 교사 겸 | 사무원 | 전 주사 | 한진구 | 청주 |
1911.03. | 회계 | 전사과 | 유종열 | 강릉 | |
1912.03. | 서기 | 전 주사 | 김효연 | 김해 | |
1909.12. | 남창 여창 교사 | 분교실 감독 | 전주사 전군수 | 하순일 | 진주 |
1909.12. | 남창 여창 교사 | 교사 | 幼學 | 이승환 | 전주 |
1909.12. | 현금 | 교사 | 정3품 | 김경남 | |
1909.12. | 현금 | 교사 | 전 주사 | 조이순 | 백천 |
1909.12. | 가야금 | 교사 | 아악사 | 명완벽 | 서독 |
1909.12. | 가야금 | 교사 | 아악사 | 함화진 | 양근 |
1909.12. | 가야금 | 교사 | 전 참위 | 한규우 | 청주 |
1909.12. | 양금 | 교사 | 전 주사 | 김상순 | 김해 |
1909.12. | 단소 | 교사 | 전사과 | 이춘우 | 전주 |
1909.12. | 단소 | 교사 | 정위원 | 조동석 | |
1912.09. | 서양악 | 교사 | 중학교 졸업 | 김인식 | 성주 |
1913.02.02. | 서양악 | 보조교사 | 중학교 졸업 | 염광섭 | 파주 |
1913.02.02. | 서양악 | 보조교사 | 중학교 졸업 | 하대홍 | 진주 |
1912년 조선성악전습소의 제1회 졸업생은 조선악과 5명과 서양악과 13명, 모두 18명이었다. 1913년 제2회 졸업생은 조선악과의 이상준(李尙俊)을 비롯한 13명, 서양악과에는 성악 전공의 홍영후(洪永厚)를 비롯한 7명, 모두 20명이었다. 3회 졸업생을 정점으로 해서 그 후부터 입학생이 차츰 줄었고, 1916년부터는 친일단체 교풍회(矯風會)의 개입으로 말미암아 한석진, 홍긍섭, 하규일, 한진구 등이 조선정악전습소를 떠난 뒤에 교육기능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19년 제 8회 졸업식에 현금과 6명, 가야금과 5명, 양금과 20명 등 모두 31명이 졸업한 것으로 이후 졸업식에 관한 기사는 없다.
○ 관련 사료
「조선정악전습소일람」(1913)이 유일하고 공식적인 사료이다. 이 외에 신문기사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게재 일자 | 신문명 | 제목 | 내용 개요 |
---|---|---|---|
1911.06.13. | 매일신보 | 조양구락부개명 | 조양구락부에서는 해당 명칭을 조선정악전습소라 개칭, 歌樂의 교습과 기타 음악을 전습 |
1911.06.30. | 매일신보 | 조선정악전습소 | 조선정악전습소 내에 가요부 및 음악부 외 양 과가 25일에 교사 15인과 취악교사 등을 회동, 임명, 학감 홍긍섭씨가 출석. |
1911.08.18. | 매일신보 | 조선정악전습의 공청청구 |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가옥이 없어 총무 홍긍섭씨가 총재 박영효씨의 대리로 이왕직 차관 방문, 탁지부 장관과 교섭 |
1911.08.18. | 매일신보 | 병합기념일 참가단체 | 본사 주최의 병합기념 제등행열에 조선정악전습소 35인 참여 |
1911.09.02. 1911.09.03. |
매일신보 | 조선정악전습소 모집 광고 | 가악 발전을 목적으로 교수 방법에 편리키 위하여 가보 악보를 연구 편찬하고 학생을 모집 9월 10일 내로 지원. 1.개학일자-15일 하오 5시 1.조선가악 1.서양음악 |
1912.02.07. | 매일신보 | 無夫妓모집 | 중부 황토현에 있는 정악전습소에서 이영환 하순일 백용진 하규일 등이 각 지방에서 상경 두류하는 無夫妓女를 모집하여 해당 전습소 내에서 음악을 교습하고자 한다 |
1912.05.22. | 매일신보 | 시곡기생의 진보 | 작년 기생들이 조선음악을 배우고저 하여 조선정악전습소에 청원하고 며칠 동안을 배우는 중 기생의 포주(抱主)들이 음악을 배우지 못하게 하나 南部詩洞妓生)들이 연습할 처소를 수리중. |
1912.05.24. | 매일신보 | 음률가의 대책임-고대음악을 회복하여 성세문명을 찬양케 함 | 음악의 중요성 역설, 조선정악전습소의 저명한 인사의 씨명 거론-휘금에 윤용구, 거문고에 김경남, 이벙문, 가야금에 명완벽, 양금에 정경선, 단소에 조동석, 이춘호, 생황에 이중열, 조흥순, 장구에 윤경중, 가곡에 하규일 제씨. |
1912.08.29. | 매일신보 | 정악의 분교실-무부기 열심 교수 | 조선정악전습실 분교실에서 무부기 14명을 교수하는 중, 과정은 가사, 국어, 수신, 시조, 잡가, 법무, 승무, 검은고, 가야금, 양금, 생황, 단소, 습자, 도화, 내지춤, 사미센 등 |
1913.04.05.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의 증서수여식 |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5일 오후 2시 제2회 수업증서 수여식을 거행. |
1913.04.27.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의 곤란 | 조선정악전습소의 가옥은 이왕직의 소유인데, 총독부에 인계된 후로 통신국에서는 그 가옥을 사용하겠으니 속히 내어놓으라 함으로 갈 곳이 없어서 대단 곤란한 모양. |
1913.05.14. | 매일신보 | 천불등사와 주악-본원사의 천불등사 거행, 정악전습소의 음악합주 | 남부 영락정 삼정목에 있는 본파 본원사 대승교회에서 어제 오후 1시부터 명치천황을 봉도하기 위하여 천등불사를 거행하였다는데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임원 일동이 악기를 가지고 가서 음악을 행하였다더라. |
1913.11.14.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 서부장 초대 |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주최하여 본월 13일 오후 6시에 명월관에서 연회를 설하고 서부장 한석진씨를 초대. |
1914.03.10. | 매일신보 | 예단일백인(34)-이병문(李秉文) | 이병문이라 하면 음악계에 패왕으로 가히 지목한 것은 누구던지 염두하는 바이라, 금년이 59세이다. 지금 정악전습소 교사로 있다. 거문고 가야금 양금 장고 단소 남무 남녀청 소리, 여민락, 영산회상 취타와 기타 가곡이 모두 겸비 |
1914.06.07. | 매일신보 | 조선정악전습소 | 조선정악전습소는 창설 이래 경비가 궁색하여 폐지할 지경에 이르렀더니 창덕궁 창수궁 양 궁에서 각 1백원씩을 하사하시고 귀족 주변에서 50원씩 기부하여 유지케 된 바인데.. 몇 개인의 몰각 소치로 전습하던 20여명의 학원은 일제 퇴학하기로 청원서를 제출 |
1914.06.16. | 매일신보 | 정악교사 증빙 |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교사 일원으로 학원 20명에 대하여 교수 방법이 보급치 못함으로 학원 일동은 퇴학하기로 연서 청원하였다더니 추후 소문을 근거한 즉 일반 임원의 협의한 결과로 교사 3명을 증빙하여 목하 교수 중이라더라 |
1914.08.04. | 매일신보 | 강상악회의 풍파- |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그저께 마포강에서 음악회를 크게 설행하였는데 무부기 유부기 차례 다툼, 기생 한 명이 물에 빠지려 |
1915.06.06. | 매일신보 | 내선합동음악회 | 6일 오후 8시부터 경성호텔루에서는 내지음악가로 유명한 鈴木씨의 체경 중임을 기회로 자작 조중응씨가 조선정악전습소원 일동을 동반하여 내지음악과 비교 연구를 위하고 조선음악을 독주 |
1916.03.18. | 매일신보 | 대튀타 조합-구군악 조합설립 | 구군악대가 해산한 뒤로 생활이 어려우나 유지의 목적으로 다시 조합하여 청진동 조선정악전습소 안에 설치한다고. |
1916.08.13. | 매일신보 | 고 한석진씨의 장의 | 조선정악전습소 소장 한석진의 장례의식. 조선정악전습소원의 애도 곡으로 개시하고 기독교식으로. |
1916.09.19. | 매일신보 | 청년학관 음악과 | 종로 중앙청년학관에서 음악지원자 모집에 교수자는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 담임교사 홍영후가 담당. |
1916.11.19. | 매일신보 | 정악소장 신임 | 전습소 유지 회장 자작 조중응씨가 소장을 겸함으로 사무처리상에 불편함이 적지 않아 유해종씨가 소장을 피임. |
1919.10.14.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 졸업식 | 지난 12일에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제8회 졸업식을 거행, 현금과 졸업생 6인, 가야금과 5인, 양금과 20명 합계 31인. |
1919.11.12. | 매일신보 | 정악전습 신소장 | 조선정악전습소 소장 유해종씨 사면한 대신 홍긍섭씨로 선정. |
1919.11.17.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장 문제 | 소장 유해종의 퇴임 사유에 대해 해당 전습소 교원 등의 불공평한 수단으로 사면을 무리 권고함에 의함이 발로. 21일에 평의회를 개최한다고. |
1919.11.25.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문제 귀정 | 21일 오후 4시에 수송동 정악전습소에서 제2회 의사회를 열고 교사의 신분 외 망동을 논책, 해고하고 명완벽 외 7인 개선. 소장 최강, 회장 박기양, 부회장 유해종, 간사 예종석 이원남 외 4인. |
1919.11.30. | 매일신보 | 정악전습소 복구-조양구락부라 개칭 | 11월 28일 특별 총회를 열고 명칭과 규약 개정. (1)조양구락부로 전 명칭을 복구 (1)부원의 단순한 음악가와 본부 졸업한 남녀로 조직 (1)본부 직원 및 평의원 부원 중에서 선정. (1)규약은 조양구락부 원규칙 잉용 (1)조선정악전습소의 명의와 규칙 폐지. |
1920.02.04. | 매일신보 | 분규중인 조선정악전습소 | 조선정악전습소를 폐지, 정악전습소 문패를 떼고 조양구락부의 문패를 걸어서 임원 간에 분쟁이 생긴 사건 이후 근황 취재 중. |
1925.02.04. | 조선일보 | 비운의 정악전습소 | 비운을 걱정하는 졸업생들과 박영효 민병석 이병무 이재곤 등 제씨와 기타 동호자 간에서 정악전습소 유지회를 지난 1일 하오 3시부터 시내 종로통 5정목 이순훈씨의 집에 열고 일장 협의를 한 결과 회장 김승규씨, 이사 이중신, 심규섭 등 15명, 상무이사로 한귀호, 이연용, 최영숙, 이순훈, 이태하 등 5씨가 피선 |
1946.12.11. | 공업신문 | 조선정악회 결성 | 조선정악을 연구하여 고래 악을 온습하는 기관인 조선정악전습소는 일제 강점기 수년간 폐쇠되었든바 해방 후 사계 유지가 모여 지난 12월 1일 조선정악회를 결성하는데 사계 유지의 다수 입회를 바란다고 한다. 고문 함화진, 이병기 외 2명, 이사장 최영재 이하 |
1946.12.11. | 대동신문 | 조선정악회 신발족 | 위의 기사와 같은 내용. 고문-김용진 함화진 이병기 이혜구 장인식 이사장-최영재, 부이사장-홍덕유 김영도, 감찰-황종하, 이연용, 참여-민완식 김상순 최병제 성경린, 이사-최영재 홍덕유 |
1946.12.13. | 자유신문 | 조선정악회 결성 | 위의 기사와 같은 내용. 고문-김용진 함화진 이병기 이혜구 장인식 이사장-최영재, 부이사장-홍덕유. |
조선정악전습소는 전통음악을 세습에 의한 교육이 아닌 근대적 시스템을 도입하여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교육기관으로 설립했다. 물론 1909년 국운이 기울어져 가는 시기에 출발하여 일제의 한국 강제 병합 직후인 1911년에 설립된 단체로서 경비를 마련해주는 정악유지회의 회원은 왕실 소속의 작위를 받은 친일인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재정적 의존도가 심하였다는데 큰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악전습소의 학과와 분과, 학칙, 학제 등을 갖춘 교육시스템은 근대적이었으며 특히 전공과 다름이 없는 분과는 1950년대부터 대학의 국악과 커리큘럼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정악(正樂)이라는 용어가 전통적으로 사용된 미적 용어가 아닌 오늘날과 같은 장르 개념으로 형성된 것에는 조선정악전습소, 정악유지회 등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정악 분야가 선점이 되다 보니 상대적으로 민속악 분야가 소외되고 교육 커리큘럼으로 들어가는 데 시간이 걸리게 되었다.
강혜인, 「한국 개화기 음악교육 활동의 역사적 의의」,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0. 노동은, 「해제-조선정악전습소일람」, 『낭만음악』 ,겨울호 4/1, 낭만음악사, 1991. 박은경, 「한국 최초의 민간음악교육기관 조선정악전습소 연구」, 『음악과 민족』 21, 민족음악학회, 2001. 신경숙, 「근대 초기 가곡 교습-초기 조선정악전습소를 중심으로」, 『민족문화연구』 47,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2007. 김수현, 「운초 장사훈의 근대음악사 연구성과-『여명의 동서음악』을 중심으로」, 『한국음악연구』 70, 한국국악학회, 2021.
김수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