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樂)은 사회 구성원을 통합하게 하는 기능이 있으므로 예로부터 서울과 지방에 악인을 두었다. 이들은 제례(祭禮)를 비롯하여 책봉(冊封)ㆍ조하(朝賀)ㆍ조참(朝參)ㆍ존숭(尊崇)ㆍ연향ㆍ국왕행차 등 각종 궁중 행사 및 관아에서 활동하였다. 이들은 사악(賜樂)이라는 형식으로 조정 신하에게 내려지기도 하였다.
예(禮)는 마땅히 해야 하는 도리를 실천하여 사회정의를 이루는 바탕이 되고, 악(樂)은 기쁨을 샘솟게 하여 착한 심성을 기르는 바탕이 된다. 유학(儒學)에서는 인격 수양과 사회통합에 악의 효용성을 적극 인정하였으므로, 『주례』에 대사악(大司樂)과 악사(樂師)의 항목이 있을 정도로 악을 중요하게 여겼다.
신라에 음성서(音聲署), 고려에 대악서(大樂署)ㆍ관현방(管絃房)ㆍ교방(敎坊) 등의 음악기관이 있었고, 조선 초에는 악학(樂學)ㆍ전악서(典樂署)ㆍ아악서(雅樂署)ㆍ관습도감(慣習都監)의 음악기관이 있었는데, 세조대(1455~1468) 악제 개혁 이후 장악원(掌樂院)으로 통합되었다.
세조대 악제 개혁 이전엔 악공 또는 공인이란 용어가 아악과 속악【향악ㆍ당악ㆍ신악(新樂)】 연주자에 두루 통용되다가, 악제 개혁 이후 아악 연주자는 악생, 속악 연주자는 악공으로 구분되었다. 드물지만 향악기 연주자를 향악인, 당악기 연주자를 당악인으로 부른 실례도 있다.【세종 4년 8월 29일(癸丑)】
장악원에는 악공ㆍ악생ㆍ관현맹인ㆍ무동ㆍ여악 등과 같은 악인을 두었다. 악공과 악생은 연향 뿐 아니라 제례와 조정 의식에서 활동했으며, 관현맹인ㆍ무동ㆍ여악은 주로 연향에서 활동했다. 지방 관아에도 악공과 여기(女妓)가 있어서 사객에게 베푸는 연향과 관아 행사에 동원되었다.
악인의 활동을 조선시대 위주로 설명하자면, ‘악생을 둔 것은 오로지 제향을 위한 것이다’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악생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제사에서의 음악과 춤이다【중종 20년 12월 14일(戊戌)】. 악생은 풍운뇌우ㆍ사직ㆍ문묘ㆍ선농ㆍ선잠 등 아악을 쓰는 제사에서 음악과 일무(佾舞)를 담당했고, 속악을 쓰는 둑제(纛祭)에서도 음악과 춤을 담당했다. 1464년(세조 10) 이전엔 종묘에서도 악생이 아악을 연주하고 일무를 추었다.
속악을 쓰는 제례는 주로 악공이 담당하였다. 종묘ㆍ영녕전의 음악과 일무, 원묘(原廟)인 문소전(文昭殿) 음악, 장헌세자 사당인 경모궁(景慕宮)의 음악과 일무, 관왕묘(關王廟) 음악, 왕보다 먼저 승하한 왕비의 혼전(魂殿) 음악은 악공이 담당하였다.
악공은 망궐례(望闕禮), 영조칙(迎詔勅), 배표전(拜表箋), 하례(賀禮), 조참(朝參), 책봉, 존숭(尊崇), 문무과방방(文武科放榜), 문과전시(文科殿試), 생원진사방방(生員進士放榜), 대사례(大射禮), 친경(親耕), 궁중연향, 국왕행차 등, 각종 조정 의식에서 음악을 연주하였다. 과거 급제자와 그 부모를 영화롭게 해줄 때,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거나 연로한 신하를 존중하여 연향을 베풀어 줄 때 등에 임금이 악공과 여기(女妓) 및 무동을 보내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이를 사악(賜樂)이라고 한다. 조정관원이 부모를 위해 헌수연(獻壽宴)을 베풀 경우 장악원에 악공과 여기를 청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효행(孝行)을 권장하는 의미에서 허용되었으니, 악인은 나라의 공식적인 행사뿐 아니라 궁 밖 행사에서도 활동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 상주하며 활동하는 장악원 소속의 여기를 폐지하였으므로, 여기를 청한 것은 조선 전기로 한정된다.
여악은 나라의 크고 작은 연향에서 악가무를 공연하였다. 노래와 춤은 여악의 주특기이다. 세종대(1418~1450)와 중종대(1506~1544)의 35여년간을 제외한 조선 전기 대부분의 외연(外宴)에서는 악공이 음악연주를 하고 여기가 춤과 노래로 이루어진 정재(呈才)를 공연하였다. 내연(內宴)ㆍ친잠례(親蠶禮) 및 내정전(內正殿)에서의 존숭과 하례처럼 대비(大妃)와 중궁 및 명부(命婦)가 참석하는 의례에는 남자 악공이 들어갈 수 없으므로 여악의 연주가 필수적이었으며, 여악의 부족한 악기 연주는 앞이 보이지 않는 관현맹인이 보충해주었다.
18세기 후반부터 이런 관행에 변화가 일어났으니, 1795년(정조 19) 내연부터 휘장으로 시야를 막는 조치를 하고 악공이 음악 연주를 하였으며, 1827년(순조 27)부터 내정전의 존숭과 하례 때 악공이 문밖에서 연주하였다.
한편, 남녀유별의 모범을 보이고자 군신(君臣)이 참여하는 외연에서 남자아이들인 무동으로 하여금 정재를 공연하도록 하는 제도를 세종대(1418~1450)에 만들었으나, 조선 전기에는 뿌리 내리지 못했고, 인조반정(1623년) 이후에는 완전히 정착하여 외연에서는 언제나 악공이 음악 연주를 하고 무동이 정재를 공연하였다.
악인의 활동 중에는 진이부작(陳而不作) 형태도 있다. 상(喪)을 당한 후 6일째 되는 날 성복(成服)을 하고 왕위계승을 할 때 악기를 진설하지만 연주하지는 않았다. 다섯달이 지나 장례를 지내기 위해 산릉에 갈 때도 살아생전의 행차처럼 악공이 악기를 들고 따르지만 연주하지는 않았다. 혼례 때도 진이부작하였다. 유교적 관점에서 혼인은 어버이의 뒤를 잇는 것이므로 감상(感傷)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홍수, 흉년과 같은 재변이 있으면 궁중의식에서 악기를 진설하되 연주하지는 않았다. 악의 본질인 화평함을 늘 가까이하는 의미에서 악기를 진설하지만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는 소리내지 않았던 것이다.
악인의 수는 세월에 따라 변화가 있는데, 『경국대전』(1485년, 성종 16)에는 ‘좌방악사 2인, 악생 297인, 우방악사 2인, 악공 518인, 가동 10인’으로 규정하였고, 『속대전(續大典)』(1746년, 영조 22)에는 ‘좌방악생 195인, 우방악사 5인, 악공 441인’으로 규정하였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1867년, 고종 4)에는 ‘좌방전악 7인, 우방전악 18인, 좌방악생 90인, 우방악공 167인’으로 규정하였다.
조선 전기에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활동한 여기의 수는 세종대에 100명 남짓 있었고 『경국대전』에 150명으로 규정하였는데, 중종대(1506~1544)는 연산군대의 황음(荒淫)을 개혁하는 분위기 속에서 70명으로 줄였으며, 광해군 말년에는 143명이었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서울에 상주하며 활동하는 장악원 소속의 여기를 폐지하였다. 『속대전』에 ‘진연을 베풀 즈음 외방에서 여기 52명을 뽑아 올리는데, 특지(特旨)가 있으면 가감한다’라고 하였다. 내연을 위해 외방에서 여기를 불러올려 쓰고, 연향을 마치면 외방으로 내려보냈다.
조선 전기에 외연에 무동을 쓴 시기는 35년가량에 지나지 않았는데, 무동을 쓴 세종대엔 정원이 50명, 중종대엔 30명이었으며, 외연에 무동을 쓰는 제도가 완전히 정착한 조선 후기에는 20~30명이었다.
관현맹인의 수는 1430년(세종 12)에 관현맹인을 18명 뽑았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후기엔 대략 13명으로 고정되었다.
한편, 국상(國喪)이 나면 부장품(副葬品)을 같이 묻는데 그중에는 작게 만든 악기와 사람의 모형도 있었다. 1420년(세종 2) 태종비 원경왕후상(元敬王后喪)과 1422년(세종 4) 태종상에 각각 종(鍾)ㆍ경(罄)ㆍ훈(壎)ㆍ소(簫)ㆍ생(笙)ㆍ지(箎)ㆍ축(柷)ㆍ어(敔)ㆍ금(琴)ㆍ슬(瑟)ㆍ우(竽)와 같은 아악기 모형, 우(羽)ㆍ약(籥)ㆍ간(干)ㆍ순(楯)과 같은 일무(佾舞) 소도구 모형과 함께 목노비(木奴婢) 50개, 목향당악인(木鄕唐樂人) 20개를 부장하였다.【세종 2년 9월 13일(戊寅), 세종 4년 8월 22일(丙 午)】
1452년(단종 즉위) 문종 상에서는 아악기 모형과 함께 향당악기 모형 및 목공인(木工人) 33개, 목가인(木歌人) 8개, 목노비 50개를 부장하였다.【단종 즉위년 9월 1일(庚寅)】 목공인, 목향당악인, 목가인처럼 연주자 모형을 부장품으로 넣을 만큼, 악(樂)을 소중하게 여겼는데, 1751년(영조 27)에 사람 모형을 부장하는 것은 불인(不仁)하니 인형을 영원히 폐지하라고 명하여 악기 모형만 넣게 부장하게 되었다.【영조 27년 11월 26일(戊子)】
조선 전기에 편찬된『경국대전』에는 악사ㆍ악생ㆍ악공의 수를 800여명으로 규정했는데, 조선 후기에 편찬된 『속대전』에는 640명 가량으로 규정하여 많이 축소되었으며, 조선 말에 편찬된 『육전조례』에는 300명에 못 미칠 정도로 규모가 축소되었다.
『경국대전』 『속대전』 『육전조례』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국립국악원, 2001. 김종수, 『의궤로 본 조선시대 궁중연향문화』, 2022.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