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사당
주 구성원이 여자들로서 사당법고춤,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 등을 공연했던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
사당들은 가무희를 앞세우고 매음도 했다. 사당패는 두 종류가 있었다. 첫째, 사당과 거사들의 춤과 노래로만 구성된 가무 위주의 사당패이다. 둘째, 사당들의 춤과 노래 외에 줄타기 등 다양한 공연을 하는 사당패이다.
사당패는 조선 후기의 남사당패(男寺黨牌, 男社堂牌), 굿중패와 더불어 재승(才僧) 계통 연희자들의 후예이다. 재승 계통의 연희자는 삼국시대에 이미 존재했다. 대표적인 예로 신라 원효의 무애희는 재승 계통 연희자에 의해 고려를 거쳐 조선 전기까지 전승되었다.
조선 태종 6년 불교의 사사혁파정책(寺社革罷政策)으로 인해 사원이 혁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승려의 환속이 있었다. 그래서 본래 절에서 재를 올리는 일과 다비를 치르는 데 뽑혀 다녔고, 범패ㆍ염불ㆍ법고ㆍ바라 등 가무희에 뛰어난 명수들이었던 재승들은 그들끼리 어울려 살게 되었다. 이들이 무당 및 재인, 광대와 어울리게 되면서 조선 전기에 사장(社長)이라는 집단이 되었다. 『세조실록』 14년 5월 4일 조에 ‘승인(僧人)의 사장(社長)’이 원각사의 불유를 모연한다고 일컫고, 혹은 낙산사를 짓는 화주승이라고 일컬으며 돌아다닌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전기의 사장은 고려시대 재승 계통 연희자들의 후예로서, 조선 후기의 사당패ㆍ거사패ㆍ남사당패ㆍ굿중패 등으로 계승되었다.
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해어화사(解語花史)』에서는 “항간에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사당은 사노비(寺奴婢)에서 비롯되었는데, 안성군(安城郡)의 청룡사(靑龍寺)가 그 본거지라고 한다. 그래서 남녀 사당이 중을 대하게 되면 반드시 공경하고 예(禮)를 행하여, 마치 노비가 상전을 섬기듯 한다고 한다”고 하며, 사당패가 사찰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지적했다. 특히 사당이 절의 노비에서 나왔다는 말은 주목을 요한다. 일본의 경우도 재승이 있고, 이와는 별도로 절에 속한 노비이면서 연희를 하는 자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사당패의 공연 종목은 사당벅구(법고)춤[社堂法鼓舞], 소리판(주로 산타령 등 민요창), 줄타기(재담줄이라 해서 곡예보다는 재담과 노래가 우세하다)의 세 가지였다. 사당패는 주구성원이 여자들이다. 일명 ‘여사당’으로 통하는 이 패거리는 가무희를 앞세우고 매음도 했다. 맨 위에 화주 또는 모갑(某甲)이라고 부르는 우두머리 남자가 있고, 그 밑으로 거사라는 사내들이 제각기 사당 하나씩과 짝을 맞춘다. 화주는 집단의 통솔, 집단 내부 질서의 확립, 단체의 대외교섭과 그 활동을 보장하기 위한 조직 사업, 수입에 대한 분배를 결정하는 조직의 대표자였다. 거사의 우두머리는 수거사라고 불렸는데, 수거사는 가창예술의 총지휘자로서 사당패의 예술적 지도를 책임졌고, 공연에서 반복과 마감 또는 다른 곡으로 넘어갈 때 도창자의 역할을 수행했다. 표면상으로 볼 때는 모갑이인 남자가 이끄는 조직 같지만, 실제로는 모갑이 이하 거사들은 모두 사당에 붙어먹는 기생자들이었고, 이들의 주요 공연 종목도 사당들의 가무희였다. 신재효본 〈박타령〉ㆍ〈변강쇠가〉나 이능화에 의하면, 사당패는 주로 사당들의 가무희 즉 소리판만을 공연하고 다닌 것으로 나타난다.
최영년의 『해동죽지(海東竹枝)』(1921)에 사당패에 대한 시가 보인다.
사당패(沙女當牌)
짙은 눈썹 기름진 살결 그림인 양 濃黛凝脂似畵楦 비단 치마와 부채로 너울너울 춤을 추네. 羅裙紈扇舞螺旋 춘가 한 곡조와 양산도를 부르니 春歌一曲陽山道 소리꾼 붉은 생초에 돈이 비오듯. 俏子紅綃雨萬錢
사당을 음만 따서 사당(沙女當)이라고 표기했다. 이 시에 의하면, 사당들은 부채를 들고 춤을 췄고, 춘가(春歌)와 양산도 같은 노래를 불렀다. 그러면 구경꾼들이 사당의 붉은 치마에 돈을 던져주었던 것이다. 춘가는 신재효본 〈변강쇠가〉 중 사당패가 부르는 “오돌또기 춘향(春香) 오돌또기 춘향 위월의 달은 밝으며 명랑한데 여기다 저기다 연저 바리고 말이 못된 경이로다 ……”를 가리키는 듯하다.
박은용의 조사에 의하면, 서도(평안도, 황해도) 지방에서 활동한 사당패들의 기본 종목은 〈산천초목〉ㆍ〈놀량〉ㆍ〈앞산타령(사거리)〉ㆍ〈뒷산타령(중거리)〉ㆍ〈경발림(경사거리)〉 등이었다. 이 기본 연주 종목에 이어서, 〈산염불〉과 〈구영변가〉와 같은 서도민요나 사당춤도 첨부하여 공연 종목으로 삼았다. 경기 사당패들은 〈놀량〉ㆍ〈사거리〉 다음에 〈양산도〉ㆍ〈방아타령〉ㆍ〈경복궁타령〉 등을 연결하여 불렀다. 사당패의 후신인 산타령패(선소리패)들은 〈놀량〉ㆍ〈사거리〉 다음에 〈도라지타령〉ㆍ〈잦은방아타령〉ㆍ〈개고리타령〉ㆍ〈도화타령〉을 연결시켜 불렀다. 남도 사당패들은 〈보렴사거리〉와 〈화초사거리〉를 부른 다음 〈매화타령〉을 불렀다. 후대에는 남도 지방의 민요인 〈긴육자배기〉ㆍ〈잦은육자배기〉ㆍ〈날개타령〉ㆍ〈흥타령〉을 첨가했다.
사당패들은 전통적인 농악의 춤동작과 소고를 가지고 춤추는 법고놀이를 공연했다. 거사가 먼저 소고를 치면서 장단에 맞춰 줄지어 늘어서면, 사당들이 노래를 부르면서 등장했다. 먼저 수거사가 소리를 메기면 거사와 사당들이 받아 부르기도 하고, 두 패가 주고받으면서 부르기도 하는데, 모두 춤을 추면서 흥겹게 불렀다. 대열이 앞으로 나갔다 뒤로 물러섰다 하며 원을 그리면서 돌아가기도 하고, 손에 쥔 소고는 노래와 춤의 흥취를 한층 돋우기 위해 제꼈다 엎었다 돌렸다 하면서 장단에 맞추어 매듭지어 쳤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이러한 연주방식은 19세기 후반 이후 산타령패, 선소리패에 의해 계승되었다. 《봉산탈춤》 제3과장 〈사당춤〉은 바로 이런 연희를 재현한 것이다.
정현석의 『교방가요』(1872)에서는 사당과 거사를 ‘舍黨’·‘乞士’로 표기하고, “사당(舍黨) 남창여화(男唱女和)”라고 공연 방식을 설명했다. 그리고 “잡요 산타령·방아타령·놀량·꽃방아타령, 이것은 거사와 사당이 부르는 것인데 모두 음사(淫辭)와 비사(鄙詞)이다. 지금 가동(街童)과 머슴들도 이 노래들을 부를 줄 안다(雜謠 山打令 杵打令 遊令놀양 花杵打令 此乞士舍黨所唱 皆是淫辭鄙詞也 今街童厮隸亦解唱也)”고 하며, 사당패의 연희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 가운데 거사들은 소고 치고, 사당들은 춤을 추며 한 명씩 차례대로 〈산천초목〉ㆍ〈녹양방초 다 저문 날에〉ㆍ〈갈까보다〉ㆍ〈오독도기 춘향〉ㆍ〈사신 행차 바쁜 길에(방아타령)〉ㆍ〈유각골 처자는 쌈지장수 처녀(잦은 방아타령)〉를 부른다. 이와 같이 사당은 춤을 추고 노래하며, 거사는 소고를 치면서 어울려 공연하는 것이 사당패의 기본 공연이었던 듯하다. 이와 같은 공연장면은 수락산(水落山) 〈흥국사(興國寺) 감로탱(1868)〉, 〈경국사(慶國寺) 감로탱(1887)〉, 개인이 소장한 감로탱(19세기 후반), 〈불암사(佛巖寺) 감로탱(1890)〉 등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심우성의 조사에 의하면, 사당패는 이 밖에도 사당법고춤과 줄타기를 공연했다고 하는데, 이러한 공연 모습 역시 앞의 감로탱들의 그림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들에는 사당들이 춤을 추는 모습, 줄타기를 하는 모습, 방울받기를 하는 모습이 함께 그려져 있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ㆍ사당패ㆍ대광대패ㆍ솟대쟁이패ㆍ초라니패ㆍ풍각쟁이패ㆍ광대패ㆍ걸립패ㆍ중매구ㆍ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집단들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사당패와 남사당패는 마을과 장터·파시(波市)를 찾아 떠돌아다녔고, 대광대패와 솟대쟁이패는 주로 장터를 찾아 떠돌아다녔다. 다른 연희집단들은 주로 마을을 찾아 떠돌아다녔다. 도시의 장마당이나 농어촌 마을을 활동무대로 삼고 순회공연을 하던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집결처이며, 새로운 공연 종목을 준비하기 위한 연습지이자 생활 본거지인 사찰을 본산으로 삼았다. 그러나 18~19세기에 사당패들이 급격히 늘어남에 따라 본산 사찰뿐만 아니라 그 근처의 일부 마을에도 근거지를 두게 되었다. 그래서 ‘사당골’이란 이름을 가진 마을들이 생겨났다. 이 중 널리 알려진 본산과 사당골은 경기도 안성 청룡사와 그 부근의 청룡사당골, 황해도 문화 구월산의 패엽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경상도 하동 쌍계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전라도 강진 정수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사당리), 경남 남해의 화방사와 그 부근의 사당골 등을 들 수 있다. 신재효본 〈박타령〉 중 놀보의 세 번째 박에서 나온 사당패들은 “소사(小寺) 문안이요. 소사 문안이요. 소사 등은 경기 안성 청룡사와 영남 하동 목골이며, 전라도라 의론하면 함열의 성불암, 창평의 대주암, 담양, 옥천, 정읍, 동막[同福], 함평의 월량사, 여기 저기 있삽다가, 근래 흉년 살 수 없어 강남으로 갔삽더니…”라며 자신들의 거처를 청룡사ㆍ성불암ㆍ대주암ㆍ월량사 등 절과 관련시켜 얘기하고 있다. 사당패는 관계를 맺고 있는 사찰에서 내준 부적을 가지고 다니며 팔고, 그 수입의 일부를 사찰에 바쳤다. 그래서 사당패들은 자기들의 수입으로 불사를 돕는다는 것을 내세웠다. 사당패나 걸립패의 구성원에 승려나 보살이 직접 참여하고 있거나 뒤에서 조종하고 있었고, 그들의 수입이 사종(四種, 阿彌陀를 생각하여 떼어 주는 공양물)이란 명목으로 사찰에 바쳐졌던 것은 현재 남아 있는 많은 시주질(施主秩)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유랑예인집단인 사당패는 거사(남성)와 사당(여성)으로 구성된 남녀 혼성 단체이지만, 실제로는 사당들의 가무희가 주요 공연 종목이었다. 사당패들에 의해 개척된 가무희는 19세기 후반 이후 산타령패, 선소리패에 의해 계승되었다. 그리고 《봉산탈춤》의 제3과장 〈사당춤〉, 《양주별산대놀이》의 〈애사당법고놀이〉, 판소리, 민요 등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므로 사당패는 한국 전통 공연예술 저변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 중요한 예인 집단이다.
손인애, 『향토민요에 수용된 사당패 소리』, 민속원, 2007. 심우성, 『남사당패연구』, 동문선, 1989. 이능화, 「조선해어화사」, 『東洋書院』, 1927.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박은용, 「사당패들의 활동정형」, 『고고민속』 4, 사회과학원 출판사, 1964 문성렵, 「중세기 사당패의 발생과 그 예술활동」, 『력사과학』, 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8.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