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부터 조선 초까지 제례 아악을 담당한 궁중 장악기관.
아악서는 고려 말 1391년(공양왕 3)에 종묘에서 쓸 음악과 노래를 익히도록 설치된 궁중 장악기관이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에도 이를 계승하여 아악 연주를 담당했다.
○ 설립 목적
아악서는 고려시대 성리학과 대성악 전래의 흐름 속에서 1391년(공양왕 3)에 종묘에서 쓸 음악과 노래를 익히기 위해 설치되었다. 1392년(태조 1) 조선 건국 후에도 아악 연주를 담당할 기관으로 아악서를 유지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아악서는 악공과 악공 출신의 관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악서 악공은 제례 아악을 담당했는데, 향악과 당악을 담당한 전악서 악공이 천인(賤人)이었던 것과 달리 양인(良人)이었다. 1429년(세종 11) 초까지 아악서 악공은 200명이었다.
아악서 소속 관원의 관품(官品)과 인원은 1409년(태종 9) 정해졌는데 종5품 사성랑(司成郞) 전악(典樂) 1명, 종6품 조성랑(調成郞) 부전악(副典樂) 1명, 종7품 사협랑(司協郞) 전율(典律) 2명, 종8품 조협랑(調協郞) 부전율(副典律) 3명, 종9품 조절랑(調節郞) 직율(直律) 4명으로 총 11명이었다. 아악서의 관원은 전악서와 같이 문무관과 구분되는 잡직이며, 일정 복무 기간 동안만 녹봉을 받는 일종의 비정규직인 체아직이었다. 아악서에서는 관원을 뽑을 때 합주가 아닌 독주를 하게 하는 등 취재 방식이 엄격했다. 1448년(세종 30)에는 아악서의 관원이 전악서 관원과 혼동되지 않도록 옛 제도를 참고하여 종5품은 가성랑(嘉成郞) 아악서 영(令)으로, 종6품은 순화랑(純和郞) 아악서 부령(副令)으로, 종7품은 사음랑(司音郞) 아악서 낭(郞)으로, 종8품은 화성랑(和聲郞) 아악서 승(丞)으로, 종9품은 화절랑(和節郞) 아악서 부승(副丞)으로 호칭했다. 이들 관원은 악공을 지도하는 위치였으며, 특히 최고직인 전악은 오랜 경험과 실력을 가지고 제례에서 악공들을 이끌어 제례 아악이 잘 연주되도록 했다.
○ 역사적 변천
조선 초에 속악을 사용한 문소전과 휘덕전을 제외한 주요 궁중 제례에서 모두 아악을 연주했는데, 이 연주를 아악서가 담당했다. 1429년(세종 11) 3월에 악공의 수를 200명에서 350명으로 증원하도록 했다. 『세종실록』 「오례」에는 아악서 소속 악공(樂工)의 명칭이 ‘악생(樂生)’으로 되어 있다. ‘악생’은 이전부터 악인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지만,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종실록』 「오례」에서 처음으로 향악과 당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구분하여 아악을 연주하는 악인을 악생이라고 칭한 예가 나타나며, 이후에도 아악 악공을 향ㆍ당악 악공과 구별하여 부를 때 악생이라고 하였다.
관원의 경우, 1409년(태종 9)에는 종5품 전악(典樂) 1명을 포함하여 총 11명이었는데, 세종의 아악 부흥 정책에 따라 활동 범위가 확장되면서 직에 따른 인원의 변화도 생겼다. 1431년(세종 13)에 전악 1명이 2명으로 증원되었다. 그해 1월 조하(朝賀)에 새로 만든 아악을 사용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이후 1448년(세종 30)에는 5품과 6품을 각각 2명에서 1명으로 줄이고, 7품은 3명에서 1명을 줄이고, 8품은 5명에서 2명을 줄였지만, 9품은 7명에서 11명을 더 증원하여 총 25명이 되었다. 1453년(단종 1)에는 아악서(雅樂署)의 법제(法制)를 개정하여 악공이 오륙백에 이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아악, 당악, 향악의 근본 원리가 같다는 사실에 뜻을 두고 신악을 중시하는 용악(用樂) 정책을 펼치며 1457년(세조 3) 아악서를 전악서에 속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아악서는 전악서보다 다소 축소되어 전악서와 일원화되었다.
○ 활동
아악서는 종묘ㆍ사직ㆍ적전ㆍ문묘 등의 제례 아악을 담당했다. 건국 초기 제례악은 이원화되어 있었는데, 아악서 소속의 악인들은 등가와 헌가의 악기 연주만을 담당했고, 등가에서 부르는 노래, 즉 악장, 그리고 문무(文舞)와 무무(武舞)는 각각 봉상시(奉常寺) 소속의 재랑(齋郞)과 무공(武工)이 담당했다. 아악서 악공 출신 관원들은 악공을 지도하고 연습을 도와 제례에서 아악 연주가 잘 되도록 했다.
아악서는 전악서와 더불어 악의 실제 연행을 맡았으며, 아악 연행 시 문무와 무무, 악장을 담당한 봉상시와 함께 조선 건국 초기 아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러한 아악서의 아악 연행 전통은 악학도감, 장악원으로 이어져 조선시대 궁중 공연예술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된다.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이혜구, 「세종조의 음악기관」,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임영선, 「조선 초기 관습도감의 재고찰」, 『한국음악연구』 70, 2021. 정연주, 「조선전기 장악원의 역할과 위상」, 『한국사학보』 88, 2022. 송지원, 아악서, 국립국악원, 2014 (https://www.gugak.go.kr/site/program/board/basicboard/view?menuid=001003001002&boardtypeid=6&boardid=1051)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