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희(百戲),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 백희잡기(百戲雜技), 나희(儺戱),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대나례(山臺儺禮)
조선시대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나례(儺禮), 왕의 환궁 행사, 내농작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연행한 각종 잡희.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에 의하면 백희ㆍ가무백희ㆍ잡희ㆍ백희잡기 등으로 기록된 연희들을 나례(儺禮)에서 연행하면 나례ㆍ나희ㆍ나(儺) 등으로 불렀다. 또 이 연희들을 산대 앞에서 연행하면 산대잡극ㆍ산대희ㆍ산대나례 등으로 불렀다. 이색(李穡, 1328~1396)은 이를 산대잡극이라고 표현했다.
산대희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공동으로 보유했던 연희문화인 산악ㆍ백희와 같은 것이다. 산악ㆍ백희의 종목은 크게 (1)곡예와 묘기, (2)환술(幻術), (3)각종 동물탈춤, (4)동물 재주 부리기, (5)괴뢰희(傀儡戱)라고 불린 인형극, (6)골계희(滑稽戱), (7)가무희(歌舞戱), (8)악기 연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이런 연희들을 백희, 가무백희, 백희잡기, 잡희, 산대잡극, 산대희, 나희 등으로 불렀는데, 기존에 존재하던 연희들과 함께 변화, 발전을 통해 토착화되면서 한국적 독자성을 띤 연희로 성장했다.
중국 사서(史書)의 기록, 일본에 전하는 고구려악, 고구려 고분 벽화 등을 볼 때, 고구려에서는 4세기 이전부터 산악ㆍ백희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고분의 벽화에는 나무다리걷기〈수산리고분ㆍ팔청리고분〉, 공받기〈장천1호분〉, 곤봉받기〈약수리고분〉, 곤봉과 공을 엇바꾸어 받기〈수산리고분ㆍ팔청리고분ㆍ약수리고분〉, 수레바퀴 돌려 올리기〈수산리고분ㆍ장천1호분〉, 말타기 재주〈약수리고분ㆍ팔청리고분〉, 칼재주부리기〈팔청리고분ㆍ안악 제3호분의 행렬도〉, 씨름〈각저총ㆍ장천1호분〉, 수박희〈무용총ㆍ안악 제3호분〉 등 곡예에 해당하는 연희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가면희〈안악 제3호분〉 등 연극적 놀이와 북, 장구, 완함, 배소, 긴 퉁소 등의 악기 연주가 보이며, 원숭이재주부리기〈장천1호분〉 같은 동물 곡예 등 산악백희에 해당하는 연희들이 다양하게 그려져 있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의 『목은집(牧隱集)』 33권에 실린 시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 사용된 ‘산대잡극’은 조선시대의 산대희와 동일한 의미이다. 이 시에 의하면, 산대의 모양은 봉래산과 같았고, 바다에서 온 선인이 과일을 드리는 춤[獻果仙人舞]을 추었으며, 북과 징소리에 맞추어 〈처용무〉를 추었고, 긴 장대 위에서 솟대타기를 했으며, 폭죽놀이가 있었다.
이색의 『목은시고(牧隱詩藁)』 권26에 실린 〈여러 장수들이 도성으로 들어오다(諸將入城)〉라는 시에도 산대와 잡극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이 시의 “장수들이 전공 세우고 개선해 돌아오니(諸將功成奏凱來) 순군부가 산대를 설치하고 잡극을 연행해 환영하네(巡軍雜劇設山臺). 혀 짧은 당인은 말소리가 매우 급하고(唐人舌短談鋒急), 허리 긴 호인은 춤추는 소매가 빙빙 도네(胡客腰長舞袖回).”라는 내용은 장수들이 전공을 세우고 개선해 돌아오자 순군부가 산대를 설치하고 공연한 잡희를 묘사하고 있다. 잡희에는 혀가 짧은 당인의 연희와 허리가 긴 호인의 춤이 있었음을 전해 준다.
조선시대에는 중국 사신 영접 행사, 나례, 왕의 환궁 행사, 내농작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연행한 각종 잡희를 산대희라고 불렀는데, 고려시대의 산대잡극에 해당한다.
세종 32년(1450) 윤정월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倪謙, 1415~1479)의 『조선기사(朝鮮紀事)』에 따르면, 당시 중국 사신 영접 때 평양, 황주, 개성, 서울에서 오산(산대)과 채붕을 설치하고 각종 연희를 공연했다. 그는 평양에서 자신을 영접하는 행사에 대해 “(서경) 대동관 문 밖에 이르르니, 동쪽과 남쪽 두 곳에 각각 오산(鰲山)과 채붕을 설치하고 산의 위아래에 영기(伶妓)들을 나열시키고 여러 놀이를 했다.”고 기록했다.
성종(成宗) 19년(1488) 3월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의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 의하면, 중국 사신의 영접 때 평양ㆍ황주(黃州)와 서울의 광화문에서 산대를 가설하고 백희를 공연했다고 한다. 이 시에서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의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광화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라는 내용은 광화문 밖의 좌우에 각각 커다란 산대를 설치한 것을 가리킨다. 그가 광화문에서 본 산대희의 내용은 만연어룡지희, 무동, 땅재주, 솟대타기, 사자ㆍ코끼리의 잡상이나 탈춤, 원조ㆍ난조의 탈춤 등이었다.
조선에 네 차례나 산신으로 왔던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 (1725) 제7폭 중 마당의 오른쪽에 산붕(山棚)이라고 불렀던 소규모의 산대가 보인다. 객사 바로 앞에서는 한 연희자가 접시돌리기를 하고 있다. 마당 가운데서는 두 명의 연희자가 땅재주인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고, 이들 양 옆에서 각각 두 명씩 모두 네 명의 연희자가 탈춤을 추고 있다. 마당의 왼쪽에서는 줄타기를 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부묘의(祔廟儀)ㆍ친경의(親耕儀)ㆍ배릉례(拜陵禮) 등을 거행하고 궁궐로 돌아올 때, 여러 가지 행사들이 베풀어졌다. 이처럼 왕의 환궁 행사에 채붕이나 산붕을 사용했던 배경은 왕의 위엄과 송축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왕의 환궁 행사에서 연행한 연희 종목은 의금부와 군기감이 주관한 잡희 등이다. 그리고 소형 산대인 산붕과 침향산붕을 끌면서 가두 행진을 했고, 광화문 밖에는 두 개의 채붕을 설치해 온갖 희롱, 즉 잡희를 연행했다.
내농작은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일종의 모의 농경의례인데, 이때도 산대를 가설하고 각종 연희를 연행하였다. 『연산군일기』 11년 12월 13일 조의 “병인년의 내농작에 대례(大例)로 산대를 만들어 잡상을 그 위에 베풀고 정희(呈戱)하라.”는 내용 등 여러 기록에서 내농작의 산대희를 찾아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산대희를 담당했던 연희자들은 한강 이남 세습무계(世襲巫系)의 무부(巫夫)이면서 재인청(才人廳)에 소속되었던 재인, 북방 민족 계통의 수척(水尺)과 반인(泮人), 이북 지역 재인촌(才人村)의 재인(才人) 등이었다.
특히 재인청 재인들은 중국 사신 영접 행사에서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쳤다. 인조 4년 중국사신 영접 행사의 준비 절차를 기록한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1626)에 의하면, 당시 좌변나례도감에만 경기도 재인 30명, 충청도 재인 52명, 경상도 재인 33명, 전라도 재인 171명 등 총 286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우변나례도감까지 합하면, 이 행사에 동원된 재인들은 500명이 넘었을 것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연이 베풀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중국 사신이 왔을 때 평양, 황주, 개성 등 북쪽 지역에서도 산대와 채붕을 가설하고 산대희를 연행하였는데, 이때 연희자와 악사들은 바로 재인촌의 재인이었다. 황해도와 평안도에서는 재인촌의 재인들이 전문적 연희자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북방 민족의 후예였다.
산대희에 주목함으로써 한국 전통연희의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밝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고분벽화나 각종 문헌에 정착된 연희 자료들을 일관되게 꿰뚫어 해명할 수 있다. 아울러 산대희의 역사적 전개에 대한 추적을 통해 한국 전통연희의 갈래, 분포, 담당층, 후대 연희와의 관련 양상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가능하다.
산대희는 조선 후기 본산대놀이 가면극, 꼭두각시놀이, 판소리 등 발전된 양식의 연극적 갈래들을 창출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산대희와 본산대놀이』, 민속원, 202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안상복, 「한중 두 나라의 산대와 잡희 비교 연구」, 『중국어문학지』 52, 중국어문학회, 2015. 양재연, 「산대희(山臺戱)에 취(就)하여」, 『중앙대학교 30주년기념 논문집』, 중앙대학교, 1955.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