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나라의 기관이나 민간에서 활동하는 음악 연주자의 범칭(汎稱). ② 왕립음악기관에서 활동한 모든 음악 양식의 연주자. 조선 세조대(1455~1468) 악제 개혁 이후 악생의 대칭어로 쓰이면서부터는 속악 연주자를 뜻함.
악공은 나라의 기관이나 민간에서 활동하는 음악 연주자의 범칭이다. 왕립음악기관 연주자의 뜻으로 쓰인 경우,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아악과 속악 연주자를 두루 포함하였으나, 세조대(1455~1468) 악제개혁 이후 속악 연주자를 가리키는 용어로 한정하여 썼다. 악공은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을 뿐 아니라 문덕과 무공을 형상한 〈문무(文舞)〉ㆍ〈무무(武舞)〉및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를 추었다.
악공이 악생의 대칭어로 쓰이게 된 유래는 다음과 같다. 조선 초기에 양인 신분의 아악 공인(工人)이나 천인(賤人) 신분의 속악 공인은 모두 악공으로 불렸으며,【태조 1년 7월 28일(丁未), 세종 13년 9월 29일(庚寅)】 이들은 아악서ㆍ전악서(典樂署)ㆍ관습도감(慣習都監)에 소속되어 있었다.
아악서의 악공은 본래 제향을 위해 설치한 것이지만,【세종 즉위년 8월 19일(丙申)】1430년(세종 13)부터 조회에 아악을 쓰고, 1433년(세종 15)부터 회례연에서도 아악을 쓰게 됨에 따라, 아악서의 악공만으로 이를 감당할 수 없으므로 향당악차비악공으로 하여금 조회ㆍ연향에서 생(笙)ㆍ 화(和)ㆍ관(管)ㆍ약(籥)ㆍ적(笛)ㆍ지(篪)ㆍ훈(塤)ㆍ부(缶)ㆍ종(鍾)ㆍ경(磬)ㆍ삭고(朔鼓)ㆍ응고(應鼓)ㆍ건고(建鼓)ㆍ축(柷)ㆍ어(敔) 등의 아악기를 겸해서 연주하도록 하였다.【세종 13년 11월 15일(丙子), 세종 16년 1월 25일(癸卯)】
전악서 악공은 제례 및 조회ㆍ연향의 속악을 연주하였으며, 관습도감 악공은 주로 연향에서 여악의 정재를 반주하였으므로 교방공인(敎坊工人)으로도 불렸는데, 1423년(세종 5) 당시 관습도감에는 57명의 악공과 108명의 여기(女妓)가 속해 있었다.【세종 5년 3월 16일(丁酉)】
이렇듯 세종대(1418~1450)까지만 해도 악공은 아악ㆍ속악, 양인ㆍ천인의 구별없이 음악을 연주하는 공인을 두루 포함하는 용어였다. 그러나 1457년(세조 3)에 악학(樂學)과 관습도감을 하나로 합하여 악학도감이라 하고, 아악서와 전악서를 하나로 합하여 장악서(掌樂署)로 하는 악제개혁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악공을 악생의 대칭어로 사용하였다. 즉, 악생은 양인으로서 장악서 좌방(左坊) 소속의 아악 연주자, 악공은 천인으로서 우방(右坊) 소속의 속악 연주자를 뜻했다. 비록 악생과 악공으로 구분하였지만, 아악과 속악을 겸해 익힐 것이 권장되었다.【세조 3년 11월 27일(丁亥), 세조 4년 7월 1일(丙戌)】 1466년(세조 12)에 악학도감과 장악서는 장악원으로 일원화되었다.
○ 세조대에 아악 연주자와 속악 연주자를 구별하여 악생과 악공이란 용어를 썼고, 『경국대전』(1485년, 성종 16)에도 ‘아악은 좌방에 속하며, 악사(樂師) 2인과 악생 297인【예비인원 100인】을 모두 양인으로 충원한다. 속악은 우방에 속하며, 악사 2인과 악공 518인【매 10인마다 예비인원이 1인이다】 및 가동 10인을 모두 공천(公賤)으로 충원한다.【양인이 악공이 되길 원하면 들어준다】’라고 하여, 악생과 악공을 구분하여 썼다.
『경국대전』과 비슷한 시기에 편찬된『악학궤범』(1493년, 성종 24)에서도 ‘아악을 쓰는 사직ㆍ풍운뇌우ㆍ문묘(文廟)ㆍ선농ㆍ선잠ㆍ우사(雩祀) 등에 등가(登歌) 악생 62인, 헌가(軒架) 악생 124인, 문무(文舞) 악생 50인, 무무(武舞) 악생 58인이 동원된다.’ 라고 한 반면에, ‘속악을 연주하는 종묘ㆍ영녕전에 등가 악공 36인, 헌가 악공 72인,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 악공 38인,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 악공 71인이 동원된다.’ 라고 하여, 아악 연주자는 악생, 속악 연주자는 악공으로 구분하여 썼다.
그렇다고 해서 악생과 악공이 각각 항상 아악과 속악만을 연주하지는 않았다. 금(金)과 중고(中鼓)를 치고,〈납씨가(納氏歌)〉를 부르며 〈간척무(干戚舞)〉ㆍ〈궁시무(弓矢舞)〉ㆍ〈창검무(槍劒舞)〉를 추는 일을 담당한 자는 악생이었기 때문이다.
때로 악공과 악생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기도 하였으니, 1795년(정조 19) 혜경궁 회갑 연향에서 속악을 연주하였는데, 이를 그린 《원행정리의궤도(園幸整理儀軌圖)》의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에는 연주자들을 악생으로 표기했으며, 『춘관통고(春官通考)』(1788년경)에서는 아악이나 속악을 구별하지 않고 등가ㆍ헌가 연주자 및 문무ㆍ무무를 추는 사람을 모두 공인으로 표기하였다.
○ 『악학궤범』에 따르면, 종묘ㆍ영녕전 제향에서 악공이 아악기【편종ㆍ편경ㆍ특종ㆍ특경ㆍ노고(路鼓)ㆍ노도(路鼗)ㆍ진고(晉鼓)ㆍ절고(節鼓)ㆍ축ㆍ어ㆍ훈ㆍ지ㆍ관ㆍ생ㆍ우(竽)ㆍ화】와 향ㆍ당악기【방향(方響)ㆍ월금(月琴)ㆍ가야금ㆍ당비파ㆍ향비파ㆍ대쟁ㆍ아쟁ㆍ해금ㆍ태평소ㆍ피리ㆍ퉁소ㆍ당적ㆍ대금(大笒)ㆍ중금(中笒)ㆍ소금(小笒)ㆍ장고ㆍ교방고(敎坊鼓)】및 노래로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ㆍ《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을 연주하고,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ㆍ《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추었다.
『무자진작의궤(戊子進爵儀軌)』권2 공령(工伶)에 따르면, 〈처용무(處容舞)〉를 출 때 악공 5명이 원무(元舞) 역할을 하고 무동 5명이 협무(挾舞) 역할을 하였다.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는 앳된 모습이 요구되지 않으므로 무동이 아닌 악공이 처용을 담당한 것이다.
즉, 악공은 제례ㆍ조회ㆍ연향을 비롯한 국가 의례에서 악(樂)을 담당하였는데, 향ㆍ당악기뿐 아니라 아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으며, 문덕과 무공을 형상한 〈문무(文舞)〉ㆍ〈무무(武舞)〉및 가면을 쓰고 추는 〈처용무〉를 추었다.
○ 이상, 궁중음악을 중심으로 설명하였지만 민간 예능인을 가리키는 일반명칭으로도 악공이란 용어가 쓰였다.
악공은 나라의 기관과 민간에서 활동하는 음악 연주자의 범칭인데, 조선 세조대 이후 아악을 담당한 악생의 대칭어로도 쓰이기 시작하였다. 악공은 악기 연주와 노래뿐 아니라 춤도 담당하였다.
『태조실록』 『세종실록』 『세조실록』 『경국대전』 『악학궤범』 『무자진작의궤』 송방송, 『악장등록연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김종수, 『의궤로 본 조선시대 궁중연향문화』, 민속원, 2022.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