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악감(大樂監)
신라시대 악을 관장한 궁중 장악기관.
음성서가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651년(진덕여왕 5) 음성서에 대사(大舍)직을 두어 적어도 진덕여왕 대 이전에 음성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설립 목적 신라시대에 나라의 의례가 정비되면서 제례를 비롯한 많은 궁중 행사에 악이 수반되었다. 음성서는 이러한 악을 관장하여 왕실 운영에 도움이 되도록 설립되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651년(진덕여왕 5)에 음성서 대사(大舍) 2명을 두었다. 대사에는 관등이 사지(舍知)에서 나마(奈麻)까지인 자가 임명되었다. 『삼국사기』 687년(신문왕 7) 기록에 따르면, 음성서의 관리에는 대사 위에 음성서의 최고직인 경(卿) 2명, 대사 2명, 사(史) 4명이 있었다. 대사는 문서, 장부를 관리하는 역할을 했고, 사는 행정 실무자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성서 악인의 인원에 대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음성서는 예부 소속 기관의 하나였다. 예부 소속 기관에는 경급(卿級), 감급(監級), 대사급이 있었는데, 5개의 소속 기관, 즉 대도서ㆍ음성서ㆍ국학ㆍ전사서ㆍ사범서 중에서 음성서는 사원과 승려들의 인적 사항에 관한 업무를 관장한 대도서(大道署)와 유교 교육기관인 국학(國學)과 함께 최고의 관직으로 경(卿)을 두고 있는 상급 기관이었다. ○ 역사적 변천 음성서의 관직은 점차 늘어났고 기관 명칭과 관리의 직책명에도 변화가 있었다. 651년(진덕여왕 5)에는 대사만 있었으나 이후 장(長)을 두었고, 687년(신문왕 7)에 장을 경(卿)으로 개편하였다. 687년(신문왕 7) 4월에 오묘(五廟) 제사가 치러졌는데, 바로 그 해에 장이 경으로 바뀐 것은 일종의 승격이며 이 무렵에 음성서의 업무가 확장되고 궁중 장악기관으로 본격적으로 기능하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경덕왕조(742~765)에는 음성서를 대악감(大樂監)으로 바꾸었다가 혜공왕이 다시 음성서로 부르게 하였다. 또한 경덕왕은 경을 사악(司樂)으로, 대사(大舍)는 주부(主簿)로 바꾸었지만 혜공왕 대에 다시 본래대로 돌아갔다. 경덕왕은 음성서뿐만 아니라 다른 여러 기관과 관직명 등을 중국식으로 바꾸었는데, 대부분 혜공왕 때 다시 복구되었다. ○ 활동 신라에서는 시조(始祖)ㆍ태조와 직계 4조(祖)ㆍ사직신ㆍ삼산(三山)과 오악(五嶽) 이하 명산대천 등에 제를 올리고, 이 밖에도 일월제ㆍ오성제(五星祭)ㆍ기우제 등 많은 제례를 행했다. 여기에는 악이 수반되었을 것이며, 국왕이 주재하는 연회나 왕의 행차에서도 악이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신라 관제에 영향을 주었던 당나라, 그리고 통일신라 다음 왕조인 고려 장악기관의 사례에 비추어 음성서는 이러한 궁중 의례에서 악의 연행, 악인 교육과 악기 관리 등을 관장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음성서는 구체적인 역사적 기록이 남아 있는 신라의 장악기관이다. 음성서는 삼국시대 신라에서 설립되어 삼국 통일 이후에도 지속하여 제례와 연례 등 궁중 의례에서 악을 관장하였다. 음성서를 통해 고대 가(歌)ㆍ무(舞)ㆍ악(樂) 전승의 토대가 마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윤태양, 「음성서의 성립과정과 원형적 구조 재고-우륵 관련 기사를 실마리로 삼아」, 『국악원논문집』 47, 2023 이인철, 「신라의 음성서」,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한영화, 「신라 예부의 성립과 운영」, 『인문과학』 76, 2020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