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산(鰲山), 대산대(大山臺), 산거(山車), 산붕(山棚), 윤거(輪車), 예산대(曳山臺), 예산붕(曳山棚)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산대(山臺)는 전통연희를 동반하던 봉래산 형태의 무대 구조물
한국, 중국, 일본 모두 산대에 해당하는 무대 구조물을 설치하고 그 앞에서 연희를 펼쳤다. 중국에서는 이를 오산(鰲山)이라고 부르고, 일본에서는 산거[山車, 다시(だし)] 등으로 부른다. 산대의 기원은 중국의 전설적 신산(神山)인 봉래산을 형상화한 것에서 비롯된다. 봉래산은 방장산, 영주산과 함께 전설적인 삼신산의 하나로서 바다 위에 떠 있기 때문에 큰 거북이[鰲]가 등에 지고 있다. 그래서 봉래산을 오산이라고도 부른다. 일본에는 봉래산 외에 곤륜산을 형상화한 사례도 있다.
신라 진흥왕 이래의 팔관회와 고려시대의 연등회를 거행할 때 산대 또는 채붕 앞에서 가무백희(歌舞百戱)를 연행했다. 고려 말 이색(李穡, 1328~1396)의 〈동대문부터 대궐 문전까지의 산대잡극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이다(自東大門至闕門前山臺雜劇前所未見也)〉에서도 “산대를 얽어맨 것이 봉래산 같고(山臺結綴似蓬萊)”라고 표현해 산대가 봉래산 즉 오산의 형태였음을 전해 준다.
조선에서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일은 국가의 매우 중요한 행사였다. 특히 조선 전기에 명나라 사신이 올 때는 광화문 밖 양쪽에 광화문처럼 높고 큰 산대를 하나씩, 모두 두 개를 만들었다. 이를 대산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임병 양란을 거치면서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졌고, 광화문 앞에 대산대를 세우던 장소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서서 대산대를 세울 만한 공간이 부족했다. 그래서 조선 후기에는 대산대를 세우는 일은 없어졌고, 대신 산거(山車), 산붕(山棚), 윤거(輪車), 예산대(曳山臺), 예산붕(曳山棚) 등으로 불렀던 소규모의 산대를 사용했다.
성종 19년(1488) 3월에 조선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동월(董越)이 지은 『조선부(朝鮮賦)』에서 광화문 밖에 설치한 두 개의 산대에 대해 “자라는 산을 이고 봉영(蓬瀛)의 바다해를 싸고(鰲戴山 擁蓬瀛海日)”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그 주석에 “광화문 밖에 동서로 오산(鰲山) 두 자리가 벌여 있는데, 높이가 성문과 같고 극히 교묘하다(光化門外東西 列鰲山二座 高如門等 極其工巧)”라고 했다. 이때의 ‘자라가 산을 이고 있다’는 표현은 봉래산 형태의 산대 외양을 짐작하게 한다.
소형 산대인 산붕은 아극돈(阿克敦)의 〈봉사도(奉使圖)〉(1725)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이 그림 제7폭에는 중국 사신 영접행사 중 모화관에 설치한 산붕 앞에서 줄타기하는 모습, 접시돌리기하는 모습, 땅재주 넘는 모습, 그리고 가면을 쓴 사람 넷이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산대는 산천초목과 기암괴석으로 만들어진 그 산의 형태만으로도 신기한 볼거리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에 고사를 형상화한 잡상(낚시하는 사람, 동자, 원숭이, 춤추는 여자)들을 설치하고 기계 장치로 움직이는 잡상놀이를 연출했을 것으로 보인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문헌에 따라 산대와 채붕을 동일한 의미로 사용한 경우도 있지만, 다락 형태의 구조물은 채붕으로, 산 형태의 구조물은 산대로 구분한 경우도 나타난다. 마침 한글본 『정리의궤 삼십구 성역도』의 채색화 〈낙성연도〉에 다락 형태의 채붕이 그려져 있고, 〈봉사도〉에 산 형태의 소형 산대가 그려져 있다. 또한 세종 32년(1450) 윤정월에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예겸(倪謙, 1415~1479)의 『조선기사(朝鮮紀事)』에 의하면, 당시 중국 사신 영접 때 평양, 황주, 개성, 서울에서 오산과 채붕을 설치하고 각종 연희를 공연했다. 그런데 “(서경) 대동관 문 밖에 이르니, 동쪽과 남쪽 두 곳에 각각 오산(鰲山)과 채붕을 설치하고 산의 위아래에 영기(伶妓)들을 나열시키고 여러 놀이를 했다.(至大同館門外東南二面各樹鰲山綵棚山上下列伶妓諸戱)”라는 기록을 보면, 산대(오산)와 채붕은 별개의 구조물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조실록』 5년(1459) 3월 22일 조에 “지금 명(明)나라 사신을 맞이할 때에 산대나례(山臺儺禮)는 옛날 그대로 하게 하되, 만약 날짜가 임박하여 갑자기 준비하기가 어려운 형편이거든 다만 채붕나례(彩棚儺禮)만을 베풀도록 하라”라는 내용이 보인다. 산대를 설치하고 각종 연희를 공연하는 것을 산대나례, 채붕을 설치하고 각종 연희를 공연하는 것을 채붕나례로 구별하고 있다. 산대나례에서는 거대한 산의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많이 소요되고, 채붕나례에서는 비교적 작은 다락 형태를 만들기 때문에 시간이 별로 소요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채붕을 얽은 후 그 속에 다정(茶亭)을 설치한 것을 다정산대라고 부른다. 『문종실록』 즉위년(1450) 6월 5일 조에 “작은 채붕을 설치하고 그 앞에 사람과 짐승 등 잡상을 벌려 세우고, 채붕 뒤에 큰 통(筒)을 놓고 물을 부으면 물이 잡상의 입에서 흩어져 나와 솟아오른다. 시속(時俗)에서 이것을 다정이라 한다”라고 해, 다정의 구체적인 형태를 전해 준다. 채붕을 설치하면 그 위와 아래에서 잡희를 연행하지만, 다정을 설치하면 잡희를 연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고려와 조선시대의 문헌에 백희, 가무백희(歌舞百戱), 잡희(雜戱), 백희잡기(百戲雜技) 등으로 기록된 연희들을 나례(儺禮)에서 연행하면 나례(儺禮), 나희(儺戱), 나(儺) 등으로 불렀다. 또 이 연희들을 산대 앞에서 연행하면 산대잡극(山臺雜劇), 산대희(山臺戱), 산대나례(山臺儺禮) 등으로 불렀다. 즉 산대희는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연희자들이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왕의 환궁 행사, 내농작 등에서 산대나 채붕을 가설하고 연행하던 공연예술이다. 이 산대희로부터 서울의 산대놀이 가면극인 본산대놀이가 생겨났다.
산대는 동아시아에서 보편적으로 발견되는 무대 구조물이다. 그러므로 전통연희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연희 무대에 대한 연구가 중요하다. 무대 공간으로서 ‘신성한 산’을 설행하는 전통은 동북아시아에서 삼신산(봉래산)과 곤륜산 등 중국 고대 신화에 기반을 둔 산을 형상화하는 동질성을 지니고 있다. 산대와 채붕을 활용했던 방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타난다. 첫째, 산대를 무대로 활용한 경우로서, 산대 위에 잡상을 설치하고 감상하는 것, 그리고 산대 위의 잡상들을 기계장치로 조작해 잡상놀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둘째, 산대를 무대 배경을 위한 설치물로 활용한 경우로서, 산대 앞에서 가면희ㆍ줄타기ㆍ땅재주 등 각종 연희를 연행한 것이다. 셋째, 산희(山戱)처럼 채붕을 무대로 활용한 경우로서, 연희자들이 채붕 위에 올라가서 가면희 등 잡희를 연행하는 것이다. 한국 전통연희의 주요 장치물이자 무대였던 산대에 관한 구체적 논의는 오늘날 현전하는 산대 관련 연희들을 새롭게 조망할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해주고, 나아가 새로운 공연 공간 탐구에도 돌파구를 마련해 줄 것이다.
박세연, 『동아시아 기관인형 연구』, 민속원, 2015. 서연호, 『산대탈놀이』, 열화당, 1987. 이두현, 『한국의 가면극』, 일지사, 1979. 전경욱, 『산대희와 본산대놀이』, 민속원, 202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사진실, 「동아시아의 신성한 산 설행에 나타난 욕망과 이념」, 『공연문화연구』12, 공연문화학회, 2006. 안상복, 「鼇山과 山臺의 명칭·유형과 역사전개상의 특징」, 『中國文學』 86, 중국문학회, 2016. 阿克敦 著, 黃有福․千和淑 校註, 《奉使圖》, 遼陽: 遼寧民族出版社, 1999.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