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梨園)
조선시대 대표적인 궁중 장악기관
1392년 조선 개국 때부터 1457년(세조 3) 이전까지 65년 동안 여러 장악기관이 궁중 음악과 무용 교육 및 연행을 나누어 맡았다. 봉상시와 아악서가 아악을, 관습도감과 전악서가 향악과 당악을 맡았고, 악학이 악공의 습악(習樂)과 취재(取才)를 담당했다. 1457년(세조 3) 장악기관 운영의 효율화를 위하여 악학과 관습도감을 합해서 악학도감이라고 했다. 이어 다음 해인 1458년(세조 4), 전악서와 아악서를 통합하여 장악서라고 칭하고 장악서를 악학도감에 예속시켰다. 1466년(세조 12)에 악학도감을 장악서에 합치고, 이후 장악서를 예조 소속 정3품 관청인 장악원으로 승격시켰다. 장악서가 장악원으로 승격된 시기는 조선왕조실록의 관직명의 기록에 의거하여, 1466년(세조 13)과 1469(예종 1) 사이일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장악기관이 장악원으로 일원화된 것은 국초에 장악기관 운영 효율성 제고의 필요성, 아악과 향ㆍ당악의 상이점보다는 악의 보편성에 대한 인식이 강화된 결과이다.
○ 설립 목적
장악원은 국왕이 군자의 위치에서 예악(禮樂)을 통해 백성을 교화하여 다스리는 ‘덕치(德治)’의 실현이라는 유교의 이념에 따라 악(樂)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설립되었다. 성종 대에 장악원 청사가 완공된 뒤 성현이 지은 「장악원제명기(掌樂院題名記)」에는 이러한 장악원의 설립 목적이 잘 드러나 있다. “나라에 하루 동안이라도 음악이 없을 수 없으니, 음악이 없다면 침체하고 야비하여 무엇으로도 그 화기를 이룩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왕(先王)이 음악의 방법을 세우고 음악의 관원을 설치하여 인심의 같은 바로 감발(感發)하고 징계하여 가다듬게 하는 바가 있게 한 것이다.”
○ 조직의 체계와 구성원
장악원의 악인에는 향악과 당악을 담당한 우방 소속 악공, 아악을 연주한 좌방 소속 악생, 궁중 왕실의 여성들을 위한 내연(內宴)의 음악 연주를 위한 관현맹인, 연향에서 정재(呈才)와 노래를 담당한 여기, 외연(外宴)과 사신연(使臣宴), 그리고 임금이 궁궐 밖으로 거둥 때 노래와 춤을 담당한 가동(歌童)과 무동(舞童) 등이 있었다. 이들 악인 중에 일부는 정해진 녹봉 없이 복무 기간 동안 근무 성적에 의하여 녹봉을 받는 체아직 관리가 되어 음악과 춤 교육 등의 일을 맡았다. 행정은 문관 출신의 정직 관원이 관장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정직 관원은 당상관인 제조(提調) 2, 낭관(郎官)인 정3품의 정(正) 1, 종4품의 첨정(僉正) 1, 종6품의 주부(主簿) 1, 종7품의 직장(直長) 1명 등 6명으로 구성되었다. 정직 관리들은 대체로 음률에 밝았는데, 조정에서는 관리들의 전문성을 고려하여 이들에게 구임법(久任法)을 적용하고, 인사이동이 자주 발생하지 않도록 하였다. 흔히 정승이 겸직했던 제조는 악공의 취재(取材)를 관리하고 조정 신하들의 악학을 권려(勸勵)했다. 정(正)은 장악원을 총괄하여 다스리는 위치에 있었는데, 행사에서 협률랑의 역할을 담당하거나 실록의 편수(編修) 작업 등에 참여했다.
체아직은 잡직(雜職)으로 분류되는데, 정6품의 전악(典樂) 1인, 종6품의 부전악 2인, 정7품의 전율(典律) 2인, 종7품의 부전율 2인, 정8품의 전음(典音) 2인, 종8품의 부전음 4인, 정9품의 전성(典聲) 10인, 종9품의 부전성 23인, 이상 총 46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체아직 46인 중 악공의 체아(遞兒)는 모두 20인으로 당악 담당 체아 12인과 향악 담당 체아 8인으로 이루어졌다. 나머지 26인은 아악 담당 악생의 체아와 관현맹인의 체아였다.
악공이나 악생의 결원이 발생하면 전국 팔도에 고르게 수를 배정하여 충원했다. 악공은 천인(賤人)의 자녀, 악생은 양인(良人)의 자녀를 대상으로 시험을 쳐서 뽑았다. 시험에 합격한 악공과 악생은 장악원에서 활동하는 동안 민가(民家)에 의탁하거나 한 곳에 모여 살았다. 악공과 악생들은 일정한 녹봉 없이, 각 지방에 있는 봉족(奉足)들이 그들의 신역(身役) 대신에 나라에 바치는 베를 조달받아 생활했다. 여기(女妓)는 여러 고을의 관비(官婢) 중 어린 자들을 뽑아 바쳤는데, 인조반정(1623) 이후에는 장악원 여기를 혁파하여 장악원에는 여기가 없어졌고 행사가 있을 때 임시로 뽑아 썼다. 가동과 무동은 공천과 양인에서 뽑아 썼는데, 악공으로 이속(移屬)되기도 했다.
○ 역사 변천 과정
조선 초에 여러 장악기관을 통폐합하여 설립된 장악원은 규모가 커서 일천 명에 가까운 인원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임진왜란(1592), 정묘호란(1627), 병자호란(1636) 등 전쟁이 발발하고 국가 재정이 어려워지자 장악원의 규모는 크게 줄어들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성종대에 장악원의 우방 악공이 572명, 좌방 악생이 399명으로 총 971명이 있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악공과 악생의 수는 총 837명이었고, 1604년(선조 37)에는 824명, 정묘호란 이후 626명, 병자호란(1636) 이후 619명으로 줄었다가 영조 때 641명이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두 번의 전쟁을 치르면서 장악원 악인의 수가 300여명 가량 감원된 것인데, 특히 아악을 담당한 악생의 숫자가 200여명 감소했다. 이후, 『육전조례(六典條例)』(1867)에 의하면, 장악원 악공은 167명, 악생은 90명이었다.
장악원 청사의 변천을 살펴보면, 장악원은 처음에는 일정한 건물이 없다가 성종 대에 한성 서부 소속 여경방의 봉상시 인근에 민가를 철거하고 새로 지었다. 당상관과 낭청들의 사무 공간, 악공과 악생, 여기 등 서로 다른 악인들의 공간, 악기 보관 창고, 정조(正朝)나 동지(冬至) 때 문무백관들이 음악에 맞추어 조하의식(朝賀儀式)을 연습할 수 있는 넓은 뜰을 갖추었다. 이곳은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위의 그림 속에 기로회가 열린 이원, 즉 장악원은 현재 종로구 신문로 2가 부근으로 추정된다. 이 청사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지고 1611년(광해군 11) 이후 남부 명례방, 현재 을지로 66번지에 새 청사가 건립되었다.
남부 명례방 장악원 청사는 1904년 러일전쟁 때 일본 군대의 전진기지로 징발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장악원의 명칭도 역사적으로 몇 차례 변화를 거쳤다. 장악원은 조선 중기 연산군의 사적(私的)인 기관으로 경영되면서 1505년(연산군 11) 연방원(聯芳院)으로 개칭되었다가 이듬해 중종이 왕으로 추대된 후 명칭을 회복하였다. 이후 장악원이라는 명칭은 대한제국이 선포된 1897년 교방사로 개칭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다만, 장악원은 중국 당나라 현종이 설치한 궁중음악 교습소의 명칭인 이원(梨園)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1793년(영조 29) 장악원을 이원이라고 부르지 못하도록 금했으나, 이원이라는 명칭은 이후에도 사용되었다. 이후, 조선 말기에 이르러 관제가 수시로 개편되면서 장악원은 기구가 축소될 뿐 아니라 소속과 명칭도 여러 차례 바뀌었다. 1894년(고종 31) 갑오경장 관제 개혁 시기부터 예조가 없어지면서 대한제국기까지 장악원은 궁내부(宮內府) 소속이 되었고 봉상사, 협률과, 교방사, 장악과, 장악부로 개편 축소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에는 궁내성(宮內省) 이왕직 소속이었고, 이왕직아악부로 불렸다.
○ 활동
장악원은 예조에서 맡아 거행하는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종묘제례를 비롯하여 사직제ㆍ풍운뇌우제ㆍ선농제ㆍ선잠제ㆍ문묘제례 등과 같은 제사뿐만 아니라 궁중에서 임금이 문무백관과 조회하는 의식, 공신들과 왕실 가족의 잔치인 진연과 진찬, 그리고 노인들을 위한 양로연, 외국 사신을 위한 연향, 임금의 거둥 등 왕실의 모든 의식에서 음악과 무용을 담당했다. 또한 왕이 특별히 민간에 음악을 내려줄 때 양반들의 사가(私家)에서 이를 연행하기도 했다.
장악원은 악을 교육하고 연구하는 정책적인 기관으로도 역할을 했다. 예악에 밝은 정직 관리들은 악의 정책과 제도, 악장(가사), 의례와 음률, 춤의 쓰임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전악을 비롯한 악인들과 함께 악보와 『악학궤범』과 같은 악서를 제작했다. 경륜이 깊은 악공은 악사(樂師)로서 전악 등 직을 받아 후배 악공들을 가르치고, 궁중 악기 제작을 위한 악기도감 혹은 악기조성청이 설치될 때는 악기 제작 과정을 감독했다. 또한 고종이 조선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에 관리들을 보냈을 때, 장악원 악사들도 파견되어 음악을 연주했다.
장악원은 조선시대 유교 이념에 따라 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예와 함께 중시한 악을 관장하는 기관이었다. 조선의 가(歌)ㆍ무(舞)ㆍ악(樂)은 나라의 성쇠와 함께 부침을 겪으며 장악원을 중심으로 약 500년 동안 지속되어 왔다. 장악원에는 국가 관리들의 악에 대한 이상과 철학, 악인의 예술혼, 이들의 생활을 위해 포(布)를 제공한 백성들의 피땀이 담겨있다고 하겠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용재총화(慵齋叢話)』 『육전조례(六典條例)』
이숙희, 「장악기관 청사연구-조선시대부터 일제강점기까지」, 『서울학연구』 61, 2015. 이정희, 「대한제국기 장악기관의 체제」, 『공연문화연구』 17, 2008. 정연주, 「조선전기 장악원의 역할과 위상」, 『한국사학보』 88, 2022.
서인화(徐仁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