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에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왕의 환궁 행사, 내농작 등에서 산대를 설치하고 공연하던 각종 잡희를 산대희라고 불렀다. 조선 전기에는 이런 행사를 대규모로 진행했기 때문에,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이라는 임시 조직을 두어 산대의 설치와 산대희를 관장하게 했다.
조선 전기에는 중국 사신 영접시에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가 각각 광화문 앞에 대규모의 산대를 설치하는 일과 수백 명의 연희자들을 동원하는 일을 비롯해 각종 물품을 준비했다. 이 나례도감을 달리 산대도감이라고도 부른다.
인조 4년 중국사신 영접 행사의 준비절차를 기록한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1626)에 의하면, 당시 좌변나례도감에만 경기도 재인 30명, 충청도 재인 52명, 경상도 재인 33명, 전라도 재인 171명 등 총 286명이 동원된 것으로 나타난다. 우변나례도감까지 합하면, 이 행사에 동원된 재인들은 500명이 넘었을 것이다.
더욱이 『광해군일기』 12년(1620) 9월 3일 조에 의하면, 중국 사신 영접 행사의 대산대는 광화문 밖에 두 개를 설치했는데, 이를 위해 의금부가 1,400명, 군기시가 1,300명의 수군(水軍)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 산대를 봉래산처럼 꾸미기 위한 잡상에도 많은 물품이 소요되었다. 그러므로 이런 행사를 원만하게 치루기 위해 대규모의 임시 조직인 산대도감 또는 나례도감의 설치가 필요했다.
나례도감이 좌우로 나뉘어 있는 것은 광화문 밖의 산대를 좌우에 하나씩 두 개를 세우기 때문인데, 이때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가 각각 좌산대와 우산대를 설치했다.
(가) | 의금부가 아뢰기를, “…… (양쪽) 산대에 소요되는 역군(役軍)들도 그 전에는 그것을 수군(水軍)으로 정해 의금부가 1,400명, 군기시가 1,300명이었다는 것입니다.” 『광해군일기』 12년(1620) 9월 3일 조 |
(나) | 호조가 아뢰기를, “나례청(儺禮廳)의 잡상인 주지(注之, 꽃 모양으로 된 장식)·광대(廣大) 등의 물품을, 우변 나례청은 이미 이전에 쓰던 것으로 수리해 만들었는데, 좌변 나례청은 본조로 하여금 판출하도록 했습니다. ……” 했다. 『광해군일기』 8년(1616) 8월 20일 조 |
(다) | 산대 좌우변의 장인(匠人)·재인(才人) 등에게 쌀과 베를 차등 있게 내렸다. 『광해군일기』 12년(1620) 1월 16일 조 |
(라) | 군기시가 세운 산대의 한 모퉁이가 무너져(예전부터 내려오는 관례가, 광화문 밖에 의금부와 군기시가 좌우로 나뉘어 산대를 설치해 각각 마음껏 연희하는데, 모두가 조사(詔使)를 위한 것이다.) 구경하던 자가 많이 눌려 깔려 죽어 수십 인이나 되었다. 『인종실록』 1년(1545) 5월 11일 조 |
(가)-(라)를 통해, 좌변나례도감인 의금부와 우변나례도감인 군기시는 많은 수군을 동원해서 광화문 밖에 각각 좌산대(左山臺)와 우산대(右山臺)를 만들었고, 잡상도 좌변나례도감(좌변나례청)과 우변나례도감(우변나례청)이 별도로 만들었으며, 장인과 재인들도 각각 좌변나례도감(좌변산대)과 우변나례도감(우변산대)에 나뉘어 소속되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인조 4년의 『나례청등록』에는 중국 사신 영접을 위한 기관을 나례도감이라고 했는데, 『광해군일기』 12년(1620) 9월 3일 조에서는 “호조가 간직하고 있는 채붕 의식을 상고해 보고, 임오년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산대도감(山臺都監) 하인을 찾아 물어 보았더니,”처럼 산대도감이라고 부르고 있다. 1900년 8월 9일자 황성신문의 논설 ‘희무대타령(戱舞臺打令)’에서는 “오문(吾們)은 산사(山寺)에 납량(納凉)하다가 산대도감의 연희를 우람(偶覽)하매 일투(一套) 골계를 주후(酒後)에 규기(叫奇)하노라.”처럼 자신이 본 서울 본산대놀이를 산대도감의 연희라고 소개하고 있다. 서울의 본산대놀이를 가리키는 명칭인 산대도감극은 산대도감에서 유래된 것으로, 1930년 경성제국대학 조선문학연구실의 주관 아래 연희자 조종순(趙鍾洵)의 구술을 김지연(金志淵)이 필사한 『산대도감극각본』은 양주별산대놀이를 채록한 대본이다. 본산대놀이가 산대희의 연희자 즉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자들의 공연물로부터 성립되었기 때문에, 본산대놀이를 산대도감극, 본산대놀이 계통 가면극을 산대도감계통극이라 부르는 것이다.
봉산탈춤의 영감 대사 중 “… 아랫녁을 당도하야 이곳저곳 다니면서 해 먹을 것이 있드냐. 때음쟁이 통을 사서 걸머지고 다녔드니, 하루는 산대도감을 만나서 산대도감에 말이 인왕산 모로는 호랑이 어디 있이며, 산대도감 모르는 땜쟁이가 어디 있드냐. 너도 세금 내여라 하길래 세금이 얼마냐 물었드니 …”라는 내용을 통해, 산대도감에 동원되던 연희패를 산대도감이라 부른 사례도 볼 수 있다.
산대도감의 주된 업무는 산대를 만들고 외방 재인을 차출하는 일이었다. 산대도감은 대규모의 산대를 설치하는 일과 수백 명의 연희자들을 동원하는 일을 통해 한국 전통연희의 전승과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산대도감이 주관해 설치했던 산대는 한국 전통연희의 주요 장치물이자 무대였다. 또한 산대는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무대 구조물이다. 그러므로 산대 관련 연구를 통해 오늘날 현전하는 산대 관련 연희들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새로운 공연 공간 탐구에도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다.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산대희와 본산대놀이』, 민속원, 202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사진실, 「동아시아의 신성한 산 설행에 나타난 욕망과 이념」, 『공연문화연구』 12, 공연문화학회, 2006. 안상복, 「한중 두 나라의 산대와 잡희 비교 연구」, 『중국어문학지』 52, 중국어문학회, 2015. 양재연, 「산대희(山臺戱)에 취(就)하여」, 『중앙대학교 30주년기념 논문집』, 중앙대학교, 1955.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