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과 조선 초에 궁중 악인(樂人) 선발과 교육을 담당한 장악기관
악학은 고려 말기와 조선 전기의 예조 소속 십학(十學)의 하나로, 주로 악공 선발, 즉 취재(取才)와 습악(習樂)을 담당하였으며, 악서 및 악보 편찬과 제작, 고증, 악기 제작의 감독 등 업무를 수행했다.
고려시대 성리학과 대성악(大晟樂) 전래의 흐름 속에서 유교 사상 구현을 위한 전문 관리들의 교육을 위하여 1390년(공양왕 1) 예학ㆍ병학ㆍ율학ㆍ자학(字學)ㆍ의학ㆍ풍수음양학ㆍ이학(吏學)ㆍ역학(易學)ㆍ산학(算學)과 함께 십학(十學)의 하나로 설치되었다. 이후 악학은 조선 초 1406년(태종 6)에 다시 부활하였다.
○ 설립 목적
조선은 유교의 예악사상을 강화하고 예(禮)와 함께 악(樂)을 중시하였다. 이에 예조에서 잡학의 하나로 악학을 두고 악공취재와 습악을 담당하게 하였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악학에는 악공 선발, 즉 취재를 감독하는 제조(提調)가 있었는데, 초기에는 주로 취재를 맡았고, 재랑, 무공, 악공을 교육하기보다는 이들이 스스로 연습하도록 했다. 이후 악학에 정통한 3품 이하 6품 이상의 2명을 뽑아 제거(提擧)와 별좌(別坐)로 삼고 제조를 도와 악인의 습악과 악서 편찬과 제작 등을 추진하도록 했다. 악학은 관리직인 제조, 제거와 별좌, 악무를 연행하는 재랑, 무공과 악공으로 구분된다.
○ 역사적 변천
공양왕 때 십학의 하나로 신설된 악학은 조선 초에 육학(六學) 체계로 바뀌어 없어졌다가, 1406년(태종 6)에 십학으로 환원되며 다시 생겼다. 초기에 제조가 1명이었는데, 1412년(태종 12) 취재를 강화할 목적으로 제조 1명을 더 설치했다. 그리고 1418년(세종 즉위) 악학에 정통한 제거와 별좌 각 1명을 두어 대신(大臣)급 제조가 직접 문서를 다루어야 하는 문제를 해결했다. 세종 재위 초반에는 악학 별좌만 5명이 존재했으나, 1438년(세종 20)에는 악학 별좌 2명을 줄였고, 1452년(문종 2)에는 악학 별좌 3명 중 1명을 줄인 기록이 있다. 악학은 봉상시(奉常寺)ㆍ아악서(雅樂署)ㆍ전악서(典樂署)ㆍ관습도감(慣習都監)과 함께 존속하다가, 1457년(세조 3) 장악기관의 운영의 효율성을 위해 이들을 통폐합할 때, 관습도감과 통폐합되어 악학도감(樂學都監)으로 개칭되었다.
○ 활동
악학에서는 악을 연주하는 악공(樂工)과 문무(文舞)를 연행하는 재랑(齋郞), 무무(武舞)를 맡은 무공(武工) 등 악인(樂人)의 취재와 습악을 담당했다. 악학은 이들을 사맹삭(四孟朔), 즉 사계절의 첫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취재하여 결과에 따라 상을 주고, 봉상시의 악현관원(樂縣官員)과 함께 이들의 습악을 고찰하는 역할을 했다. 악학의 관원들은 악에 밝았다. 남급(南汲, ?~?)과 박연(朴堧, 1378~1458) 등은 악학 별좌를 역임했는데, 특히 박연은 제조로서 세종의 음악 고증 복원, 악기 제작 등의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의정이었던 맹사성(孟思誠, 1360~1438), 유사눌(柳思訥, 1375~1440) 등도 악학 제조를 지냈다.
악학은 유교 이념에 따라 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와 함께 중시된 악(樂)을 직접 수행하는 악인의 취재를 맡고 이들의 습악을 이끌었다. 또한 악학의 제조와 별좌 등 악에 밝은 관리들은 악의 연구에 기반한 악의 실현을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악학의 활동은 악학도감, 장악원으로 이어져 조선시대 국가 공연예술의 기틀을 마련했다고 평가된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송방송, 『악장등록연구』,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0. 김대식, 「조선초 십학(十學) 제도의 설치와 변천」, 『아시아교육연구』 12/3, 2011. 이혜구, 「세종조의 음악기관」,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 2001. 정연주, 「조선 전기 장악원의 역할과 위상」, 『한국사학보』 88, 2022.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