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하사한 악무(樂舞), 또는 임금이 악무를 하사하는 것. 또는 중국에서 조선에 보내온 악기나 악무
임금이 종실과 친인척, 원로 신하의 노고를 치하하거나 축하할 일이 있을 때, 과거급제자에게 베푸는 ‘사연(賜宴)’에 궁중 악무와 잡희 등을 하사하는 것이다. 한편, 고려와 조선시대에 중국 황제가 악기를 보내온 것을 ‘사악’으로 표기한 예가 있다.
국가의 오례 및 궁중 악무의 체계가 정립되면서 사연 및 사연에 주악을 하사하는 전통이 생겨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시대의 가례(嘉禮) 및 빈례(賓禮) 관련 기록에 임금이 잔치를 베풀 때 악무와 잡희(雜戲)를 하사한 내용이 다수 확인된다. 그러나 ‘사악’이라는 용어로 운영 규정을 마련하고 시행한 것은 조선 전기에 들어서다. 조선 전기 성종 때 편찬된 『악학궤범』에서 사악 등급에 따른 주악 인원의 구성과 수, 복식 등을 살필 수 있는데 등급 차등의 주요소는 악곡이 아니라 연주 인원의 수와 복식이었다. 『악학궤범』에 제시된 사악의 차등 규정은 다음과 같다.
사악의 등급 |
주악인원 | 복식 | ||||
악사 | 악공 | 여기 | 악사 | 악공 | 여기 | |
일등사악 | 1 | 10 | 20 | 평상복 |
녹주두건 + 토홍단령 |
평상복 |
이등사악 | 1 | 10 | 15 | |||
삼등사악 | 1 | 7 | 10 | |||
사등사악 | 1 | 5 | 1 |
한편, 조선말기 고종 때의 『육전조례』의 사악은 세 등급으로 구분되었고, 인원 구성이 조선 전기와 달라졌으며 복식에 대한 언급은 생략되어 있다.
사악의 | 주악인원 | 기타 | ||||
등급 | 악사 | 전악 | 악공 | 무동 | 처용무 | 색리 |
일등사악 | 1 | 2 | 20 | 10 | 5 | 1 |
이등사악 | 1 | 2 | 15 | 10 | 1 | |
삼등사악 | 1 | 6 | |
위의 『육전조례』가 규정한 인원수와 신분은 『악학궤범』에 명시된 것과 차이를 보이며, 특히 ‘여기’가 ‘무동’으로 대체된 점이 주목된다. 이처럼 사악에 무동을 파견한 사례는 고종 이전의 인조ㆍ영조ㆍ정조 대의 기록 및 연회 장면을 그린 도상에서도 확인된다. 사악에 여기만 파견하던 조선 전기 관행과 달리, 외연(外宴)에 남악(男樂)을 쓰기 시작하면서 사악에서도 무동과 여기의 사용 여부가 변화를 겪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실제 사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주악 인원의 규모와 복식, 무동과 여기의 출연 여부가 규정대로 시행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상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한편, 고려 예종 때 북송에서 대성악을 보내왔을 때 ‘사악’이라 하였고, 조선 전기 『경국대전』에서는 당악을 ‘당 사악’이라 표현하였으며, 태종 때에 명에서 악기를 보내왔을 때 ‘사악을 받다’, ‘사악을 받들다’는 식으로 기술한 예가 있다.
○ 목적과 계기
사악은 임금이 ‘군신동락(君臣同樂)’하는 한 방법으로 시행되었다. 국가 오례 중 가례와 빈례에 규정된 연회 외에도 임금이 종실과 친인척, 공로가 있는 신하들을 위로하거나 경사를 맞은 신하들을 축하할 일이 있을 때 술과 음식, 악무를 갖춘 잔치인 사연이 시행되었다. 이중 가장 빈번하게 시행된 사악은 양로연ㆍ기로연ㆍ기영회ㆍ은영연ㆍ전별연ㆍ궤장연ㆍ경수연ㆍ회혼례 및 회방연 등과 관련이 있었고, 이 밖에 도서 집필이나 시강(侍講)을 마쳤을 때도 사악한 사례가 있다.
○ 도상을 통해 본 사악의 구성
조선 후기에 이루어진 여러 가지 사연의 현장은 〈중묘조서연관사연도첩(中廟朝書筵官賜宴圖帖)〉(1535년 경)ㆍ〈서총대친림연회도(瑞蔥臺親臨宴會圖)〉(1564)ㆍ〈기영회도(耆英會圖)〉(1584)ㆍ〈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1585)ㆍ〈기석설연지도(耆碩設宴之圖)〉(1621)ㆍ〈사궤장연회도첩(賜几杖宴會圖牒)〉(1623)ㆍ〈사궤장연겸기로회도(賜⼏杖宴兼耆⽼會圖)〉(1623)ㆍ〈기사계첩(耆社契帖)〉(1720)ㆍ〈이원기로계첩(梨園耆⽼契帖)〉(1730)ㆍ〈종친부사연도(宗親府賜宴圖)〉(1710)ㆍ〈선묘조제재경수연도첩(宣廟朝諸宰慶壽宴圖帖)〉(1605년 경) 등의 그림으로도 전하며, 이 그림에서 사악의 장면을 살필 수 있다. 이상의 그림에서는 대체로 관현악기에 북과 장구를 곁들인 악대와 가야금, 거문고, 양금 등의 연주와 노래, 춤을 담당한 여기들로 구성된 주악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연주 및 춤의 곡명은 다섯 명이 추는 〈처용무〉 외에 분명히 알기 어렵다. 한편, 여기 대신 무동이 출연한 사례는 숙종의 기로소 입소를 기려 제작된 〈기사계첩(耆社契帖)〉(1720)의 ‘기로소 사연’ 장면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도상에 표현된 사악 장면은, 문헌 기록과 함께 주요 참고 자료이기는 하나 문헌에 기록된 악무 및 악기편성과 인원 수를 판단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한계가 있다.
사악은 유교 사회에서 임금이 신하들에게 베푼 사연의 주요소로, 악무를 통해 질서와 조화를 구현하는 매개체로서 중시되었다. 또한 성리학적 유교 사회에서 ‘상하(上下)를 분별하고 명분과 등위(等威)를 드러내기 위해 등급을 두어 용악 제도를 마련한 점은 궁중음악 문화의 특징적인 면이라 하겠다.
『악학궤범』 『육전조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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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혜진(宋惠眞)