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현방(管絃房)
고려시대에 궁중의 속악을 담당한 장악기관.
관현방은 당시 중국에 없었던 고려의 기관 명칭이다. 1076년(문종 30)에 설치되었다.
○ 설립 목적
1073년(문종 27)에 여기(女妓)들이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인 〈포구락〉, 〈구장기별기(九張機別伎)〉, 〈답사행가무(踏沙行歌舞)〉 등을 연습하고 연등회, 팔관회에서 공연했다. 이처럼 교방악 연습과 공연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별도의 장악기관이 필요했고, 이에 1076년(문종 30) 관제를 정비하면서 대악서에 더하여 관현방을 설치한 것으로 추정된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관현방 악인(樂人)의 구체적인 인원은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서는 관현방에 170명의 여기들이 있다고 하였다. 관현방의 관리로는 1362년(공민왕 11)에 판관(判官)이 있었으나, 대악서와 달리 판관 외에 다른 관리는 없는 것으로 보아, 관현방은 악인이 중심을 이루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사』에는 관현방이라는 기관명의 악인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대악관현방(大樂管絃房)의 악인(樂人)으로 업사(業師), 즉 가(歌)ㆍ무(舞)ㆍ악(樂)의 교습과 의례에서 연행을 이끄는 지도자가 되어 녹봉을 받은 기록이 있다. 『고려사』 「식화지(食貨志)」 권34 식화(食貨) 3에 따르면, 당무업(唐舞業)을 겸한 창사업(唱詞業) 1명, 생업사(笙業師) 1명, 당무사(唐舞師)로서 교위 계급을 받는 당무사교위(唐舞師校尉) 1명, 어전(御前) 행사를 이끄는 어전양부도청(御前兩部都廳), 비파업사로서 교위 계급을 받은 비파업사교위(琵琶業師校尉), 조회 의례를 담당한 관서인 합문(閤門)의 일정한 직임이 없는 산직(散職)을 받은 합문사동정(閤門使同正), 장고업사(杖鼓業師) 2명, 당적업사(唐笛業師) 2명, 향비파업사(鄕琵琶業師)ㆍ당비파업사(唐琵琶業師) 각 1명, 방향업사교위(方響業師 校尉) 1명, 필률업사(篳篥業師) 1명, 가무박업사(歌舞拍業師) 1명, 중금업사(中笒業師) 1명은 작은 녹봉을 받았다.
○ 역사적 변천
1076년(문종 30) 『고려사』 기사 중 임시기구인 도감에 대한 제사도감각색(諸司都監各色)에 관현방이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은 관현방이 임시 도구로 설치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설립 초기에 관현방에는 대악서와 달리 이렇다 할 관직이 없다가, 1362년(공민왕 11)에 관현방에 정직(正職)의 소관 이외에 수시로 발생하는 사무를 처리하기 위한 임시 관직의 하나로 판관(判官)을 두었다. 이후, 고려말 성리학자 유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1391년(공양왕 31)에 유교 의례 음악인 아악을 담당하는 아악서가 설치되고 속악을 주로 다루었던 관현방은 폐지되었다.
○ 활동
관현방은 대악서와 양부로 불리며, 조회, 하례 등 궁중 의례와 의례 이후 벌어지는 잔치에서 연례악을 담당하고, 왕의 행행(行幸)과 환궁, 연등회 등 나라의 대대적인 야외 행사 시에 채붕을 설치하고 놀이판을 벌여 가무, 백희(百戲)를 연행했다. 특히 송나라에서 들어온 교방악 등 속악을 연습하여 공연이 잘 이루어지도록 했다.
관현방은 문종 대에 송나라 교방악의 도입에 따라 새로운 기구의 필요성에 의해 임시기구로 출발하였다. 앞서 목종 대(997~1009)에 영(令)이 있었고 이후 승(丞)을 추가하는 등 행정 조직 체계를 갖추고 있던 대악서와 달리, 관현방은 관리가 전혀 없다가 겨우 공민왕 때 임시 관직 판관을 둔 것으로 보아 속악의 연행 자체를 주로 담당한 기구였다고 추정된다. 대악서와 함께 양부로 불리며 3세기 이상 유지되었다.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김창현, 「고려시대 음악기관에 관한 제도사적 연구」,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송방송, 「대악서와 관현방」,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이태형, 「고려시대 3대 국가음악기관의 분석적 고찰」, 『인문과학연구』 14, 2010. 임영선, 「고려시대 교방에 대한 재고찰」, 『국악원논문집』 39, 2019.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