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악(女樂), 여공인(女工人), 여령(女伶), 기악(妓樂), 기생(妓生), 기(妓), 기녀(妓女), 창기(倡妓), 관기(官妓)
국가기관에 소속되어 신역(身役)으로 악가무(樂歌舞)를 공연하는 여자 예능인
여기는 서울과 외방의 국가기관에서 신역(身役)으로 악가무를 하는 여자 예능인이다. 풍기문란을 이유로 조선시대에 여악 폐지론이 여러 차례 대두되었지만, 내연(內宴), 내정전(內正殿) 하례(賀禮), 친잠(親蠶)처럼 대비전 또는 중궁전 및 명부(命婦)가 참여하는 의례에서는 여악이 필수불가결했으므로, 조선조 말까지 존속하였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는 장악원 소속 여기를 폐지하였으므로 내연을 베풀 즈음 외방여기(外方女妓)를 불러올려 쓰고, 연향을 마친 뒤에는 내려보냈다. 또한 18세기 후반부터는 서울로 선상(選上)하는 외방여기의 수를 줄이고자, 서울에 상주하며 활동하는 의녀(醫女)ㆍ침선비(針線婢)가 내연의 정재 공연에 참여하는 변화가 있었다.
『삼국유사』에 김유신과 기녀 천관(天官)의 이야기가 전하는 것을 보면, 기녀는 오래전부터 있었다.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까지 이어졌다. 조선은 성리학을 표방한 만큼 고려와는 양상이 달랐으니, 가장 중요한 변화는 1419년(세종 1) 6월 18일(신묘)에 세종이 관기(官妓) 간통 금지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만 해도 ‘관기 간통은 오래됐으니 금지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므로 묵은 관습이 바로 바뀌지는 않았지만, 이는 법률을 어기고 자행된 일이므로 발각될 경우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았다. 조선시대에 풍기문란과 외방관아 노동력 부족을 이유로 여악폐지론이 여러 차례 제기되었으나, 조선조 말까지 존속하였다. 이는 그들의 본업인 악가무의 기예가 사회적으로 유용했기 때문이다.
여기 또는 여악은 서울과 외방의 국가기관에서 신역으로 악가무를 하는 여자 예능인이다. 나이 어린 여기는 동기(童妓)로 불렸다. 서울에서 활동하는 여기는 경기(京妓), 각 고을의 여기는 향기(鄕妓) 또는 외방여기로 불렸다.
조선왕조의 기본 법전인『경국대전』(1485년)에 ‘여기(女妓) 150인을 3년마다 여러 읍의 연소한 비자(婢子)에서 뽑아 올린다’라고 규정해놓았다. 세조대(1455~1468) 악제개혁 이전에는 관습도감이 여기의 교육을 담당했고, 여러 음악기관을 장악원으로 통합한 1466년(세조 12) 이후부터는 장악원이 담당하였다. 장악원여기는 대개 외방에서 재예가 뛰어나 뽑힌 자들이며, 나라에서는 봉족(奉足)을 대주어 생활을 도왔다.
조선 전기에는 서울의 음악기관 소속 여기가 상설로 있었으나 인조반정(1623년) 이후는 이를 폐지하였으므로, 전기와 후기의 여기 활동 양상이 다르다.
노래와 춤은 여악의 주특기이므로 조선 초기에 대개 외연에서는 악공이 악기 연주를 하고 여기가 춤과 노래를 공연하였다. 특히 대비(大妃)와 중궁 및 명부(命婦)가 참석하는 내연에서는 악기 연주와 노래 및 춤을 여기가 모두 담당했는데, 여기의 악기 연주가 부족한 경우는 관현맹인이 보충하였다.
친잠례(親蠶禮) 및 대비전ㆍ중궁전의 존숭의례(尊崇儀禮)와 하례(賀禮) 처럼 대비나 중궁이 참석하는 의례에서는 여기가 음악을 연주하였다. 의장(儀仗)을 드는 일도 여기의 업무였는데, 인원이 부족할 때는 의녀가 여기 의복을 입고 보조하였다.
『악학궤범』(1493년)에 ‘사악(賜樂)할 때 악사(樂師)ㆍ여기ㆍ악공을 보낸다.’라고 명시한 것처럼, 임금이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여 연향을 베풀어주거나, 과거급제자와 그 부모를 영화롭게 해주고자 할 때, 연로한 신하에게 기로연(耆老宴) 또는 기영회(耆英會)를 베풀어줄 때 등에 악사의 인솔 아래 여기와 악공을 보내주었다. 한편, 조정관원이 부모를 위해 헌수연(獻壽宴)을 베풀 경우에, 장악원에 여기와 악공을 청하여 부모를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 효행(孝行)을 권장하는 의미에서 허용되었다.
외방에도 여기가 있어서 관아에서 베푸는 연향에서 악가무를 공연했는데,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서울로 뽑혀 올라와 장악원 소속으로 서울에 머물며 활동하였다. 즉, 경기의 충원은 외방여기의 중요한 소임이었다.
인조반정(1623년) 이후 장악원 소속 여기를 폐지했으며, 군신(君臣)의 연향인 외연(外宴)에서 악공이 연주하고 무동(舞童)이 정재를 공연하는 제도가 확립되었으므로, 전기에 비해 후기의 여악 활동은 많이 축소되었다. 외연에서 여기가 공연하지 않았으며, 내연을 베풀 때는 두어 달 전에 외방여기가 서울로 올라와 종합 연습을 거친 뒤 공연하고, 이를 마친 뒤 다시 내려갔을 따름이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여기를 선상기(選上妓)라 한다.
그런데 18세기 후반부터 의녀와 침선비가 정재에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1795년(정조 19) 화성에서 혜경궁에게 내연을 올릴 때 남자 악공이 휘장 밖에서 연주하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의녀와 침선비는 서울에 상주하며 활동했으므로 경기(京妓) 또는 약방기생ㆍ상방기생으로 불렸다. 조선 전기에 서울의 음악기관에 소속되어 악가무를 전업으로 한 여기를 가리키는 경기와 명칭은 같지만 양상은 서로 다르다.
악기연주는 한두 달 연습해서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악공으로 하여금 내연의 악기연주를 담당하게 하되 휘장을 둘러쳐서 시선을 차단하였고, 정재는 두어 달 연습을 통해 감당할 만하므로 서울에 상주하는 의녀․침선비에게 춤과 노래를 가르쳐 외방여기와 함께 정재를 공연하도록 함으로써, 내연을 베풀 즈음 지방에서 불러올리는 외방여기를 수를 줄일 수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서울에 일정 기간 상주하며 활동하는 장악원 소속 여기가 없으므로, 친잠례 및 대비전ㆍ중궁전 하례가 음악 없이 진행되었고, 사악(賜樂)에 여기 대신 무동이 동원되었다.
고려 이래로 관기 간통을 관습적으로 묵과해왔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대비나 중궁, 명부가 참여하는 의례에 여악이 반드시 필요했으므로 여악을 존속시키면서 풍기문란의 병폐를 없애고자 1419년(세종 1)에 관기 간통 금지령을 내리고, 외연에서는 악공이 연주하고 무동이 정재를 공연하는 제도를 만들었다.
송방송, 『고려음악사 연구』, 일지사, 1988.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연향의 본질과 여악제도의 변천』, 민속원, 2018.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