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계희(滑稽戱), 배우희(俳優戱), 창우희(倡優戱), 소학지희(笑謔之戱), 조희(調戱), 화극(話劇)
전문적 배우가 인물과 소리 등을 흉내내거나 왕과 관리 등 지배층과 각종 시사 사건들을 풍자하는 골계적 성격의 연희.
우희는 ‘배우(俳優)의 놀이[戱]’라는 뜻으로 특히 배우의 골계적 연희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우희를 소학지희, 조희, 화극 등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우리의 여러 기록에 나타나는 명칭이나 중국과 일본의 예로 볼 때 우희가 가장 적당한 용어로 보인다. 중국에서는 배우가 골계희를 연행했기 때문에, 흔히 골계희를 배우희, 창우희, 우희라고 불렀다. 골계희를 시사희(時事戱)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골계희가 시사풍자적인 내용을 많이 연출했기 때문이다. 고려와 조선의 여러 기록에도 대부분 우희, 배우희, 창우희라고 표기되어 있다. 우희의 내용은 크게 (1)인물과 소리 등을 흉내 내는 우희, (2)왕과 관리 등 지배층과 각종 시사 사건들을 풍자하는 우희로 나눌 수 있다. 인물을 흉내 내는 우희는 특이한 신체 외형 또는 어떤 인물의 특징을 흉내 내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이다. 이에는 난쟁이, 외국인, 맹인, 술 취한 사람, 게으른 선비, 소박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 흉내 내기가 있다. 이외에 흉내 내기 우희에는 인물, 동물, 악기 등의 소리를 흉내 내는 연희도 있었다. 풍자하기 우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궁중과 민간에서 다양하게 연행되었다. 풍자하기 우희는 왕을 풍간(諷諫)하는 우희, 탐관오리를 풍자하는 우희, 시사를 풍자하는 우희, 유학자와 유학 경전‧유가 사상을 풍자하는 유희(儒戲) 등이 있다.
중국의 선진(先秦) 시기에는 연희자를 우(優)와 령(伶)으로 구분했다. 창우(倡優)는 가무를 위주로 한 전문 예인의 칭호였고, 배우(俳優)는 골계와 조소(調笑)를 전문으로 하는 직업 예인의 호칭이었다. 령(伶)은 악곡을 연주하는 사람을 말한다. 한(漢) 이후부터 송(宋) 전까지 우와 령을 ‘우령’으로 합쳐 부르면서, 우령은 가무, 음악, 백희, 골계를 직업으로 하는 연희자를 총칭하게 되었다. 중국에서 골계희는 ‘배우’에 의해 연희되었으므로, 흔히 골계희를 배우희, 우희라고 부른다. 한국의 우희 관련 연희는 『삼국사기(三國史記)』 「잡지(雜志)」에 수록된 최치원의 「향악잡영오수(鄕樂雜詠五首)」 중 〈월전(月顚)〉에서 처음 찾아볼 수 있다.
월전(月顚) |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고 머리털은 빳빳 | 肩高項縮髮崔嵬 |
팔소매를 걷은 군유(群儒) 술잔 다툰다. | 攘臂群儒鬪酒盃 | |
노랫소리를 듣고서 모두 웃어 젖히며 | 聽得歌聲人盡笑 | |
초저녁에 꽂은 깃발이 새벽을 재촉하네. | 夜頭旗幟曉頭催 |
이처럼 월전은 군유(群儒, 여러 난쟁이 또는 여러 선비)들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연희였다. 어깨를 높이고 목을 움츠리며 머리털은 빳빳하다는 묘사는 난쟁이의 외형 또는 난쟁이를 흉내 내는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우희의 내용은 크게 (1)인물과 소리 등을 흉내내는 우희, (2)왕과 관리 등 지배층과 각종 시사 사건들을 풍자하는 우희로 나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우희는 〈하공진(河拱辰)놀이〉, 상장군(上將軍) 정인경(鄭仁卿)과 장군 간홍(簡弘)의 주유희와 창우희(唱優戱), 〈당인희(唐人戱)〉, 〈공물바치기놀이〉, 『고려사』 염흥방(廉興邦) 조의 우희 등이 있다.
공신인 하공진을 흉내낸 우희는 일명 〈하공진놀이〉라고 불린다. 하공진은 고려 현종(顯宗) 1년(1010) 거란의 침입 시에 철군 교섭을 위해 적진에 들어갔다가 포로가 되어 연경(燕京)에 억류되었으나, 거란 왕의 온갖 회유에도 불구하고 끝내 변절을 거부하다가 처형된 충신이다. 이러한 하공진의 이야기를 배우들이 우희로 공연했는데, 이는 『사기(史記)』 〈골계열전(滑稽列傳)〉 중 우맹(優孟)이 초(楚)나라 장왕(莊王)에게 재상 손숙오(孫叔敖)의 후손을 후대하라고 풍간한 내용과 유사하다.
『고려사』 충렬왕 14년(1288) 왕이 베푼 연회에서 상장군 정인경은 난쟁이를 흉내내는 주유희를 했고, 장군 간홍은 창우희를 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리고 의종(毅宗) 19년(1165) 4월에 좌우번(左右番)의 내시들이 다투어 왕에게 놀이를 바쳤는데, 좌번은 모두 유사(儒士)였고, 우번에는 귀족 자제들이 많았다고 한다. 우번은 채붕(綵棚)을 설치하고 이국인이 고려에 와서 공물을 바치는 광경을 흉내내는 놀이, 즉 〈공물바치기놀이〉를 연출했다.
조선시대에 궁정에서 행해진 우희로는 〈당상관(堂上官)놀이〉, 〈노유희(老儒戱)〉, 〈도목정사(都目政事)놀이〉, 〈시예종실(試藝宗室)놀이〉, 〈진상(進上)놀이〉 등이 있다. 민간에서는 흉내내기 우희가 널리 인기를 얻었다. 또한 유학자와 유학의 경전을 풍자하는 유희(儒戱)가 널리 행해졌으며, 특히 문희연에서 반드시 연행되었다.
유몽인(柳夢寅, 1559~1623)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귀석이 진풍정에서 연행한 두 편의 우희가 전한다. 귀석은 연희자이자 종실(宗室)의 종이었다. 귀석의 〈진상(進上)놀이〉는 이조판서와 병조판서가 뇌물을 받고 벼슬자리를 추천하는 모습을 우희로 펼친 것이다. 〈진상놀이〉에서 지방 수령은 진봉색리(進奉色吏)에게 뇌물을 전달하도록 시키는데, 이조판서와 병조판서에게 각각 큰 꾸러미를 하나씩 주고, 대사헌에게는 중간 크기의 꾸러미를 주고, 마지막으로 임금에게는 가장 작은 꾸러미를 주라고 한다. 이 놀이에서 왕은 승진을 원하는 지방 수령으로부터 이조판서, 병조판서뿐만 아니라 대사헌보다도 작은 꾸러미를 받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귀석이 동료 우인들과 함께 펼친 〈시예종실(試藝宗室)놀이〉는 종실인 주인이 관직과 봉록을 얻지 못하는 상황을 연출했다.
『세조실록』 14년(1468) 5월 17일 기록에 의하면, 고룡은 야장(冶匠, 대장장이)으로서 궁시장(弓矢匠, 활을 만드는 장인)으로 구해 온 사람인데, 장님이 술 취한 모습을 흉내내는 놀이, 즉 〈맹인취인지상(盲人醉人之狀)〉을 잘했다고 한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전하는 〈정평부사 말안장 사는 놀이〉는 정평부사 구세장이 말안장을 사기 위해 흥정하다가 결국 관가의 돈으로 구입한 사건을 연희자가 재현하여 만든 놀이이다.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소재로 부패한 관원을 풍자했다.
민간에서도 민간 연희자의 흉내내기 연희가 있어 큰 인기를 끌었다. 허균(許筠, 1569~1618)의 〈장생전(蔣生傳)〉에 의하면 장생은 양반층에서 몰락한 인물인데, 오랫동안 호남, 호서를 떠돌다가 1589년 경에 서울로 올라왔다고 한다. 장생이 연행한 놀이는 이야기와 웃기, 노래, 눈먼 점쟁이, 술취한 무당, 게으른 선비, 소박 맞은 여편네, 밥비렁뱅이, 늙은 젖어미 등의 흉내내기, 악기와 새소리 흉내내기 등이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는 우희의 하위범주에 유희(儒戱)라는 연희가 있었다. 이것은 선비를 풍자하고 유가(儒家)를 희롱하는 내용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 에 의하면 과거 급제자의 집에서 벌이는 축하 잔치인 문희연에서 놀이꾼이 유학자를 조롱거리로 삼아 연행하는 ‘유희’가 있었다. 또한 이이명(李頤命,1658-1722)이 기록한 『소재집(疎齋集)』의 〈만록(漫錄)〉에 의하면, 박남(朴男)이라는 광대가 문희연에서 유희를 연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구수훈(具樹勳)의 『이순록(二旬錄)』에도 박남의 일화가 나오는데, 박남이 유희 연희자였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 창자였다고 한다.
또 유희에 관한 자료는 우인 공결(孔潔)이 우희를 하면서 삼강령(三綱領)과 팔조목(八條目) 등을 논했다는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5년(1499) 12월 조의 기록과, 우인 공길(孔吉)이 노유희(老儒戱)를 하면서 『논어』의 구절을 외웠다는 『연산군일기』 10년(1504) 12월 조의 기사가 있다.
우희는 동아시아 공동의 연희로서 왕과 귀족의 오락으로 발달한 점, 또한 왕과 귀족에 대한 풍간ㆍ풍자의 기능을 담당한 점, 민간으로 확산되어 새로운 극의 성립에 영향을 미친 점 등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특히 한국의 우희는 궁정 우희가 조선시대 궁정 나례의 절차로 편성된 점, 문희연의 한 종목으로서 유희가 나타난 점, 다른 전통 연희 종목들에 수용되어 계승된 점 등에서 독자적인 특성을 보인다. 각종 인물과 동물 소리 등을 흉내 내는 우희, 왕과 관리 등 지배층과 각종 시사 사건들을 풍자하는 우희는 전통 연극의 성립에 밑거름이 되었다. 우희는 가면극의 풍자와 골계적 재담에 영향을 주었으며, 판소리의 골계적 대목, 그리고 재담과 만담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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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