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령패(山打令牌)
선소리 《산타령》을 부르며 연행을 하는 전문적인 소리꾼 집단
《산타령》은 ‘서서 노래한다’ 하여 선소리 《산타령》 또는 《입창(立唱)》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서서 《산타령》을 노래하는 소리꾼들을 선소리패라고 한다. 그 연행 형태는 메기는 소리를 하는 사람인 모갑이 한명이 장구를 치면서 소리를 메기면, 여러 명의 소리꾼이 소고를 치고, 발림춤을 추면서, 제창으로 받는 소리를 한다. 서울ㆍ경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산타령》을 경기 《산타령》, 서도에 전해져 내려오는 《산타령》을 서도 《산타령》이라고 부른다.
《산타령》은 원래는 사당패들이 민가나 절로 떠돌면서 부르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유랑 예인인 사당패들의 노래를 붙박이 예인이며 전문 소리꾼들이었던 선소리패들이 따라 부른 데서부터 서울ㆍ경기의 《산타령》이 비롯되었던 것이다. 이때 서울에는 이의택(李義澤)과 박종대(朴鐘大)라는 두 사람과 서도에는 허득선(許得善)을 비롯한 평양의 날탕패가 선소리패로 이름을 날렸다.
서울의 《산타령》은 이의택, 박종대에게서 신낙택(申洛澤)으로 전승되었으며, 서울 주변의 여러 곳에 선소리패가 생겼다. 고종 연간에 서울에 사당패들이 모여들어 오강, 즉 한강(漢江)ㆍ서강(西江)ㆍ마포(麻浦)ㆍ용산(龍山)ㆍ망원(望遠) 및 합정(合井)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구한말까지도 서울의 왕십리와 뚝섬을 잇는 ‘살고지다리’에서는 정월 대보름에 다리밟기 놀이가 행해졌는데, 이날 밤에는 서울ㆍ경기 일원의 선소리패(牌)들이 전부 모여 《산타령》을 부르며 밤새워 놀았다고 한다. 그 뒤 1920ㆍ1930년대에 이르러 원각사나 광무대 또는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선소리패들이 활동을 했고, 그 이후 일제 강점기를 지나 해방이 되자 예전에 이름을 날렸던 《산타령》의 명인들이 타계하고 이창배(李昌培)ㆍ김태봉(金泰鳳)ㆍ유개동(柳開東)ㆍ김순태(金順泰)ㆍ정득만(鄭得晩) 등 몇몇 사람들에 의해 《산타령》이 전승되었다. 이들은 사설학원 등을 통해 제자들을 가르치고 방송 출연, 음반 취입 등의 음악 활동을 하였다.
한편, 서도 《산타령》은 허득선에게서 날탕패로 유명했던 문영수(文泳洙)나 이정화(李正華)에게로 전해졌으며, 이들은 경기 명창 박춘재(朴春載) 등과 더불어 서도 《산타령》을 주고받으며, 서울 원각사에서 이름을 떨치기도 했다. 이때부터 《산타령》은 경기ㆍ서도의 구별 없이 선소리 명창들이면 다 부를 수 있게 되었다.
현재의 《산타령》 계보는 왕십리패를 이끌었던 이명길(李命吉)의 제자 이창배와 과천패 소완준(蘇完俊)의 제자 정득만의 소리가 전승되고 있다.
선소리 《산타령》은 196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9호 ‘선소리 산타령’으로 지정되었으며 그 이후 이창배의 후계자인 황용주(黃龍周)가 1992년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그러나 보유자 황용주와 명예 보유자였던 최창남이 2022년 작고하고, 현재는 방영기ㆍ이건자ㆍ최숙희ㆍ이장학 등의 전승교육사들과 국가무형문화재 ‘선소리산타령보존회’ 이수자, 전수자 등의 회원들이 경서도 선소리 《산타령》의 보존과 전승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창배, 『한국가창대계』, 흥인문화사, 1976. 신현남, 「산타령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 이보형, 「무형문화재전수실태조사(9)」, 『월간 문화예술』 100, 1985.
신현남(申鉉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