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부(兩部)는 두 갈래의 음악을 뜻하는 좌부ㆍ우부를 가리키기도 하고, 고려의 음악기관인 대악서(大樂署)와 관현방(管絃坊)을 가리키기도 한다. 좌부와 우부는 좌방(左坊)ㆍ우방(右坊)으로도 불렸으며, 고려시대에는 좌부가 중국계 음악인 당악(唐樂), 우부가 우리 음악인 향악(鄕樂)을 뜻하였는데, 신진사대부의 성장과 맞물려 1391년(공양왕 3)에 아악서가 설립되고, 조선 건국과 함께 세종대(1418~1450)에 아악이 일대 정비되면서 아악이 궁중음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지는 한편 당악이 유입된 지 몇백 년이 지나면서 우리 감성에 맞게 연주됨에 따라 조선시대에는 아악이 좌방의 위치를 차지하고, 향악과 당악이 우방을 뜻하게 되었다.
1123년(인종 1)에 서긍(徐兢, 1091~1153)이 송(宋) 사신으로 고려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고 돌아간 뒤에 40권으로 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편찬하였는데, 그 책에서 양부악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그 음악에는 양부가 있는데, 좌부는 당악이라는 중국음악[中國之音]이고, 우부는 향악이라는 오랑캐음악[夷音]이다. 중국음악의 악기는 모두 중국 제도 그대로이다. 향악에는 고(鼓)ㆍ판(版[板])ㆍ생(笙)ㆍ우(竽)ㆍ피리[篳篥]ㆍ공후(空侯[箜篌])ㆍ오현ㆍ금(琴)ㆍ비파(琵琶)ㆍ쟁(箏)ㆍ적(笛)이 있는데, 그 모양과 제도가 중국의 것과 약간 다르다.”
위에 언급된 향악기 명칭은 서긍이 본인이 아는 중국 악기 명칭을 붙인 것일 뿐, 실제 고려에서 그렇게 불린 것은 아니다. 어찌됐든 당시에 당악은 좌부, 향악은 우부에 속했음을 말해준다.
조선에 들어와 1402년(태종 2)의 실록 기사에 ‘양부악에서 그 성음이 어느 정도 바른 것을 취(取)하고 풍아(風雅)의 시를 참고하여 조회ㆍ연향악을 정했다’라고 하고는 당악과 향악을 열거했으니, 조선 초에도 여전히 양부악은 당악과 향악을 뜻했다.【『태종실록』태종 2년 6월 5일(丁巳)】
그런데 1485년(성종 16)에 완성된 『경국대전』에 ‘아악은 좌방에 속하고 속악은 우방에 속한다’라고 하여, 이전과 달라졌다. 즉, 아악이 좌방에 속하고, 당악과 향악 및 신악(新樂)을 아우르는 속악이 우방에 속하게 된 것이다.
한편, 『고려사』 세가 권14에는 ‘고려 예종 11년인 1116년에 왕이 서경에 갔다가 개경으로 돌아올 때 유수백관(留守百官)이 의장(儀杖)과 악부(樂部)를 갖추어 마천정에서 어가를 맞이하였는데, 대악(大樂)과 관현(管絃)의 양부(兩部)가 경쟁하듯이 기이하고 사치스럽게 힘을 쏟았다.’라고 기록하였으니, 고려시대의 대표적인 음악기관인 대악서와 관현방이 연주한 음악을 뜻하기도 한다. 고려말에 관현방이 폐지되고 아악서가 설치되었으며, 대악서는 전악서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으로 전승되었으므로, 양부의 의미도 자연스럽게 변하게 되었다.
양부악에 속하는 좌부ㆍ우부가 각각 고려이래 조선 건국초까지만 해도 각각 당악과 향악을 뜻하다가 세종 중기 아악 정비 이후 아악이 좌부, 당악과 향악 및 신악(新樂)이 우부 를 뜻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향악은 외래음악에 대해 우리 음악을 일컫는 용어이다. 통일신라 시기에 당악이 유입되었으므로, 새로운 음악인 당악과 구분하기 위해 이전부터 우리에게 있었던 익숙한 음악을 향악으로 호칭하게 되었다. 그런데 통일신라의 최치원이 지은 한시(漢詩) 〈향악잡영(鄕樂雜詠)〉을 보면 서역 유래의 춤과 음악이 포함되어 있다. 즉, 향악은 우리 고유의 음악뿐 아니라 당악 유입 이전에 전래되어 우리에게 익숙해진 서역음악까지 포함한다.
고려에서는 당악이 매우 성행하였다. 고려 광종(光宗, 재위 949~975) 때 송에 악기와 악공을 청하였고, 송에서는 악공을 파견하여 그 자손들이 대대로 당악을 가르쳤다.
『고려사』「악지」에 따르면, 향악을 연주한 악기는 거문고ㆍ가야금ㆍ향비파ㆍ대금ㆍ중금ㆍ소금ㆍ해금ㆍ향피리ㆍ장고ㆍ박, 당악을 연주한 악기는 대쟁ㆍ아쟁ㆍ당비파ㆍ당적ㆍ퉁소ㆍ당피리ㆍ방향ㆍ교방고ㆍ장고ㆍ박으로서, 무율 타악기인 장고ㆍ박을 제외하고는 당악과 향악을 연주하는 악기가 뚜렷이 구별되었으니, 당악과 향악이 그만큼 서로 다른 특징을 지녔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는 당악을 좌방 또는 좌부, 향악을 우방 또는 우부라 불렀다.
성리학을 국시로 삼은 조선에서는 예악에 의한 덕치(德治)를 이상으로 삼았으므로 세종대에 아악을 일대 정비하고 당악과 향악을 바탕으로 신악을 창제하였다. 당악이 유입된 지 몇백 년이 흐른 조선에서는 당악곡을 우리 감성에 맞게 바꾸어 연주하기 시작했으니, 향악기로 당악곡을 연주하기도 하고, 향악곡 연주에 당악기를 곁들여 음색을 풍부하게도 하였다. 이로 인해 당악기의 연주법이나 조율법 및 악기구조에 변화가 일어났다. 즉, 당비파와 아쟁에 당악조 뿐 아니라 평조와 계면조 같은 향악조 조율법이 생기었고, 당비파의 경우 향악을 연주할 때는 손톱에 골무같은 가조각(假爪角)을 끼고 손가락으로 줄을 쳐서 소리 내고, 당악을 연주할 때는 주걱처럼 생긴 나무 조각으로 줄을 쳐서 소리 냈다.
당피리는 고려시대에는 지공(指孔)이 아홉 개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지공이 여덟 개로 되어 향피리 지공 수와 같아졌다. 『악학궤범』(1493년) 편찬 당시에 당적은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지공이 일곱 개였지만 일곱 번째 구멍을 누르지 않다가, 이후 여섯 개로 변하여 대금의 지공수와 같아졌다. 퉁소는 고려시대에 지공 여섯 개와 아래 양옆의 구멍 두 개를 합하여 여덟 공(孔)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갈대청을 붙여 소리를 맑게 진동시키는 청공(淸孔)이 하나 더 늘어 아홉 개가 되었다. 당악기만 변한 것은 아니고 향피리도 고려시대에는 지공이 일곱이었는데 조선에 와서 여덟 개가 되었다.
그런데 『경국대전』의 향악공 시험곡목에서는 향악곡이 당악곡보다 훨씬 많고, 당악공 시험 곡목에서는 당악곡이 향악곡보다 훨씬 많으나, 신악은 각각 스물아홉 곡과 스물일곱 곡으로 거의 같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같이 향악공과 당악공의 신악 시험곡목 수가 서로 비슷하다는 것은 신악이 향악기와 당악기의 혼합편성으로 창제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시대에는 당악이 우리 감성에 맞게 연주되고 향ㆍ당악기의 혼합 편성이 일반적이 되는 분위기가 반영되어, 성종대(1469~1494)에 이미 당악ㆍ향악ㆍ신악을 아울러 우방으로 부르고, 아악을 좌방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한편, 『고려사』에서는 고려의 대표적인 음악기관인 대악서와 관현방을 양부로 호칭하였는데, 고려말에 관현방이 폐지되고 아악서가 설치되었으며, 대악서는 전악서로 이름이 바뀌어 조선으로 전승되었다. 아악서는 아악을 연주하고 전악서는 당악과 향악을 연주하였으므로, 양부의 의미가 변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려시대에는 당악이 좌부【좌방】, 향악이 우부【우방】에 속했는데, 조선시대에는 아악이 좌방, 당악ㆍ향악ㆍ신악이 우방에 속하게 되었다. 이는 외래에서 유입된 음악이 자기화(自己化) 과정을 거쳐 우리 음악을 풍요롭게 해주는 과정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당악곡인 〈보허자(步虛子)〉를 우리 감성에 맞게 연주했을 뿐 아니라 〈보허자〉에서 〈밑도드리〉ㆍ〈웃도드리〉ㆍ〈양청가락도드리〉ㆍ〈우조가락도드리〉와 같은 풍류방 음악을 파생시킨 것에서도 잘 드러난다.
『고려사』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태종실록』 『경국대전』 장사훈, 『증보한국음악사』, 세광음악출판사, 1986. 국립국악원,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송방송, 『증보한국음악통사』, 민속원, 2007. 김종수, 『조선시대 궁중음악의 문화사적 고찰』, 민속원, 2018.
김종수(金鍾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