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 광대
조선 후기 무부(巫夫)들의 조직인 재인청에 속했던 연희자들 가운데 일부가 재인청을 나와 패거리를 만들어 공연했던 데서 유래한 유랑예인집단이다.
조선 후기에는 남사당패ㆍ사당패ㆍ대광대패ㆍ솟대쟁이패ㆍ초라니패ㆍ풍각쟁이패ㆍ광대패ㆍ걸립패ㆍ중매구ㆍ굿중패 등 다양한 명칭의 유랑예인집단이 존재했다. 광대패는 삼현육각ㆍ판소리ㆍ민요창ㆍ무용ㆍ줄타기ㆍ땅재주를 공연했다. 재인청의 계원은 세습 무당 당골에 한하며, 전적으로 무악(巫樂, 굿음악)을 연주하는 화랑(화랭이), 줄타기ㆍ물구나무서기 등의 곡예를 하면서도 무악을 연주하는 재인, 가무 예능인이며 무악을 연주하는 광대를 포함했다. 한강 이남의 세습무권에서는 그 구성원이 대부분 무속 집안 출신의 무부들이었기 때문에 재인청을 신청(神廳)이라고도 불렀다. 또한 이들은 관아의 악사였기 때문에 재인청을 악사청이라고도 불렀다. 그리고 이들을 광대, 화랑(화랭이)이라고도 불렀기 때문에 광대청, 화랑청이라는 말도 생겼다.
재인청에 속했던 광대들은 뜬 광대와 대령 광대로 나눌 수 있다. 대령 광대는 관아에 예속되어 있던, 즉 재인청에 속해 있으면서 굿판을 떠나지 않았던 광대를 지칭한다. 뜬 광대는 재인청을 나와 떠돌았던 광대를 지칭한다.
대령 광대는 일정한 지역에 거주하며 재인청에 속해 있었고, 나례(儺禮), 중국 사신 영접 행사, 임금이 선왕의 위패를 종묘에 모시는 부묘(祔廟)를 마치고 궁중으로 돌아올 때, 왕의 각종 행차시, 왕자와 공주의 태를 태봉(胎峰)에 묻을 때, 정월 보름에 궁중에서 풍농을 기원하기 위해 행하는 내농작(內農作, 모의농경의례)을 거행할 때, 새 감사의 부임을 환영할 때 등 각종 공적 행사에 동원되어 연희를 펼쳤다. 그리고 과거급제자 축하잔치인 문희연(聞喜宴), 환갑잔치와 회혼례(回婚禮), 동제(洞祭)인 도당굿과 각종 무굿 등 사적 공연을 통해 수입을 얻었다.
뜬 광대는 마을 수령과 서리들이 신청 즉 재인청 구성원들에게 부과한 무세(巫稅)와 환곡제도를 이용해 탐학과 무단 지배를 자행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어 굿판을 떠나 떠돌게 되었다. 전남 장흥(長興)의 「신청완문(神廳完文)」(1832) 중 무세포를 사람마다 납세하도록 해 네 냥이 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를 감당해 낼 수 없어 직업을 잃고 떠도는 자가 열에 팔·구가 되고, 현재 남아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그러니 각종 사역에 모든 일을 잘하여 나가도록 요구할 길이 없게 되었다. 가장 견디어 내기 어려운 것은 양곡을 환상하는 일이다.(且巫稅布每名所納, 至爲四兩之多, 故不能擔當, 流離失所者什居八九, 目下餘存者亦無幾希, 則各項使役責備無路之中, 最所難堪者還上受食也.)라는 내용을 통해, 재인청 출신들이 무세포와 환곡으로 인해 열에 팔구가 무업을 포기하고 떠돌이로 전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는 나이가 많아 퇴임하게 된 재인청 출신 연희자도 뜬 광대로서 광대패가 되었다. 광대패는 마을과 마을을 찾아 떠돌면서 주로 경사가 있는 집을 찾아 놀이판을 벌이고 미리 작정된 사례금을 받았는데, 이 중 과거급제자 축하 잔치인 문희연과 회갑연이 가장 많았다.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조창[漕倉, 조선 시대에 세곡(稅穀)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창고]을 열려고 할 때와 포구들에 잡류가 찾아오는 것을 엄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우파(優婆, 사당)ㆍ창기(娼妓)ㆍ주파(酒婆)ㆍ화랑(花郞, 무당의 지아비인 광대)ㆍ악공(樂工)ㆍ뇌자(櫑子, 초라니)ㆍ마조(馬弔, 투전)ㆍ도사(屠肆, 소나 돼지의 도살) 등 팔반천류(八般賤流)가 그것이다. 이 가운데 사당ㆍ화랑ㆍ악공ㆍ초라니 등 유랑예인에 해당하는 연희자들을 거론한 것은 이들이 조창에서 곡식을 한양으로 보내기 위해 배들이 들고날 때와 포구들을 찾아들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화랑(화랭이, 무당의 지아비인 광대)이 바로 뜬 광대에 해당하는 광대패이다. 정약용은 이상의 여러 무리들을 잡류라고 표현하면서 조창을 열려고 할 때와 포구에 찾아오는 것을 엄금하라고 했다. 그 이유로 이들이 성색(聲色)과 주육으로 온갖 유혹을 해서 창촌의 세미(稅米) 수납 관리가 이에 빠지고, 뱃사람들이 이에 빠지곤 해 함부로 낭비하게 되고, 결국 탐욕이 더욱 깊어져서 함부로 부정하게 거두어들여서 그 구멍을 메우려고 할 것이라는 점을 들었다.
한편 낙동강변인 초계 밤마리(경남 합천군 덕곡면 율지리)의 시장에서 대광대패라는 유랑예인집단이 여러 공연물 가운데 하나로 가면극을 놀았다. 대광대패는 광대패와는 다른 집단으로 보인다. 대광대패는 주로 5일ㆍ7일ㆍ9일마다 열리는 각 지방의 장날에 맞춰 장터를 떠도는 유랑예인집단이었다. 대광대패는 풍물ㆍ무동ㆍ죽방울받기ㆍ솟대타기ㆍ오광대 가면극을 놀았다. 대광대패의 오광대 가면극이 경남 지방 야류와 오광대의 발상지라고 한다.
밤마리는 낙동강변의 수로요지(水路要地)로서 어염상선(魚鹽商船)이 정박할 수 있는 하항시(河港市)였기 때문에, 합천, 의령, 초계, 고령, 안동 그리고 호남 지방에서도 왔다고 한다. 6월에는 대마(大麻)의 집산지로서 난장을 이루었으므로 큰 장터가 형성되어 약 삼백 호의 큰 마을을 이루었다. 그러므로 이 시장에서 상인들의 비호 아래 유랑광대들이 모여들어 놀이판을 벌일 수 있었던 것이다.
광대패는 조선시대 최고의 예인집단인 재인청 출신이었으므로 유랑예인집단 가운데 가장 뛰어난 예술적 기능을 갖고 있었고, 다른 유랑예인집단에 연희자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들은 굿판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사회경제적 궁핍과 정치적 압박의 산물이다.
강용권, 『수영전통예능』, 수영고적민속보존회, 1993. 노동은, 『한국근대음악사 1』, 한길사, 1995. 심우성, 『한국전통예술개론』, 동문선, 2001.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최상수, 『야류·오광대 가면극의 연구』, 성문각, 1984.
전경욱(田耕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