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자(櫑子)
원래 ‘초라니’는 요사스럽게 생긴 가면을 가리키는 말이다. 초라니패는 ‘초라니굿’이라 부르는 가면극 그리고 고사소리, 풍물, 얼른(요술), 솟대타기, 죽방울받기 등을 공연하며 떠돌아다녔다. 초라니굿은 서울ㆍ경기의 산대놀이 가면극과 경남의 오광대 가면극이 습합된 형태였다고 한다.
초라니패는 본래 잡귀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의식에서 가면을 쓰고 놀음을 벌이던 놀이패였다. 그러다 마을을 돌며 집집마다 들러 장구를 치고 고사소리를 부르며 동냥을 하는 놀이패로 변했다. 나중에는 고사소리 외에 여러 가지 연희 종목들을 함께 연행하는 예인집단으로 바뀌었다가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사라졌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ㆍ사당패ㆍ대광대패ㆍ솟대쟁이패ㆍ초라니패ㆍ풍각쟁이패ㆍ광대패ㆍ걸립패ㆍ중매구ㆍ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집단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마을과 장터ㆍ파시(波市)를 찾아 떠돌아다녔고, 대광대패와 솟대쟁이패는 주로 장터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초라니패 등 다른 연희집단들은 주로 마을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초라니패는 상이군인들의 통솔하에 옛 군인 또는 관노 출신이 주종을 이루고 있어서, 만약에 자신들의 초라니굿을 보아 주지 않거나 푸대접을 하게 되면 행패가 대단했다고 한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漕倉)을 열려고 할 때와 포구들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 사당)ㆍ창기(娼妓)ㆍ주파(酒婆)ㆍ화랑(花郞, 무당의 지아비인 광대)ㆍ악공(樂工)ㆍ뇌자(櫑子, 초라니)ㆍ마조(馬弔, 투전)ㆍ도사(屠肆, 소나 돼지의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당·광대·악공·초라니 등 유랑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들을 거론한 것은 이들이 조창에서 곡식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배들이 들고날 때와 포구들을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에는 정약용이 언급할 정도로 초라니패의 활동이 꽤 왕성했던 듯하다.
신재효본 《변강쇠가》에서는 변강쇠의 치상(治喪) 과정에 등장하는 초라니에 대해 ‘솔대 밑 친구’라고 표현했다. 솔대 밑 친구는 솟대쟁이를 이르는 말이므로, 초라니가 솟대놀이도 했다는 뜻이 된다. 초라니의 모습과 그 연희 내용은 신재효본 《흥보가》 중 〈놀보 박타는 대목〉과 《변강쇠가》 중 〈변강쇠의 치상 장면〉에 묘사되어 있는데, 후자가 더 자세하다.
다음은 옹녀가 변강쇠의 치상장면에 찾아온 초라니를 바라보는 내용이다.
(여인이 살펴보니) 구슬상모(象毛) 담벙거지 바특이 멘 통장구에, 적 없는 누비저고리, 때 묻은 붉은 전대 제 멋으로 어깨 띠고, 조개장단 주머니에 주황사(朱黃絲) 벌매듭, 초록 낭릉(浪綾) 쌈지 차고, 청(靑) 삼승(三升) 허리띠에 버선코를 길게 빼어 오뫼장(烏山場) 짚신에 푸른 헝겊 들메고, 오십살 늘어진 부채 송화색 수건 달아 덜미에 엇게 꽂고, 앞뒤 꼭지 뚝 내민 놈 앞살 없는 헌 망건에 자개관자 굵게 달아 당줄에 짓눌러 쓰고, 굵은 무명 벌통 한삼 무릎 아래 축 처지고, 몸집은 짚동 같고, 배통은 물항 같고, 도리도리 두 눈구멍 흰 고리테 두르고, 납작한 콧마루에 주석 대갈 총총 박고, 꼿꼿한 센 수염이 양편으로 펄렁펄렁, 반백이 넘은 놈이 목소리는 새된 것이 비지땀을 베씻으며, 헛침 버썩 뱉으면서 “예 오노라 가노라 하노라니 우리집 마누라가 아주머님 전에 문안 아홉 꼬장이, 평안 아홉 꼬장이, 이구십팔 열여덟 꼬장이 낱낱이 전하라 하옵디다. 당동당. 페.”
(여인이 기가 막혀 초라니를 나무라서) “아무리 초라닌들 어찌 그리 경망한고. 가군(家君)의 상사(喪事) 만나 치상도 못한 집에 장구 소리 부당하네.”
“예. 초상이 났사오면 중복(重服)막이 악귀(惡鬼) 물림 잡귀 잡신을 내 솜씨로 소멸하자. 페. 당동당. 정월 이월 드는 액(厄)은 삼월 삼일 막아 내고, 사월 오월 드는 액은 유월 유두 막아 내고, 칠월 팔월 드는 액은 구월 구일 막아 내고, 시월 동지 드는 액은 납월 납일 막아 내고, 매월 매일 드는 액은 초라니 장구로 막아 내세. 페. 당동당. 통영칠 두리반에 쌀이나 되어 놓고 명(命)실과 명전(命錢)이며 귀 가진 저고리를 아끼지 마옵시고 어서어서 내어놓오.”
이상과 같이, 변강쇠의 치상 장면에 나타난 초라니는 얼굴에 가면을 쓰고 요란한 복색을 한 모습으로 장구를 치면서 '액막이 고사소리'를 하고 있다.
프랑스 기메미술관 소장의 〈수국사(守國寺) 감로탱(1832)〉에는 장구를 어깨에 메고 솟대에 오르고 있는 초라니가 묘사되어 있다. 이 초라니는 얼굴에 가면을 착용하고 있는데, 앞의 인용문 중 초라니의 가면을 “도리도리 두 눈구멍 흰 고리테 두르고, 납작한 콧마루에 주석(朱錫)대갈 총총 박고, 꼿꼿한 센 수염이 양편으로 펄렁펄렁”이라 묘사한 것과 완전히 일치하는 모습이다.
초라니패는 지금은 사라졌지만, 정약용의 『목민심서』에 언급되어 있고, 신재효본 《흥보가》 중 〈놀보 박타는 대목〉과 《변강쇠가》 중 〈변강쇠의 치상 장면〉에서 여러 놀이패 중의 하나로 등장하고 있으며, 〈수국사(守國寺) 감로탱(1832)〉에도 묘사되어 있다. 이를 통해 초라니패가 조선 후기의 대표적 유랑예인집단 중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강한영 교주, 『신재효판소리사설집(全)』, 보성문화사, 1978 심우성, 『한국전통예술개론』, 동문선, 2001. 이호승ㆍ신근영, 『줄타기 솟대타기』, 민속원, 2020.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전경욱, 「감로탱에 묘사된 전통연희와 유랑예인집단」, 『공연문화연구』 20, 한국공연문화학회, 2010.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