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례악(朝禮樂)
궁중의 조회(朝會)에 쓰인 음악
조회악은 조하(朝賀)ㆍ조참(朝參)과 같은 조회에서 임금의 출입과 백관의 배례(拜禮)에 연주된 음악이다. 상참(常參)에서도 때로 음악이 연주되었다. 조선 건국 초에서 1430년(세종 12)까지는 조하와 조참에 다 같이 당악을 쓰다가, 1431년(세종 13)부터는 조하에는 아악을 쓰고 조참에는 당악을 썼다. 1447년(세종 29) 6월부터 신악(新樂) 〈여민락만(與民樂慢)〉과 〈여민락령(與民樂令)〉이 기존에 쓰던 당악과 함께 조참에 연주되었으며, 늦어도 성종대(1469~1494)부터 조하에 아악을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조하와 조참에 신악 〈여민락만〉ㆍ〈여민락령〉, 당악 〈성수무강만〉ㆍ〈낙양춘(洛陽春)〉ㆍ〈보허자령〉ㆍ〈환궁악〉이 연주되었다.
세자가 대리청정할 때는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ㆍ〈수룡음(水龍吟)〉ㆍ〈낙양춘〉 및 고선궁의 〈여민락만〉ㆍ〈여민락령〉이 조회악으로 쓰였다.
점차 당악의 사용이 줄어들면서 조선 말에는 조회악으로 〈여민락만〉ㆍ〈여민락령〉및 〈낙양춘〉이 주로 쓰였다.
조회(朝會)는 조례(朝禮)와 회례(會禮)의 합성어로 보이는데, 우리나라에서 현재 조례의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회례는 동지나 정조(正朝)에 군신이 모여 화합을 다지는 의식으로 술과 음식을 먹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다.
조회는 임금과 신하가 만나 국가의 위계질서와 임금의 존엄을 드러내는 의식으로서, 궁극적 목표는 공경히 대면(對面)하고 정사를 논하며 상하의 정을 통하게 하는 것이다. 고려에서 5일 간격으로 한 달에 여섯 번 조회하던 것이 조선에도 이어졌다. 조회를 통해 대신들 뿐 아니라 일반 관료들에게도 왕을 뵙는 기회가 주어짐으로써, 결속이 다져지는 계기가 되었다.
조회는 조하(朝賀)ㆍ조참(朝參)ㆍ상참(常參)으로 세분된다. 동지와 정조, 임금의 탄일 및 삭망(朔望) 같은 대조회(大朝會)는 치사(致詞)를 올리며 하례하므로 조하로 불리고, 5일 간격으로 하는 아일조회(衙日朝會)는 조참, 날마다 하는 조회는 상참으로 불린다. 『국조오례의』(1474년)에 따르면, 조하와 조참에는 품계가 있는 모든 관원이 참석하고, 상참에는 6품 이상의 관원만 참석한다. 격식 또한 서로 달라서 정지조하(正至朝賀)는 노부대장(鹵簿大仗)을 진설한 가운데 치사 및 산호(山呼)ㆍ전문(箋文)ㆍ예물(禮物)을 올리는데, 삭망조하는 노부반장(鹵簿半仗)에 치사만 올렸으며, 조참은 노부소장(鹵簿小仗)을 진설하고, 상참은 노부를 아예 진설하지 않았다. 조하와 조참은 각각 정전(正殿)과 정전의 문(門)에서 행하고, 상참은 대개 편전(便殿)에서 행하였다.
본래 조선시대 조회에서는 조하와 조참의 경우만 음악을 연주하였다. 왕위 찬탈이라는 약점을 지닌 세조가 1459년(세조 5) 9월에 정전에서 행하는 상참에 특별히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고, 1463년(세조 9) 5월에 편전에서 행하는 상참에도 연주하도록 함으로써 의도적으로 전례를 강화하였는데, 1470년(성종 1) 11월에 성종이 본래대로 상참에는 음악을 쓰지 말도록 하였다. 이후 1488년(성종 19) 정월에 예외 조항을 두었으니, 재변 등의 이유로 부득이 정지조하(正至朝賀)를 못하고 상참으로 대체한 특별한 상황에서는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였다.
조선 건국 초부터 조하와 조참에 다 같이 당악을 써왔는데, 세종 중기에 아악을 정비하면서, 1430년(세종 12) 9월에 ‘초하루 조하와 대조하에 아악을 쓰고 나머지 아일(衙日)에는 속악을 쓰기’로 정함에 따라, 1431년(세종 13)부터 정지와 삭일 조하에는 임금의 출입과 백관의 배례에 각각 아악인 〈융안지악(隆安之樂)〉과 〈서안지악(舒安之樂)〉을 연주했다. 조참에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당악을 썼으니, 어좌에 오를 때 〈성수무강(聖壽無彊)〉, 백관의 배례에 〈태평년(太平年)〉, 환궁에 〈보허자(步虛子)〉를 연주하였다.
세종 후기에 당악과 향악을 바탕으로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ㆍ《봉래의(鳳來儀)》와 같은 신악(新樂)을 만들고 이를 연향에 쓰도록 하였는데, 《봉래의》의 한 악곡인 〈여민락(與民樂)〉이 조회악으로도 채택되었다. 즉, 1447년(세종 29) 6월부터 조참 때 임금의 출궁과 환궁에 각각〈여민락만〉과 〈여민락령〉을 쓰도록 하였다. 물론 백관의 배례에는 여전히 당악을 연주하였다.
늦어도 성종대(1469~1494) 부터 조하에 아악을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조하와 조참의 음악이 같아졌다. 『악학궤범』(1493년)에 따르면, 조하와 조참 때 출궁에 〈여민락만〉 또는 〈성수무강만〉, 배례에 〈낙양춘〉, 환궁에 〈여민락령〉 또는 〈보허자령〉 또는 〈환궁악〉을 연주하였다.
성종대에 조하와 조참의 음악이 같아졌지만, 악대는 차등을 두어 조하에는 전정헌가(殿庭軒架), 조참에는 전정고취(殿庭鼓吹)를 진설했다. 조선후기에 이에 대한 구분이 흐려져 조참에도 전정헌가를 진설하기도 하였다.
조하와 조참에는 성종대 이후 전정헌가 또는 전정고취 이외에 전후고취(殿後鼓吹)라는 또 하나의 악대를 진설하여 위엄을 더하였다. 즉, 조회를 하기 위해 내전(內殿)에서 정전(正殿)에 가는 동안은 전후고취가 연주하고, 정전에 들어서면 전후고취는 그치고, 전정헌가 또는 전정고취가 연주하였으며, 조회를 마치고 임금이 정전을 나서면 다시 전후고취가 연주하여 내전으로 돌아가면 그쳤다.
『증보문헌비고』(1908년)에 ‘조의진하(朝儀陳賀)에 〈여민락령〉을 연주하고 백관의 배례에 〈낙양춘〉을 연주한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세종 후기 신악 창제 이후 〈여민락〉계 음악이 당악과 함께 조회악으로 쓰인 전통이 대한제국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세종의 건강이 좋지 않아 1444년(세종 26) 부터 세자가 섭행하였는데, 세자가 조참을 행할 때 처음엔 음악 없이 진행하다가 1445년(세종 27)부터는 당악을 쓰되 임금의 조참과는 곡목을 달리 하여, 세자의 출궁에 〈오운개서조(五雲開瑞朝)〉, 백관의 재배(再拜)에 〈수룡음(水龍吟)〉, 환궁에 〈낙양춘〉을 연주하였으며, 전정고취의 규모도 작게 하였다. 1447년(세종 29) 6월 이후는 임금의 조참과 마찬가지로 왕세자가 자리에 오를 때는 〈여민락만〉, 안으로 들어올 때는 〈여민락령〉을 쓰되, 임금의 조참과 차등을 두어 악조를 달리하여 황종궁이 아니라 고선궁으로 연주하였다. 세종대의 왕세자 조참 음악은 훗날 숙종과 영조대에 왕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기준이 되었다.
조선시대 조회악은 임금이 내전에서 나와 어좌에 오를 때, 백관이 배례할 때, 임금이 어좌에서 내려와 내전에 돌아갈 때 연주되었다. 원칙적으로 조하에는 전정헌가, 조참에는 전정고취를 진설하여 의례의 격식에 차등을 두었고, 임금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내전에서 정전에 오가는 동안에는 전후고취가 연주하였다. 왕세자가 대리청정하는 동안 조참할 때는 악대 규모와 악곡, 및 악조 등을 달리하여 임금의 존엄이 손상되지 않도록 하였다. 조회악으로 쓰인 〈여민락만〉ㆍ〈여민락령〉ㆍ〈낙양춘〉ㆍ〈보허자〉가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세종실록』 『세조실록』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증보문헌비고』 임미선, 『조선조 궁중의례와 음악의 사적 전개』, 민속원, 2011.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문화사적 고찰』, 민속원, 2018. 심승구, 「조선시대 상참의례의 성립과 발달」, 『朝鮮 世宗朝의 宮中朝會, 常參儀 考證硏究,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2003년 궁중의례 재현행사 보고서. 강제훈, 「조선 초기의 朝會 의식」, 『조선시대 사학보』 28, 2004.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