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고ㆍ중행고ㆍ소행고ㆍ화룡행고
행고라는 명칭의 최초 기록은 서긍(徐兢)의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이다. 서긍이 병기(兵器)의 하나로 소개한 행고는 중강(中腔)이 좀 길고, 북통에는 쇠고리[銅環] 모양의 장식을 달았으며, 연주자들이 자색 띠로 북을 묶어 허리 아래에 조여 매는 형태로, 이러한 유형의 북은 조선 전기 『세종실록』 「군례」 의 병기(兵器) 편에 수록된 ‘비(鞞)’와 ‘고(鼓)’ 계통으로 이해된다. 조선 후기에는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의 군례 관련 기록에서 중앙과 지방의 군대에 비치되었던 행고류의 유형과 수량을 살필 수 있으며, 영조 조에는 국왕의 행차에서 행고를 치는 법에 대한 상세 논의가 있었고, 정조 때에 각 병영에서 새로 갖춘 군물(軍物) 목록에 행고가 포함되었음이 확인된다. 조선 후기 한글 가사 「한양가」에 “한가운데 취고수는 흰 한삼 두 북채를 일시에 수십 명이 행고를 같이 치니, 듣기에도 좋거니와 보기에도 엄위하다”라고 한 것이나, 조선통신사 정조의 화성 능행을 주제로 그린 반차도에서 말을 타고 가면서 치는 행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통신사의 구성에 행고가 포함되었고, 일부 조선통신사 도상에 행고를 치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처럼 대취타에 편성되었던 행고라는 명칭은 20세기 이후 용고로 대체되었다. 이왕직아악부 소장의 악기 목록 및 사진집에서 행고 대신 용고가 보이며, 언제, 어떤 이유로 대체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조선시대 행고류의 규격과 장식, 문양은 용도에 따라 다양하게 제작된 듯 하다. 『만기요람』에서 대행고·중행고·소행고·화룡행고의 명칭으로 차이를 드러냈는데 정확한 규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현재까지 찾지 못하였다. 『세종실록』 「오례」 및 조선후기와 20세기 초반에 그려진 행렬도, 현전하는 대취타용 북 유물에서 북통과 북면의 채색과 장식을 살필 수 있는데, 북통을 붉은 색칠로 마감한 것과 꽃 또는 용 문양을 넣은 것이 있다. 1902년에 독일 라이프치이 그라시 민속박물관(GRASSI Museum für Völkerkunde zu Leipzig)에서 구입한 19세기 유물 용고는 북면 지름 48cm, 북통 너비 28cm의 못북으로 북통에 쇠고리가 박혀있고, 북면에는 태극 문양이, 북통에는 용 문양이 그려져 있다. 이 북은 현재까지 확인된 가장 오래된 용고 유물로서 이왕직아악부 소장 악기도록 『이왕가악기(건)에 수록된 사진의 용고와 유사하다. 9세기 초반의 실물 유물과 사진을 통해 조선시대의 행고 중 용 문양을 갖춘 북의 유형을 짐작해볼 수 있다. 1926년에 제작된 <조선열성능행도 병풍(朝鮮列聖陵幸圖 屛風)>에 묘사된 행고 주자는 붉은 칠로 마감한 행고를 허리에 두르고, 양손에 쥔 북 채로 걷거나 말을 타고 가면서 북을 치고 있다.
행고는 그 명칭이 현재 사용되지 않지만, 크기와 형태가 다양하게 분화되어 용도에 따라 사용되어 온 군례용 북으로, 현재 대취타에 편성되는 용고의 전신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악학궤범』 『춘관통고(春官通考)』 『정조실록』 『순조실록』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 『광재물보(廣才物譜)』
송혜진, 『한국악기』, 열화당, 2000. 辛基秀ㆍ仲尾宏, 『大系 朝鮮通信使信使: 善隣と友好の記錄(3)』, 明石書店, 1995.
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