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향악
궁중 연향에서 연주된 음악과 춤
연례는 예로서 행하는 연향이라는 뜻이니, 회례연(會禮宴)ㆍ양로연(養老宴)ㆍ상수연(上壽宴)처럼 격식을 갖춘 연향이 이에 속한다. 조선 후기에는 앞에서 언급한 연향이 진연(進宴)이라는 틀에 담기게 되었다.
조선 건국 초 연향에서 새왕조를 찬미하는 악장이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에 얹어 연행(演行)되었는데, 세종 중기 아악 정비의 영향으로 임금이 베푸는 회례연과 양로연에서 아악이 향ㆍ당악과 함께 연주되었다. 아악이 궁중연향에 쓰인 시기는 세종대(1418~1450)와 그 이후 300년이 지난 영조대(1724~1776)에 한정된다.
세종 후기에 신악(新樂)이 창제되어 연향에 적극 쓰였다. 신악인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이 처음에는 연향에만 쓰였는데, 1464년(세조 10) 이후 제례악으로 채택되면서 연향과 제례에 같이 쓰였으며, 늦어도 선조대(1567~1608) 이후로는 제례에만 쓰여 현재는 제례악으로 전승되고 있다. 신악 《봉래의(鳳來儀)》 중 〈여민락(與民樂)【만(慢)과 영(令) 포함】〉은 창제 이후 꾸준히 조회 ㆍ연향에 쓰여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조선 후기에는 당악이 점차 줄어들면서 〈여민락〉, 〈향당교주(鄕唐交奏)〉, 〈가곡〉이 성행하였으며, 그 결과 당악은 〈낙양춘(洛陽春)〉ㆍ〈보허자(步虛子)〉 두 곡만 남아 전승되고 있다.
나라의 틀이 잡힌 고대부터 궁중 연향에서 음악과 춤이 연행되었다. 그러나 연례악이란 용어는 예(禮)가 악(樂) 못지않게 중요한 요소이므로, 예악을 중시한 조선을 중심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국조오례의』(1474년)에 따르면, 군신화합을 위한 회례연은 왕세자와 영의정이 먼저 임금을 송축하면서 제1ㆍ2작(爵)을 올리고, 제3작부터 임금과 신하가 같이 술을 마시되 9작을 넘지 않았으며, 노인 공경을 위한 양로연은 노인들이 배례(拜禮)한 뒤 전(殿)에 오를 때 임금이 어좌에서 일어나 공경을 표하고, 노인들에게 앉으라고 권한 뒤에 어좌에 앉았으며, 임금을 위한 송축 없이 바로 제1작부터 임금과 노인이 같이 술을 마셨는데, 5작을 넘지 않았다.
이외에 명절과 경사에는 대비전ㆍ왕ㆍ왕비에게 상수연을 올렸다. 조선 전기에 회례연과 양로연은 정기적으로 1년에 한 차례 행하고, 상수연(上壽宴)은 여러 차례 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으나, 후기에는 정기적인 회례연ㆍ양로연이 사라지고 진연【진풍정(進豊呈)ㆍ진연ㆍ진찬(進饌)ㆍ진작(進爵)】이란 틀 속에 상수연뿐 아니라 회례연ㆍ양로연의 본질을 담아내어, 특별히 경축할 일이 있을 때 진연을 행하고, 진연 후에 으레 서울과 지방의 사대부에서 천인에 이르기까지 노인들에게 쌀과 음식을 내려주고, 환곡(還穀)을 탕감해주는 등의 은택을 베풀어 백성들과 함께 하는 연향으로 만들어갔다.
연례에 쓰인 음악과 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모해왔으므로, 시기별로 항목을 설정하여 설명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 조선 건국 초 새 왕조를 찬미하는 악장과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
조선 건국 초 궁중 연향에서는 새 왕조를 찬미하는 악장이 고려 전래의 향ㆍ당악 선율에 얹혀져 연행되었는데, 당악정재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는 《몽금척(夢金尺)》ㆍ《수보록(受寶籙)》ㆍ《근천정(覲天庭)》ㆍ《수명명(受明命)》ㆍ《하황은(荷皇恩)》ㆍ《하성명(賀聖明)》ㆍ《성택(聖澤)》이 있고, 향악정재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는 《문덕곡(文德曲)》이 있으며, 고려 향악인 〈청산별곡〉과 〈서경별곡〉 선율을 바탕으로 각각 〈납씨가(納氏歌)〉와 〈정동방곡(靖東方曲)〉이 만들어졌다.
당악정재에 여러 당악곡이 연주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향악정재 양식으로 만들어진 《문덕곡》에서 조차 당악곡인〈소포구락령〉이 연주될 정도로, 조선에서 새로 만든 정재에 당악곡이 우세하게 연주되었으나, 고려시대와는 달리 우리 감성에 맞게 자기화하여 연주되었다.
○ 1433년(세종 15) 이후 회례연과 양로연의 아악 도입
세종 중기 아악 정비의 결과로 1433년(세종 15)에 임금이 베푼 회례연에서 아악이 연주되었으니, 임금의 출입 및 왕세자‧백관의 배례(拜禮)에 각각 쓴 〈융안지악(隆安之樂)〉과 〈서안지악(舒安之樂)〉, 제1작~제5작 절차에 쓴 〈휴안지악(休安之樂)〉ㆍ〈수보록지악(受寶籙之樂)〉ㆍ〈근천정지악(覲天庭之樂)〉ㆍ〈수명명지악(受明命之樂)〉ㆍ〈하황은지악(荷皇恩之樂)〉ㆍ〈문명지곡(文明之曲)〉ㆍ〈무열지악(武烈之樂)〉 및 문무(文舞)ㆍ무무(武舞)가 그것이다.
물론 제5작 이후 진식(進食)에서부터 제9작ㆍ진대선(進大膳)까지의 절차에서는 고려 전래의 당악과 향악 및 조선에서 만든 《몽금척》정재ㆍ〈정동방곡〉이 연주되었다. 임금이 베푼 양로연에서도 향ㆍ당악과 함께 아악이 연주되었다. 그러나 이는 세종대(1418~1450) 한때의 일이며 거의 300년이 지난 영조대(1724~1776)에 이르러서야 다시 썼을 뿐이다.
○ 세종 후기 신악(新樂) 창제와 연례에서의 파급력
세종 후기에 조종(祖宗) 공덕의 성대함과 건국의 어려움을 형용하고자 당악과 향악을 바탕으로 《정대업(定大業)》ㆍ《보태평(保太平)》ㆍ《봉래의(鳳來儀)》ㆍ《발상(發祥)》을 만들었는데, 이는 건국 이전 목조부터 태조ㆍ태종에 이르기까지의 방대한 사적(史蹟)을 다루었고, 신악(新樂)으로 명명되었다.
신악은 연향에 적극 권장되었다. 《봉래의》 중 〈여민락【만(慢)과 영(令) 포함】〉과 《보태평》 중 〈계우(啓宇)〉는 정재 양식과는 별개로 연주되기도 하였으니, 성종대(1469~1494) 연향에서 〈여민락만〉이 출궁ㆍ진찬안(進饌安)ㆍ진반아(進盤兒)ㆍ대선(大膳)ㆍ소선(小膳) 절차에 연주되고, 〈여민락령〉이 환궁과 춤 반주 음악으로 쓰였으며, 〈계우〉가 진주기(進酒器) 절차에 연주되었다.
《정대업》‧《보태평》은 연향에 쓰이다가 1464년(세조 10) 이후 제례악으로 채택되면서 연향과 제례에 같이 쓰였으며, 늦어도 선조대(1567~1608) 이후로는 제례에만 쓰여 현재까지 제례악으로 전승되고 있다. 《봉래의》는 세종~성종대를 거쳐 1630년(인조 8) 진풍정까지 연행되었는데, 한동안 뜸하다가 1893년(고종 30) 이후 다시 연행되었다. 그런데 세종~성종대의 《봉래의》와 고종대 이후의 《봉래의》는 〈용비어천가〉를 노래한 점은 같지만, 음악은 상당 부분 다르다. 전자는 〈전인자(前引子)〉를 연주하고, 한문과 우리말 〈용비어천가〉를 각각〈여민락〉및 〈치화평(致和平)〉ㆍ〈취풍형(醉豐亨)〉 선율에 얹어 부르고, 〈후인자(後引子)〉로 마무리했으나, 후자는 〈여민락령〉ㆍ〈보허자령〉ㆍ〈향당교주〉를 연주하고, 한문 〈용비어천가〉를 〈여민락〉에 얹어 불렀으며, 우리말 〈용비어천가〉를 가곡 〈농(弄)〉ㆍ〈계락(界樂)〉ㆍ〈편(編)〉 선율에 얹어 불렀다. 〈여민락〉은 조회ㆍ연향에 다양하게 쓰여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 연향악으로 도입된 〈환환곡(桓桓曲)〉ㆍ〈유황곡(維皇曲)〉
〈환환곡〉ㆍ〈유황곡〉은 본래 조선의 역대 왕을 찬미하는 악장을 당악 <중강령>과 향악 <풍입송> 선율에 얹어 부르는 곡으로 원묘(原廟)인 문소전(文昭殿) 제례에 쓰이던 악곡인데, 임란 이후 원묘가 폐지되면서 언제부터인가 연향에 도입되었다. 문헌상으로는 1706년(숙종 32) 진연에 〈환환곡〉ㆍ〈유황곡〉이 처음 나오지만, 이보다 더 이른 시기부터 쓰였을 가능성도 있다. 〈환환곡〉ㆍ〈유황곡〉은 1828년(순조 28) 진작에 이르기까지 연향에 지속적으로 쓰이다가, 그 이후 연향 관련 의궤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 당악곡 쇠잔 및 〈여민락【만과 영 포함】〉, 〈향당교주〉ㆍ 가곡의 활성화
당악이 조선 후기 연향에서 여전히 쓰였지만, 〈여민락〉계 음악과 〈향당교주〉가 점차 성행하여 현재 당악은 〈낙양춘〉ㆍ〈보허자〉 두 곡만 남게 되었다. 의궤를 통해 당악곡의 마지막 명맥을 살펴보면, 〈하운봉〉이 1809년(순조) 진찬, 〈천년만세(千年萬歲)〉ㆍ〈청평곡(淸平曲)〉ㆍ〈태평년〉이 1827년(순조 27) 진작, 〈오운개서조〉가 1829년(순조 29) 진찬, 〈수룡음〉이 1887년(고종 24) 진찬에서 연주된 바 있다.
향당교주는 본래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편성을 가리키는 용어였지만, 숙종대(1674~1720)에 악곡명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영조대(1724~1776)에 〈영산회상(靈山會上)〉을 뜻하는 공식명칭으로 인정되었다.
국립국악원 소장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에서 1893년(고종 30)에 연행된 것으로 밝혀진 정재 중, 《봉래의》의 우리말 〈용비어천가〉 및 《경풍도(慶豐圖)》ㆍ《만수무(萬壽舞)》ㆍ《사선무(四仙舞)》ㆍ《무애무(無㝵舞)》ㆍ《육화대(六花隊)》ㆍ《향령(響鈴)〉의 창사(唱詞)가 〈농락(弄樂)〉ㆍ〈계락(界樂)〉ㆍ〈편(編)〉과 같은 선율로 불리웠다. 《경풍도》ㆍ《만수무》ㆍ《사선무》ㆍ《무애(無㝵)》의 우리말 창사를 효명세자(孝明世子, 1809~1830)가 지었으니, 순조대(1800~1834)에 이미 정재에 가곡이 불리웠음을 알 수 있다.
연례와 조회에는 다같이 임금의 출입과 신하의 배례 절차에 공통적으로 음악이 연주되므로, 흔히 조회ㆍ연향악으로 불리기도 한다. 조선 후기 궁중 연례에서 연주된 〈농락〉ㆍ〈계락〉ㆍ〈편〉과 같은 가곡 및 〈향당교주〉는 당시 풍류방에서 유행하던 가곡과 《영산회상》 선율이란 점에서 당시 유행하던 음악이 궁중 연례에 반영되었음을 수 있다.
『악학궤범』 『정재무도홀기』 장사훈, 『국악논고』, 서울대학교 출판부, 1982.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의 본질과 여악제도의 변천』, 민속원, 2018.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