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俳優), 우인(優人), 재인(才人). 희자(戱子), 희인(戱人)
연희 종사자를 뜻하는 용어의 일종
정재인은 재인 신분으로 궁중 나례(儺禮) 및 거가환궁(車駕還宮), 중국 사신들을 위한 영접 행사, 과거 급제자의 삼일유가(三日遊街)에 참여하였던 연희집단을 가리키는 용어로 사용되었다.
재인으로 불리며 연희를 펼치던 집단의 존재는 고대 문헌에서 보이나 각종 의례에 참여하여 특정 연희 기량을 선보이는 이들을 ‘정재인’으로 일컬은 예는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 등의 기록과 조선 후기의 어휘집 『광재물보(廣才物譜)』 등에서 확인된다. 넓은 의미로 ‘공연자’를 뜻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좁은 의미로는 궁중 진연에 참여하는 여령(女伶)ㆍ여기(女妓)ㆍ무동(舞童)이 아닌 잡희를 연행하는 창우 집단을 의미했다. 창우 집단에 속하는 정재인의 소집과 동원, 연행 등은 ‘나례도감(儺禮都監)’, ‘나례색(儺禮色)’, ‘영접도감(迎接都監)’에서 관리하였다.
민간에서 정재인이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다는 사실은 유몽인의 『어우야담』에 전하는 ‘정번의 정재인[鄭蕃之呈才人]’이라는 속담과 그 배경 이야기를 통해 살필 수 있다. 서얼 출신의 정번이라는 인물이 알성시에서 급제하여 삼일유가를 하게되었는데 정재인들이 행차를 선도하며 성대하게 공연을 펼치며 가던 중, 합격이 취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공연을 멈춘 채 고개를 숙이고 뿔뿔이 흩어졌다. 이 일이 있은 후 사람들은 처음 시작은 대단했으나 끝이 시들해진 일을 '정번의 정재인'이라 일컬었다는 것이다. ‘정번의 정재인’ 일화를 통해 조선후기 일반인들에 인식된 정재인의 구체적인 존재 양상을 참고할 수 있다.
‘정재’라는 말이 주로 ‘궁중 춤’과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으나, 조선시대에는 궁중 연향에서 여령과 무동에 의해 상연되는 춤 외에 연희 일반을 아우르는 의미였으며, ‘정재 연희자’를 뜻하는 ‘정재인’이라는 말 역시 포괄적 의미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좁은 의미로 궁중 나례 및 사신연, 삼일유가에서 가무와 잡희를 펼치던 창우 집단 명칭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정재’와 ‘정재인’의 관계 및 개념을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나례청등록(儺禮廳謄錄)』 『영접도감의궤(迎接都監儀軌)』 『광재물보(廣才物譜)』 『어우야담(於于野談)』
손태도, 『광대의 가창문화』 집문당, 2015. 임형택, 『한문서사의 영토 1-실사와 허구사이』, 태학사, 2012. 전경욱, 『한국전통연희사』, 학고재, 2020. 사진실, 「인조 이후 나례의 사습과 산대도감패의 흥행 활동」, 『공연문화연구』 28, 2014. 이보람, 「우희의 역사와 연행양상」,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송혜진(宋惠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