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회례(會禮)에서 연행된 악가무(樂歌舞)
회례는 임금과 신하 또는 중궁과 명부(命婦)가 술과 음식을 들며 화합을 도모하는 의례이다. 조선 건국 후 태종대(1400~1418)에 회례의 바탕이 되는 군신동연(君臣同宴) 의주를 만들었는데,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정재(呈才)를 연행하거나 『시경』의 시를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에 얹어 불렀다. 1433년(세종 15)부터 임금이 주관한 회례에 아악을 추가하였는데, 세종 후기 신악(新樂) 창제 이후 신악을 연향에 적극 도입하게 되면서, 늦어도 세조대(1455~1468)부터는 회례에 아악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회례에 고려 전래의 당악ㆍ향악(정재 포함)과 더불어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정재와 악곡 및 신악이 연행되었다.
회례는 임금이 외정전(外正殿)에서 왕세자와 종친ㆍ문무백관과 함께 화합을 도모하고, 중궁이 내정전(內正殿)에서 왕세자빈 및 내명부(內命婦)ㆍ외명부(外命婦)와 함께 화합을 다지는 의례이다. 술과 음식 및 춤과 음악이 수반되므로 회례연(會禮宴)이라고도 한다. 『국조오례의』(1474년)에 따르면, 임금이 베푸는 회례에서는 왕세자와 영의정이 각각 제1ㆍ2작(爵)과 치사(致詞: 축하문)를 왕에게 올린 후에 제3작부터 왕세자 이하 문무백관 등이 왕과 더불어 탕(湯)과 술을 들었고, 중궁이 베푸는 회례에서는 내명부 반수(班首)와 왕세자빈이 각각 제1ㆍ2잔과 치사를 중궁에게 올린 후에 제3잔부터 왕세자빈과 명부가 중궁과 더불어 탕과 술을 들었다. 회례의 기록은 한나라 시대부터 보이고 당송대에 유교적 원칙에 의거한 용악 절차와 제도가 구비되었다. 고려에서 원회(元會)가 행해지고, 조선 건국 후 태종대에 회례 의주의 바탕이 되는 군신동연 의주가 마련되었다. 회례는 대개 1년에 한 차례 정기적으로, 양기(陽氣)가 처음 싹트는 동지(冬至)나 한 해가 시작되는 정조(正朝:설날)에 조하(朝賀)를 마친 후 베풀었으며, 중궁 또는 왕세자 책봉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 베풀기도 하였고, 국상(國喪)이나 재변이 있는 경우엔 아예 베풀지 않기도 하였다. 제도 정비가 우선이었던 성종대(1469~1494)까지는 대개 1년에 한차례 정기적으로 회례연을 베풀었고 연산군대(1494~1506)에도 이런 관례가 이어졌으나, 중종ㆍ명종대(1506~1567)에는 동지나 설날에 회례연을 베푸는 것을 원칙으로 여기긴 했으나 재변 등의 이유로 매우 드물게 베풀었고, 선조대(1567~1608) 이후로는 정기적인 회례연이 사라졌으니, 실록에 1602년(선조 35) 중궁 책봉과 관련하여 회례연을 준비했고, 1651년(효종 2) 왕세자 가례와 관련하여 회례연 논의를 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왕세자 망삼(望三) 생신 기념 회례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조선 태종대 군신동연에서는 고려 전래의 당악인 〈하성조(賀聖朝)〉ㆍ〈태평년(太平年)〉, 당악정재인 《오양선(五羊仙)》ㆍ《포구락(抛毬樂)》, 고려 전래의 향악정재인 《아박(牙拍)》ㆍ《무고(舞鼓)》 및 조선에서 만든 당악정재인 《수보록(受寶籙)》ㆍ《몽금척》ㆍ《근천정》ㆍ《수명명(受明命)》, 향악정재인 《문덕곡》을 연행하고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에 『시경』의 시를 얹어 불렀다. 군신동연은 회례연의 바탕이 되었다.
세종 중기 아악 정비의 결과로 회례에서 아악을 쓰기로 정하여, 1433년(세종 15) 정월 회례연에서 처음으로 당악ㆍ향악과 함께 아악을 연주하였다.
임금의 출입, 왕세자ㆍ백관의 배례(拜禮) 및 제1작~제5작의 절차에 〈융안지악(隆安之樂)〉ㆍ〈서안지악(舒安之樂)〉ㆍ〈휴안지악(休安之樂)〉ㆍ〈수보록지악(受寶籙之樂)〉ㆍ〈문명지곡(文明之曲)〉ㆍ〈근천정지악(覲天庭之樂)〉ㆍ〈하황은지악(荷皇恩之樂)〉ㆍ〈수명명지악(受明命之樂)〉ㆍ〈무열지곡(武烈之曲)〉과 같은 아악 및 문무(文舞)ㆍ무무(武舞)가 연행되었다. 회례에 쓴 아악은 1430년(세종 12) 윤12월에 완성된 『세종실록』 「조회아악보」에 의거하여 만든 음악으로서, 주희(朱熹)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풍아십이시보(風雅十二詩譜)」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조선의 음악적 가치관에 따라 기존 선율을 재구성한 것이므로, 당시에 신제아악(新制雅樂)으로 불렸다.
임금의 출입에 연주된〈융안지악〉은 달에 상관없이 언제나 황종궁,신하의 배례에 연주된 〈서안지악〉은 언제나 고선궁으로서, 임금과 신하의 위계(位階)를 엄격히 하였다. 이와 반면에 술과 음식을 들 때 연주된〈휴안지악〉에서 〈무열지악〉까지의 아악은 수월용률(隨月用律)을 따랐으니, 자연의 질서를 따라 11월에 베풀면 11월에 해당하는 황종궁을, 1월에 베풀면 1월에 해당하는 태주궁을 썼다.
제5작 이후의 진식(進食)에서 진대선(進大膳)까지의 절차에서는 〈서자고지악(瑞鷓鴣之樂)〉ㆍ〈수룡음(水龍吟)〉ㆍ〈황하청(黃河淸)〉ㆍ〈만년환(萬年歡)〉ㆍ〈태평년〉ㆍ《오양선》과 같은 고려 전래의 당악【정재 포함】, 《아박》ㆍ〈무고》와 같은 고려 전래의 향악정재, 조선에서 만든 당악정재 《몽금척》, 고려의 〈서경별곡〉선율을 차용하여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정동방곡(靖東方曲)〉이 연주되었다.
이렇듯 당악ㆍ향악과 함께 아악이 연주된 회례는 임금이 주관한 경우이고, 중궁이 주관한 회례에서는 여전히 당악ㆍ향악만 연주되었다.
세종 후기에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ㆍ《봉래의((鳳來儀)》와 같은 신악이 창제되면서 연향에 쓰도록 적극 권장됨에 따라 늦어도 세조대(1455~1468)부터 회례에 아악을 더 이상 쓰지 않게 되었다. 세종 후기에 만든 《보태평》ㆍ《정대업》은 각각 임종궁평조와 남려궁계면조로서, 자연의 질서를 따랐다. 《보태평》은 사람의 기(氣)를 화창하게 펴주는 문덕을 찬미한 것이므로, 땅의 기운이 왕성하게 활동하여 초목이 무성하게 자라는 6월의 율인 임종을 택했고, 《정대업》은 악(惡)을 정벌하여 기를 꺾는 무공을 찬미한 것이므로, 초목이 쇠하여 시드는 8월의 율인 남려를 택한 것이다.
이후 연향에서는 고려 전래의 당악ㆍ향악(정재 포함)과 함께, 이를 바탕으로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수보록》ㆍ《몽금척》ㆍ《근천정》ㆍ《수명명》ㆍ《하황은》ㆍ《하성명(賀聖明)》ㆍ《문덕곡》ㆍ《정대업》ㆍ《보태평》ㆍ《봉래의》와 같은 정재 및 〈여민락만(與民樂慢)〉ㆍ〈여민락령(與民樂令)〉, 〈정동방곡〉 등이 연행되었다.
참고로 조회(朝會)는 엄밀히 말해서 조례(朝禮)와 회례(會禮)의 합성어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대개 조례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는 편이다.
회례악을 통해, 기를 화창하게 펴고 음양을 순조롭게 하며 위계를 분명히 하는 유교의 예악관을 볼 수 있다는 의의가 있다.
『태종실록』 『세종실록』 『국조오례의』 『경국대전』 『악학궤범』 정화순, 『조선 세종대 조회아악 연구』, 민속원, 2006.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의 본질과 여악제도의 변천』, 민속원, 2018.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문화사적 고찰』, 민속원, 2018. 임영선, 『조선 초기 신악 창제와 회례 용악』, 민속원, 2023.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