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궁내청 소속 이왕직아악부 부설 아악생 양성 기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는 궁중악무를 전승할 아악생 양성을 목적으로 1919년 개소했다. 1945년 6기생까지 총 97명의 아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교육과정을 거쳐 졸업 후 이왕직아악부에서 아악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했다. 광복 직후 해산되었다.
20세기에 들어서 아악수의 세습적 전승이 어려워졌다. 1915년경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는 46명이었는데, 이는 종묘제례에 필요한 악사 인원으로도 부족한 정도였고, 게다가 장악원 출신의 아악수들은 점차 노령이 되어 갔다. 이에 이왕직아악부는 1919년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1기 아악생을 모집하고, 다음 해인 1920년에 〈아악생양성규정〉을 제정했다.
○ 설립 목적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는 아악생 양성을 목적으로 1919년부터 아악생을 공개 모집했다. 이왕직아악부는 이곳을 졸업한 아악생을 아악수 또는 아악수보로 채용하여 다양한 활동을 유지할 수 있었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1920년 〈아악생양성규정〉에 따르면, 아악생은 만 13세 이상 19세 이하 보통학교 2학년 과정 수료 또는 이와 동등 이상 학력의 남성을 대상으로 했다. 이왕직아악부의 아악수장이 아악수와 아악수보(雅樂手補)뿐 아니라,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아악생의 지도도 맡았다. 전공별로 사범이 있었는데, 이들은 거문고 이수경(李壽卿, 1882~1955)과 함화진(咸和鎭, 1884~1948), 가야금 김영제(金甯濟, 1883~1954), 가곡 하규일(河圭一, 1867~1937), 피리 이봉기(1853~?), 해금 이원성, 대금 김계선(金桂善, 1891~1943) 등이었다.
○ 역사적 변천
처음에는 일반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입소 지원자가 적고 이왕직 직원들의 자제들이 많았으나, 모집 횟수가 거듭되면서 지원자가 늘어 간단한 입학시험 제도를 도입했다. 1기생과 2기생의 교육 기간은 3년이었지만, 3기생부터는 2년 더 연장하여 5년 과정으로 하고, 이에 따라 교육 체계도 정비했다. 정원은 처음에는 9명이었는데, 1922년 6월 〈아악생양성규정〉 개정에서 정원을 18명으로, 1941년에는 30명으로 증원했다.
교육 내용도 역사적으로 변화를 거쳤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 설립 초기에는 아악을 중심으로 한 음악 과목 외에 수신(修身), 한문, 습자(習字), 일어 등 일반과목이 조금 있었는데, 〈아악생양성규정〉이 개정될 때마다 일반학과 교과도 점차 증가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초기에는 양성소의 설립 목적을 반영하여 조선의 후신인 이왕가의 유지에 필요한 제례악의 비중이 두드러졌다. 악곡으로 보면, 1920년에는 《문묘제례악》부터 시작해서 《종묘제례악》을 2학년까지 하고 3학년 때 연향악(宴享樂), 그리고 풍류악(風流樂)인 《영산회상》, 가곡 등을 학습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 후반 순종 사후, 왕족이 부재하게 되면서 이왕직의 변화에 맞게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에서도 1931년 〈아악생양성규정〉을 개정하여 과를 음악과, 악리과, 보통과로 구분하였다. 음악과에는 제례악과 연향악 및 전공, 가곡ㆍ가사ㆍ시조 등을, 악리과에는 아악이론 뿐 아니라 음향학ㆍ보법창가(譜法唱歌)ㆍ작곡법ㆍ합창 등과 같은 서양음악 관련 내용을 넣고, 보통과에는 기존 수신, 일본어 등 외에 영어 등을 추가했다. 1941년에는 과의 구분을 없애고 양악(洋樂)을 과목명으로 두어 아악과 상대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양성소는 광복 직후 해산되었다.
○ 활동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가 궁중악에 대한 실기와 이론 교육을 병행하여 학생인 아악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아악수로서 이왕직아악부에서 활동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아악수보(雅樂手補)로 근무하다가 일정 기간이 지나면 아악부 내규에 따라 아악수로 승진했고, 간혹 필요에 따라서는 아악생 신분이면서 아악수보 직급으로 아악부 행사에 참가하기도 했다. 졸업 시 성적이 우수한 아악생은 아악수보를 거치지 않고 아악수로 임명되기도 했다.
〈아악생양성규정〉을 개정한 1931년부터는 연향악과 전공, 그리고 가곡ㆍ가사ㆍ시조 등에 이르기까지 더 다양한 전통음악을 학습한 결과, 이왕직아악부가 방송 출연과 외부 무대공연 등에서 폭넓은 레퍼토리를 소화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또한 서양음악 교육을 본격적으로 받게 되면서 졸업생들은 아악수로 근무하며 아악부의 오선악보 채보사업에도 참여했다. 1930년대 중반에는 거의 대부분의 이왕직아악부 아악수가 양성소 출신으로 바뀌었다. 이에 아악부의 발전 방안으로 신진 아악수의 개인 기량을 높여 노악사처럼 원숙한 연주를 할 수 있도록 이습회라는 명칭으로 1932년부터 매월 1회 정기 발표회를 개최했다. 이습회는 아악생들의 기량을 높일 뿐 아니라 전통 궁중악과 풍류악의 격조 높은 예술세계를 대중에게 널리 알리는 역할을 했다.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통해서 조선시대 장악원과 대한제국기 장악기관을 거쳐 전승된 궁중 전통 가(歌)ㆍ무(舞)ㆍ악(樂)을 비롯한 풍류 등 레퍼토리가 다음 세대로 이어질 수 있었다. 또한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의 실기와 이론을 겸비한 예술교육의 전통은 해방 이후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양성소로 이어졌다.
송혜진, 「이왕직아악부의 이습회 운영과 20세기 궁중음악의 전승」, 『역대 국립음악기관 연구』, 2001. 이수정, 「이왕직아악부의 조직과 활동」,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15.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