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악부(雅樂部)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악(樂)을 담당한 부서.
○ 설립 목적
일제강점기 이왕가의 의례에 필요한 악을 전담하는 기구로서 설립되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1911년부터 1925년까지는 양악대와 구분하여 아악대라고 불렸으며, 1925년 아악부로 바뀌었다. 1911년 이왕직아악부는 아악사장(雅樂師長) 1명, 아악사(雅樂師) 2명, 장악(掌樂) 8명, 전악(典樂) 10명, 악공(樂工) 80명, 악생(樂生) 51명, 취타내취(吹打內吹) 18명, 세악내취(細樂內吹) 18명, 사동(使童) 1명, 총 189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악사장은 아악부를 대표하는 자로서, 음악의 감독과 지휘 등을 담당하고, 아악생을 교육ㆍ관리하는 등 아악부 업무를 총괄했다. 아악사는 아악사장을 보좌하여 각종 행정과 교육을 담당하고, 종묘제례에서 악대를 거느리고 진행을 맡아 협률랑(協律郞) 역할을 했다. 장악과 전악은 1913년 조직 개편 때 모두 아악수장(雅樂手長)으로 명칭이 바뀌었는데, 아악수장은 아악사장과 아악사를 보좌하여 아악부의 연주 활동을 이끌었다. 악공은 향악과 당악을 담당하고, 악생은 아악을 담당했다. 취타내취는 취타악기 편성으로 대취타를, 세악내취는 삼현육각 편성으로 취타 등을 연주하는 악대였다. 이밖에, 상황에 따라 계약직으로 채용하는 촉탁(囑託)이 있었는데, 예를 들면 가곡ㆍ가사ㆍ시조를 가르쳤던 하규일(河圭一, 1867~1937) 등이 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초기 이왕직아악부의 조직은 수 차례 변화를 거쳤다.
○ 역사적 변천
1913년에 향악과 당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아악을 담당하는 악생으로 대별되던 좌방과 우방의 구분을 없애고, 아악수와 아악수장이라는 직급을 만들어 악공과 악생, 일부 세악내취(細樂內吹) 연주자를 아악수로 통합하였다. 그러나 취타내취는 인원을 줄이고 남겨 두었다. 이렇게 하여 1911년 총 189명이던 인원은 1913년 105명으로 줄어들었다. 이후 1915년 인원이 58명으로 감원되었는데, 이 무렵에 이왕직아악부 폐지에 대한 의견이 있었다. 이때 취타내취도 이왕직아악부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후 1919년에는 아악생 양성을 위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설치하였고, 1921년 일본의 궁내성악부(宮內省樂部) 촉탁 다나베 히사오(田邊尙雄)가 이왕직아악부를 시찰한 후 아악 보존에 대한 건의 등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조선총독부에 제출하면서 아악부의 사정이 다소 호전되었다. 이에 1926년경에는 아악사장 1명, 아악사 2명, 아악수장 8명, 아악수 31명, 그 밑으로 아악수보(雅樂手補) 21명, 아악생(雅樂生) 18명, 이 밖에 이왕직 예식과의 전사(典祀)가 감독을 겸하는 감독전사겸(監督典祀兼) 1명 등, 인원이 총 82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순종의 국상으로 인해 이왕가 왕족이 부재하게 되면서 이왕직아악부는 이왕가를 위한 아악 연주보다는 방송과 공연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활동을 넓혔다.
○ 활동
이왕직아악부는 조선시대 장악원과 대한제국 교방사 등의 전통을 계승하여 종묘와 문묘 제례, 고종과 순종의 부묘의(祔廟儀), 고종비 명성황후(1851~1895)와 순종비의 혼전(魂殿) 등에서 제례악을 담당했다. 연간 제례 횟수는 감소하였으나 정해진 때에 제를 지냈으며, 이 밖에 고종과 순종의 생신 연회에서 무동 정재와 연향악을 연행했다. 1919년부터는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개소하여 아악생을 양성하고, 『조선악개요』 등 악서 및 정간보, 오선보 등 악보 편찬, 《조선아악》ㆍ《아악정수》 등 음반 발매, 편종, 편경, 특경 등 아악기 개수(改修) 혹은 제작 사업을 진행했다. 이왕가 의례에서 악을 담당하는 역할을 넘어서 1928년부터 1945년까지는 약 170회 방송에 출연했다. 일제의 행사로 야외 및 극장 등 다양한 장소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고, 아악부 운니동 신청사의 소극장 일소당(佾韶堂)에서 방문객을 위한 환영 공연을 했으며 1932년부터 1945년까지는 자체 연주력 향상을 위해 이습회(肄習會)라고 하는 발표회를 지속적으로 개최했다.
이왕직아악부는 국권을 상실했던 일제강점기의 열악한 환경에서 한정적이나마 지속된 궁중 의례의 악을 연행하고 교육함으로써 조선시대 궁중음악을 20세기에 전승하는 역할을 했다. 나아가 이왕직아악부는 내외부에서 다양한 공연과 방송 활동을 펼쳤는데, 이로써 조선조 궁중 의례에 수반되었던 가(歌)ㆍ무(舞)ㆍ악(樂)이 하나의 공연예술로서 자리 잡게 되었다고 평가된다.
송혜진, 「이왕직아악부의 이습회 운영과 20세기 궁중음악의 전승」,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5.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